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루가 19,45-48)

2012. 11. 23. 오전 6:42:53

글자
 

2012년11월23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예수께서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루가 19,45-48)

 Jesus entered the temple area
and proceeded to drive out
those who were selling things,
saying to them,
“It is written,
My house shall be a house of prayer,
but you have made it a den of thieves.”

 

말씀의 초대
요한이 하느님의 말씀인 두루마리를 받아 삼키자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다. 구원의 복음은 달지만, 막상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박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배가 쓰린 것이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집인 성전이 장사꾼의 소굴이 아니라 기도하는 곳, 거룩한 곳이기를 바라신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을 꾸짖고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신다(복음).

☆☆☆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하느님의 말씀인 두루마리를 받아 삼킨다. 그것은 입에는 꿀처럼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다.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달지만, 박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쓰기도 하다. 말씀을 증언하는 행위는 만민을 살리기 위함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신다. 성전은 기도의 집이지, 강도들의 소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의한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모의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방해하셨기 때문이다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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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무교절 축제 때에는 수많은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에 몰려듭니다. 그들은 성전에 희생 제물로 동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 동물의 수는 축제를 지내러 성전에 온 사람들의 수만큼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밖에서 온 사람들은 동물을 사려면 돈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성전은 동물들과 환전상들로 북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전이 잘못된 봉헌 제도 때문에 완전히 장터로 변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이 장면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봉헌 예식에 쓸 동물을 파는 장사꾼들을 내쫓으십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성전 정화 행동이 그들의 비위를 건드려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지 뻔히 아셨습니다. 성전 당국자들에게 도전하는 것은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 중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는 데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겪게 되는 어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요? 바오로 사도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2코린 6,16) 하고 말한 것처럼,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 안에서 내쫓아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지요?

☆☆☆

하느님 백성인 우리의 사명은 세상에 나가, 많은 백성과 민족과 임금들에게 예언직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언직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 주신 모든 것을 증언하는 직분입니다. 복음 말씀은 사람들을 달게도, 쓰게도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권력과 재력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당신의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은 주님의 집이고, 그 집에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합니다. 기도의 집인 성전이 재력을 가진 상인들과 권력을 가진 지도자들이 결탁하여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고 있으니, 정화되어야 함은 지극히 마땅한 일입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재물과 권력을 섬기는 자는 죽음의 길로 치달을 것이고, 회개하여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몸이 바로 주님께서 계시는 성전이 됩니다. 만일 그 성전이 반(反)하느님적인 것으로 뒤덮여 있다면, 우리 또한 주님을 닮아 하루빨리 정화하고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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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 합니다.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없애려 듭니다. 놀랄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역사 안에서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에도 재연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율법과 성전이 예수님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술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친절했고, 술맛도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잘 팔리지가 않았습니다. 그가 이웃집 노인에게 원인을 묻자, 노인이 물었습니다. “혹시 사나운 개를 키우는 것은 아닌가?” 그가 대답합니다. “무서운 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술이 잘 팔리지 않는 것과 상관이 있을까요?” 노인이 다시 답합니다. “누구나 개를 두려워하지. 술을 사러 갔는데, 가게 앞에 사나운 개가 버티고 있다면 쉽게 들어가겠나? 그 개가 원인일세.” 중국의 고전 『한비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은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에게 유익한 길을 안내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무서운 판관이 되어 겁을 주고있습니다. 성전 역시 편안한 곳입니다. 누구나 가서 위안을 받는 곳입니다. 하지만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무서운조건들입니다. 주님께서 계신 곳을 사람이 막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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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세 번 세워집니다. 처음은 솔로몬 임금이 세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의 침공으로 파괴됩니다. 두 번째는 바빌론 포로에서 풀려나 즈루빠벨 총독의 지휘로 재건된 성전입니다. 그러나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파괴됩니다. 세 번째는 헤로데가 다시 지은 예수님 시대의 화려했던 성전입니다. 이 역시70년 로마군에게 파괴되고 맙니다.
이처럼 유서 깊은 성전이건만 기도하는 사람 못지않게 장사꾼도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몰아내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성당 안에서도 세상 걱정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성당에서는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합니다. 걱정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하러 성당에 왔으면서도 기도보다는 걱정에 빠져 있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지요
.
우리가 성당에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불과 한 시간 남짓입니다. 온전히 몰두하지는 못해도 가까이는 가야 합니다. 걱정한다고 그 시간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성당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밝고 웃는 얼굴로 감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걱정을 거두어 주실 분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건성으로 성당에 다니기에 그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습관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강도의 소굴

 반영억라파엘신부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 되었던 과일 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 사랑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세상에 이런 성전이>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구나" 하고 나무라시는 예수님의 질타를 묵상하면서 참된 성전이란 과연 어떤 성전이겠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대성전은 기본이고 몇 개나 되는 부속성전, 친교의 공간, 휴식 공간, 기타 서비스 공간이 완벽하게 갖춰진 성전 역시 좋은 성전임에 틀림없습니다.

 짱짱한 음향설비는 물론이고, 사방이 휘황찬란한 고가 예술품으로 장식된 품위 있고 고상한 성전 역시 기도하는 분위기가 나는 좋은 성전이겠습니다.  매주 수 만 명이나 되는 미사참례자들이 줄을 잇고, 매주 수 천 만원의 거액이 오고가는 초대형 본당 역시 좋은 성전입니다.

그러나 위에 제시된 조건들은 대체로 부차적인 것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진정한 성전이 갖춰야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 각자 각자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공간이 협소하거나 열악할지라도 기도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진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기도하는 장소, 그곳이 바로 참된 성전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는데 만족하지 않고 말씀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 복음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고 복음을 몸으로 직접 살려는 다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야말로 참된 성전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겸손한 봉사와 구성원들이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곳, 구성원간의 상호 원활한 의사소통과 친교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야말로 참된 성전입니다.     복음 정신을 바탕으로 자발적인 나눔이, 이웃과의 사심 없는 빵의 나눔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참된 성전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중심의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보편적인 인류애가 구현되는 공동체, 인간 중심의 육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영적인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자신의 욕구나 의지대로만 살지 않고 이웃의 의지, 그리고 성령의 인도에 생활 전체를 맡기는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구성원들의 존재 자체, 삶 자체로 선교하는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구성원 각자 각자가 세상 앞에 또 다른 그리스도, 제2의 그리스도로 서고자 염원하는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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