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5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오 17,10-13)
말씀의 초대
집회서는 메시아 시대가 오면 하느님께 들어 높여진 엘리야 예언자가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러 돌아오리라고 예고한다. 엘리야는 평생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았고 마침내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다(제1독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을 고대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세례자를 염두에 두시고 그 엘리야는 이미 왔다고 깨우쳐 주신다(복음).☆☆☆
엘리야 예언자는 불과 연관이 있다. 카르멜 산에서 바알의 사제들과 대결할 때 하늘의 불이 내려와 그를 도왔다.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 보속으로 가뭄이 들 것을 예언했다. 그리하여 삼 년 동안 불볕더위가 떠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불 마차를 타고 승천했다(제1독서). 엘리야는 가나안의 바알 우상을 분쇄했던 인물로, 죽지 않고 승천했다. 유다인들은 종말이 되면 그가 다시 와서 사람들을 준비시켜 줄 것이라 믿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에 비유하신다. 그의 활동을 종말의 준비로 보셨던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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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와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맞도록 그들의 영혼을 준비시킨다는 율법 학자들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갔던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마태 17,3 참조).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이치상 엘리야가 예수님보다 먼저 오지 않고 함께 온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율법 학자들이 잘못 알았다고 여겨 예수님께 여쭈어 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엘리야 역할을 한 요한 세례자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더욱이 헤로데는 그의 목을 잘라 죽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앞으로의 운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이 예언한, 고통을 받고 죽게 될 ‘사람의 아들’이 바로 당신이라고 제자들에게 일러 주십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뵙고서도 눈을 뜨지 못했던 눈먼 이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면 주님을 잘못 이해할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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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기원전 9세기경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유다인들은 그를 모세와 동등한 서열에 두고 있습니다. 회교도들도 그를 진정한 예언자로 고백합니다. 그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남긴 분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일곱 번째 임금이었던 ‘아합’ 시절에 그는 등장했습니다. 당시 사회는 물질 숭배와 ‘바알 우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의 제관들을 제거하며 하느님의 힘을 드러냈습니다. 이후 그는 ‘회오리바람’에 실려 승천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종말이 가까워지면 그가 다시 올 것이라 믿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에 비유하십니다. 당신의 오심을 준비했던 그에게 화려한 평가를 내리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엘리야는 있습니다. 바르게 살도록 이끌어 준 분들입니다. ‘삶의 마지막’을 묵상하게 하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엘리야의 모습’을 지닌 분들입니다. 오늘은 그분들을 떠올리며 다시 또 ‘새롭게’ 삶을 시작해 봐야겠습니다.
사는 것은 잠깐입니다. 고통스러웠던 시간도, 힘들었던 사건도 지나고 보면 빠르게 느껴집니다. 언제나 함께 있을 것 같은 분들도 조용히 떠나가고 있습니다. 인생의 ‘종말’도 그렇게 소리 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엘리야의 모습을 지니는 일이기도 합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를 자신들의 치열하고 처절한 삶, 혹독한 죽음을 통해 예견한 두 대예언자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 이 두 분의 삶은 여러모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하느님 나라 완성을 위한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 안에 이미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죽음도 두렵지 않았을 뿐더러 죽어도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육체는 비록 재가 되어 소멸되었지만 고귀한 영혼은 불사불멸의 나라로 날아올랐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 우선 멋져 보이고, 그럴 듯 해보이고, 있어 보이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고독과 몰이해는 그들의 태생적 운명입니다. 오늘을 살면서도 늘 미래를 내다보며 외쳐야 합니다. 그 어떤 절대 권력이나 폭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기에 언제나 박해와 수모는 필수입니다. 그러기에 삶은 늘 춥고 배고픕니다.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의 삶은 여러모로 흡사합니다. 둘 다 거친 낙타털옷을 걸치고 다녔습니다. 극단적 청빈과 진실한 삶, 거울처럼 투명한 바른 생활을 통해 참 예언자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줬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과 이세벨을 대항해서 투쟁했었는데,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왕과 헤로디아의 그릇된 행실을 정면으로 공격합니다. 엘리야가 횃불처럼 타오르며 뜨거운 열정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했듯이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남김없이 소진시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아주 구체적인 표현을 통해 메시아 오심을 선포하셨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예언자들이 가리키는 이정표 끝에 서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의 몰이해와 불신은 결국 세례자 요한의 참수, 그리고 메시아에 대한 사형언도로까지 연결됩니다.
보시다시피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원치도 않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시는데 때로 죽기보다 힘든 숙제입니다. 완전 귀먹은 백성들을 향해, 이미 물 건너 간 사람들을 향해, 다시 돌아오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합니다. 거듭되는 외침에도 사람들의 몰이해, 그로 인한 박해는 계속됩니다. 결국 외로운 투쟁을 거듭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 땅 위해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란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데 예언자들이 흘린 피는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한 존재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소멸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이 이제 우리에게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엘리야-세례자 요한-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엘리야-세례자 요한-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 안에 생명의 불꽃을 간직한 사람들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비록 육체는 이 세상에서 자취가 사라지지만 영혼은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장 비인간적인 시대, 가장 참혹했던 시대를 살았지만 결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를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끝도 없는 박해와 몰이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하느님의 나라가 반드시 도래할 것임을 설파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통한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 나라가 이 땅위에 완성되었습니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 잔을 마시더라고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구상, ‘그분이 홀로서 가듯’)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
반영억라파엘신부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게 되어 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 본 것입니다.
루카복음 1장16절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1,23)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느님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6,26). 그러나 헤로데만이 그를 죽였는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 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나봅니다. 사실 헤로디아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1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악하기보다도 자기 안에 갇힌 무지의 탓이 크다 할 것입니다.
물론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합니다.
엘리야 예언자와 사렙타 마을의 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