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5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태 15,29-37)
말씀의 초대
만군의 주님께서 잔치를 벌이시는 날,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며 당신 백성의 수치를 치워 주실 것이다. 그날에 모든 사람은 그분이 자기들의 하느님이심을 선포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을 고쳐 주신다. 그리고 먹을 것이 없는 군중을 위해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로 기적을 베푸시어 그들을 먹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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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주 하느님께서 늘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시고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한다. 백성은 언제나 주님께 희망을 걸었고, 주님께서는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온갖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신다. 뿐만 아니라, 군중을 가엾게 여기시고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까지도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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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대구역 가까운 곳에 ‘요셉의 집’이 있습니다. 노숙자들과 홀몸 노인들을 위하여 1988년에 문을 연 무료 급식소입니다. 한 끼에 백 원을 받는데, 찾아오는 손님의 자존심을 살려 주려는 배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얻어먹는 것이 아니라 돈을 내고 먹는다는 당당함을 심어 주려는 따스한 마음씨인 것이지요. 이곳에서는 주일과 수요일을 뺀 나머지 날에는 찾아오는 분들에게 어김없이 점심을 대접합니다.
누가 이렇게 많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접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들은 예수 성심 시녀회 수녀들입니다. 물론 자원봉사자들도 있습니다. ‘시녀’라 함은 ‘종’을 뜻합니다. 예수 성심 시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닮은 종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성심 시녀회는 소외되어 불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남달리 정성을 쏟는 수녀회입니다. 하루 한 끼 ‘요셉의 집’에서 먹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을 위하여 수녀들은 종처럼 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고정 수입도 없는데 어떻게 그 엄청난 먹거리를 마련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요셉의 집’을 운영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이름 모르는 사람들의 후원 때문입니다. 지금도 ‘요셉의 집’에서는 수녀들, 자원봉사자들, 후원자들이 함께 매일 밥의 기적을 통하여 사랑의 기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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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의 기도’의 내용 가운데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청원이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먹고도 남아 쌓아 둘 양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바로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필요한 양식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 모인 군중의 온갖 질병을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일용할 양식까지 주십니다. 그 양식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풍족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저 그들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에 아무 조건 없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유가(儒家)에서는 이러한 마음을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하고, 이는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은 자비, 어짊, 사랑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인’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십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거저 내어 주는 행위입니다. 당신의 온몸을 내어 주시는 행위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이며, 모든 이를 살리는 생명의 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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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대부분 몸을 잘 못 쓰는 이들입니다. 아마도 가족들이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병자도 낫게 하시며 돈도 받지 않으신다는 소문입니다. 그들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데리고 왔지만, 주님께서는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들은 감동합니다. 너무나 감동했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잠시 잊어버립니다. 기적의 순간들을 보면서 ‘천상의 삶’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스승님께서는 사람들을 걱정하십니다. 그리하여 겨우 찾아낸 것이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렇습니다. 감사의 기도가 기적의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드리면 축복이 옵니다. 주신 것을 고맙게 여기면 ‘없어지지’ 않습니다. 더 풍요롭게 하십니다. 감사하지 않는 마음이 ‘병든 마음’인 것이지요.
돌아보면 은혜로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감사의 시각으로 보지 않았기에 불만이 스며들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픈 몸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연히 ‘아픈 마음’도 고쳐 줄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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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많은 것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적절한 시간을 기다리고 기회의 때를 기다리며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등, 우리의 삶은 수많은 기다림의 연속 속에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기다림 속에서 꾸준한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경우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을 어느 정도 기다리다 보면 지치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기다림은 아름답고 슬프다. 그렇지만 사랑을 가진 기다림은 지치지 않는다.”는 서양의 격언처럼,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에게 유일한 힘의 원천은, 바로 그 기다림에 대한 희망과 그 기다리는 대상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기다릴 힘을 얻지 못할 것이며,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기다리고 싶은 마음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기다림이란 그 사람이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으며 또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는 마음의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품어 생각하면
반영억라파엘신부
아침잠에서 깨면서 ‘살아있구나’‘오늘 하루를 또 허락 하셨구나.’ 하고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날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고,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데 얼마나 알아듣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반성합니다.
그리고 하루의 끝에서 어떻게 감사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매일이 새 날인데 새날을 만들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왜 오늘날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십니까?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지 않으시는 주님이 야속합니다.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 주셨고 육체적인 굶주림을 채워주셨던 주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능력을 밝히 드러내시길 기도합니다.
