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요한 1,29-34)

2013. 1. 3. 오전 8:15:51

글자

2012년 1월 3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요한 1,29-34) 

 

말씀의 초대

 

요한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께 큰 사랑을 받은 자녀임을 상기시키며 이에 맞갖은 삶을 피력한다. 곧 옳은 일을 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 안에서 자신을 순결하게 할 것이며,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요한 세례자는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줄 때의 체험을 떠올리며 그분이 바로 구약에서부터 고대하던 메시아이심을 증언한다. 그는 이러한 증언을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표현을 통해 밝힌다(복음).

☆☆☆

우리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고, 그리스도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살아간다(제1독서).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지칭하면서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을 일깨워 주고 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하느님의 성령을 부여받았고, 이제부터 펼쳐질 구원의 시대에 그 성령을 세상에 가득 쏟아부을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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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면서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체험한 요한 세례자는, 이제 사람들에게 그분에 대한 증언을 하는 동시에 두 가지를 포기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증언함으로써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추종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요한 1,35-37 참조). 두 번째로 포기한 것은 하느님의 소명으로 베풀어 오던 세례입니다. 자신의 세례는 단지 물로 주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으로 베푸시는 세례라고 하면서 이제는 바로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이처럼 요한 세례자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 있는 두 가지를 기쁘게 포기합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라고 고백하며 무엇을 포기하고 있습니까? 자기 중심의 삶에서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요한 세례자처럼 자신의 삶에서 의미 있는 그 어떤 것을 포기하는 삶이 아닐까요?

☆☆☆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면서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어린양은 두 가지 상반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고통을 받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 생명의 활력을 주는 모습입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말한 하느님의 어린양은 이 두 모습을 다 갖춘 어린양의 모습입니다.
사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커다란 걸림돌입니다. 이 ‘주님의 종’은 사람들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죽음에서 예수님의 운명이 모두 끝났다면 사람들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하느님의 선하심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로써 궁극적으로는 사랑이 악을 이기는 힘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어서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요한의 이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희망과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수난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빌미가 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립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참삶을 살지 못할 때, 세상 사람들은 이를 빌미 삼아 예수님을 또다시 죽음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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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속죄제는 의무였습니다. 죄지은 사람은 누구나 바쳐야 했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고, 보통 사람은 어린양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속죄제는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속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고 외칩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 주실 분이란 외침입니다.
사람들은 밝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도 밝은 이야기는 드물게 합니다. 행복한 모습으로 남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도 행복한 행동엔 인색합니다. 기쁨을 주면 기쁨이 돌아옵니다. 자비를 베풀면 자비가 되돌아옵니다. 체험해 본 사람은 압니다. 자신의 것을 내어 놓지 않으면
어린양이 될 수 없는 것이지요.
교리 시간에 잘 나오지 않고 가끔은 엉뚱한 질문을 하던 사람이 영세한 뒤 진실한 교우가 되는 것을 봅니다. 나중엔 헌신적인 본당 간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어떻게 그 사람이 변화되었을까? 누가 그 사람을 바꾸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의 뒤에는 오랫동안 기도해 온 그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내의 기도와 헌신이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아내는 그에게 다가가
어린양이 되었던 것이지요. 남을 위한 기도는 주님께서 들어주십니다. 누군가를 위해 어린양이 되면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비둘기는 상서로운 새였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힘과 기운이 그러한 모습으로 예수님께 오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요한이 예수님께 승복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그건 하나의 표현일 따름입니다. 사실은 주님께서 요한에게 가시어 그를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면 누구나 변화됩니다. 그분께서 이끄시는데 그 자리에서 버틸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미적미적하다가도 결국은 그분의 손길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다만 그분께서 이끌어 주시도록 누군가 기도해야 합니다. 누군가 끊임없이 희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운은 그러한 사람의 염원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
기도가 없는 신앙은 식기 마련입니다. 뜨거움이 없기에 식는 것이지요. 세례자 요한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주님께서 그의 내면에 뜨거움을 주셨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백성의 염원이 요한에게 닿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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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 
 

-주영길 신부-


어릴 적 아무 뜻도 모르고 부르던 성체성가가 생각난다. ‘천주의 고양이며 인자하신 예수`….’ 그때는 막연히 하느님도 애완용으로 고양이를 키우시는가 생각했다. 참으로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발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양(羔羊)은 ‘어린양’을 뜻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고쳐 부르니 아이들이 혼동할 일이 없으리라.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을 전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한눈에 알아보고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한다.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삶 전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혜안은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1,33)
여기서 ‘어린양’은 이집트 탈출을 앞두고 잡아먹었던 ‘일 년 된 흠 없는 숫양’(탈출 12,5 참조)을 뜻한다. 그때 어린양의 피는 이집트에 내린 하느님의 열 번째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맏아들을 구해 냈다. 그리고 어린양의 고기는 광야를 여행할 이스라엘 사람들의 양식거리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해마다 파스카 어린양을 잡으며 하느님께서 베푸신 크신 은총을 새로이 기념하였다. 이제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을 살리는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내다보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영성체 전에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을 고백한다. 이는 우리가 받아 모신 하느님의 어린양처럼 우리도 살아가겠다는 다짐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리는 어린양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는 누구라도 피하고 싶고, 하기 싫은 역할일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떤 자리에서 어린양의 역할을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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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구인가?

-오상선신부-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3,1)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요한 1, 31.32)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요한 1,29)

1. 나는 누구인가?
신학교 처음 들어갔을 때, 교수 신부님이 "나는 누구인가?" 열 가지로 정의해 보라고 하였다. 이름자부터 누구네 몇째 아들, 어느 학교 출신 등 주섬주섬 섬겨봐도 열 개를 채우기가 쉽지 않았다. 또 그 열 가지로 표현된 나는 진짜 나라고는 할 수 없었다. 우리 인생의 화두는 <나는 누구이며, 또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두 가지 존재론적인 질문을 찾아나서는 여정이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잘 아는 사람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잘 알 수 없는 법이다.

2. 우리는 누구인가?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보다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나는 우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에 대한 답을 명쾌히 내려주고 있다. <내가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고 답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은 사람은 이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니???
내가 하느님의 딸이라니???
이 얼마나 기가막힌 일인가?
이 얼마나 가슴벅찬 선언인가?
이 얼마나 고귀한 신분에로의 초대인가?

성탄의 신비는 바로 하느님께서 내가 누구인지를 벅찬 감동으로 가르쳐주시는 기적이다.

3. 그분은 누구신가?
요한은 자신도 처음에는 그분이 누구신지 몰랐다고 거듭해서 증언한다. 그런데 그분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다고 선포한다. 그분은 곧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라고...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가 곧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정체성에 걸맞게 살아감으로써 자연스레 얻게 되는 은총이리라. 이제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그분은 곧 나의 아버지이시며 예수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 파견된 아버지의 겸손한 종이요 그러기에 나의 맏형인 것이다.

4. 나의 소명은 무엇인가?
나는 이제 나의 맏형인 예수 그분처럼 세상의 죄를 없애는데 일조를 해야만 하는 소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기도하자.

주님, 저로 하여금 세상의 죄를 없애러 오신 당신 아드님을 닮아
세상에 죄를 더하는 자 되지 않게 하시고
세상의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자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자녀로서 불리기에 손색없는 자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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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제대로 된 이정표>

-양승국신부-
그런데 산에 자주 다니면서 요즘은 요령이 좀 생겼습니다. 길이 애매해지면, 전반적인 산세나, 계곡의 흐름이나, 나무들의 모양새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대충 산길의 방향을 잡는데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이정표’처럼 고마운 것이 다시 또 없습니다. 하산 길에 한참 길을 헤매다가 ‘매표소’ 몇 Km 라고 정확하게 적힌 이정표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됩니다. 산행하는 사람들에게 이정표는 정말 고마운 존재입니다.