사실 세상의 굶주림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베풀면 세상의 기아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하신다 해도 내가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굶주림은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의미를 품어 생각하면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매여 있으면 언제든지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은 뵙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의 열매보다도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새겨야겠습니다.
예레미야서 31장 33절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게 된다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하고 말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의 하느님이 되신 그분이 오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의 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다시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바로 나눔의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자기들끼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능력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는 사람, 기적을 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먹고도 남는 일곱 바구니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역 광장에서 만난 천국(天國)>
얼마 전의 일입니다. 회의 차 지방에 갔다가 밤늦은 시간에 집 가까이 있는 국철 역에 도착했습니다. 역 광장으로 내려오니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 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국철 역을 배경으로 숙식을 해결하고 계시는 노숙자분들을 위해 인근 한 교회신자들의 무료 급식 봉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저희 수도회에서도 노숙청소년들을 위해 뭔가 해야 되지 않겠냐는 논의가 있어 저는 한참동안 바짝 다가가서 유심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봤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봉사자들의 일사 분란함이었습니다. 손발이 척척 맞 았습니다. 배식봉사를 하시는 분들, 뒷정리를 하시는 분들, 질서를 잡는 분들...아마도 많은 연구과 시행착오, 기도 끝에 얻어진 결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봉사자들이 환한 얼굴로 기쁜 마음으로 봉사에 전념하고 있음에 보기가 좋았습니다.
줄은 모두 세 줄이었습니다. 첫 번째 줄에서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 가는 쇠고기 국밥을 나눠드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한 그릇 받아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냄새가 그럴 듯 했습니다. 국밥을 받아든 분들의 얼굴이 일순간 환해졌습니다. 잠시나마 행복함을 맛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분들에게 그 순간은 아마도 천국을 맛보는 순간이겠지요.
그리고 두 번째 줄에서는 긴 밤을 꼬박 새우잠을 자야할 노숙자 형제들의 새벽녘 출출함을 달래주기 위해 먹음직스럽고 커다란 빵이 하나씩 나눠지고 있었습니다. 보너스로 빵까지 받아든 분들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깃드는 것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 번째 줄에서는 후식으로 커피를 원하는 분들에게 일일이 타드리고 있었습니다. 노상이었지만, 소박했지만 정성이 담긴 풀코스 서비스를 받은 분들의 모습이 행복해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20분 이상 배식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저를 흘끔흘끔 바라보시던 봉사자 아주머니께서 참다 참다 못해 제게 한 소리 크게 외쳤습니다.
“아저씨, 백날 여기 서 있어봐야 소용없어요. 아저씨도 저 뒤로 가서 줄서세요!”
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제가 받은 충격이 컸지만 당시 역 앞에서 저는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밤늦은 시간 잠깐이었지만 역전에서 있었던 그 소박한 행사(무료급식)는 진정 감동 깊은 축제의 한마당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정성을 다해 준비한 따뜻한 음식들이 세파에 지친 이웃들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사랑과 나눔의 축제, 다름 아닌 최후의 만찬, 즉 미사였습니다.
오늘 복음 역시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발휘되는 복음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능력을 전해들은 수많은 불치병환자들과 그 가족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실낱같은 마지막 희망을 안고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의 옷자락 끝이라도 붙잡아보려고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서 한번 벗어나고 싶어 기를 쓰고 예수님을 에워쌌습니다. 병자들과 그 가족들은 자신들의 차례를 놓칠까봐 끼니마저 거르면서 자신들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났습니다. 허기에 휘청휘청 거리며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예수님 눈에 목격되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발휘되는 순간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 한 끼 제공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바로 복음이 실현되는 행위, 구원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무료급식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단기처방에 불과하다. 노숙인들을 더 양산시키는 일이다. 그들에게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들 나름대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온 분들인지 모릅니다. 가난의 악순환을 한번 벗어나 보려고 얼마나 발버둥 쳐온 분들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공정한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냉혹한 우리 사회의 피해자이자 희생자들일지 모릅니다.
점점 쌀쌀해져가는 날씨에 노숙인들을 위한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강구되길 기원합니다. 수많은 노숙인들, 또 후보 노숙인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우리들의 손을 통해서 작동되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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