어떤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야할 길을 정확하게 제시해준 제대로 된 이정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제대로 된 안내자 하나 없이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위험하게도 이정표 하나 없는 험한 산길, 폭설이 내린 깊은 골짜기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기 저기 암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짜 메시아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해 백성들을 현혹시켰습니다. 불안한 표정의 백성들은 이리 우르르 몰려갔다 저리 우르르 몰려갔다 하며 오합지졸처럼 행동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깎아 지르는 낭떠러지인줄도 모르고 직진만 하다가 부지기수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어둠과 방황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백성들 앞에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라도 무척 달랐습니다. 헛된 맹세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진지했습니다. 말과 행동에 신뢰가 갔습니다. 백성들도 제대로 된 예언자임을 직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자,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자신을 향해 다가오시자, 세례자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확하게 안내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수님에게로 쏠립니다. 세례자 요한만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 마침내 나타나신 진짜 주인공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리는 순간입니다. 그간 세례자 요한에게 집중되어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이제 제대로 방향을 잡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한 훌륭한 이정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수도자의 삶, 사제의 삶은 어찌 보면 이정표로서의 삶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는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해도 성공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나날은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뒤에, 우리 삶의 배경이 자리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흔적을 발견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 안에서 구원에로의 화살표를 발견합니까? 우리의 생활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생명에로 향하는 이정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어린 양

 반영억라파엘신부

밤새 눈이 내렸습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많습니다. 신년교례미사에 참례해야 하는데 길이 미끄러워 걱정을 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하루의 첫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신앙의 해’에 맞이한 새로운 한 해는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자신과 이웃을 위해 기도하지만 무엇보다도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상태를 구별해 볼 수 있는데 1). 부적신앙을 말씀하시며 고상이나 각종 성상을 모셔두면 자동적으로 복을 얻고 악의세력을 막아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을 우려하셨습니다.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 기복적으로 액막이용으로 성상을 모신다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2). 변덕신앙인이 있습니다. 감정의 기복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성직자나 수도자에 따라 줏대 없이 열심하고, 흔들리는 믿음의 소유자가 있음을 지적하시며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정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쭉정이 신앙인에 관해 말씀하시며 입만 살아있고 실천하지는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강조하시며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반드시 실천이 따라야 함을 지적하셨습니다. 희생, 봉사, 사랑의 구체적 실천이 없는 선교는 힘을 잃어버립니다. 4)참된 신앙인에 관해 말씀하시며 하느님께 자신과 자녀를 봉헌하는 사람이야말로 참 신앙인임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주님, 그리스도, 메시아,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어린양 등등 다양하게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가 저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어느 이름도 그 모든 의미를 다 포함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29)하며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질 희생양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종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서 뽑아 세운 종이며 하느님의 영을 받고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줄 종이며…공정을 세우도록 선택된 사람이며 ….민족들의 빛이 될 자입니다(이사42장). 그러나 그는 고난을 받을 주님의 종입니다. 학대 받고 천대받았지만 입 한 번 열지도 않고 참으며 온갖 굴욕을 받을 종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할 주님의 종입니다(이사53장).

이렇게 ‘하느님의 어린 양’은 고통을 받다가 죽임을 당하는 억울한 모습과, 세상에 새 활력을 일으킬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은 뭇 사람들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세상의 악의 세력을 꺾고 승리자로 오신 것입니다. 묵시록7장17은 이렇게 표현 하고 있습니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어린 양과 전투를 벌이지만, 어린양이 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임금들의 임금이시다.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충실한 이들도 그분과 함께 승리할 것이다”(묵시17,14).

따라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증언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크나 큰 희망과 기쁨이 될 것이며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신경을 건드리는 빌미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 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고 선언하는 것은 곧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요,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할 때 좀 더 진중하고 감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우리 이웃에게 어린양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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