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케오야, 어서 내려오너라.(루가 19,1-10)

2012. 11. 20. 오전 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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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자케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가 19,1-10)

말씀의 초대
생명력을 잃은 사르디스 교회는 칭찬은 조금 듣고 질책을 많이 받는다.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물질적인 부를 자랑하지만 주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모든 것이 결여되어 있다(제1독서). 세관장인 자캐오는 부자였으나 세리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키가 작다는 이유로 무시당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돈으로 살 수 없는 구원을 받았다(복음).

☆☆☆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위선적이고 알맹이가 없이 껍데기만 남아 있는 사르디스 교회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부유하고 자신감에 차 있지만,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아 미지근한 라오디케이아 교회에는 입에서 뱉어 버리시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장이고 부자인 자캐오의 집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신다. 자칫 잃어버릴 뻔한 자캐오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찾으셨고, 그와 그 가족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 (복음).


오늘의 묵상
세관장인 자캐오는 세리라는 이유로 죄인으로 낙인 찍혀 유다인 사회에서 배척당한 사람입니다. 더욱이 그는 키가 작아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하였으나 키가 작아서 군중 속에 파묻히고 맙니다. 그러자 그는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키가 작다는 약점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예수님께 마음의 문을 활짝 연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약점과 한계가 있습니다. 약점이 있고 불완전하기에 남들에게 비판받거나 무시당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상처들을 다 없애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상처에 대처하는 좋은 방법은 상처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상처와 화해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은 약하고 불완전하며 약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환자가 자신의 아픈 곳을 의사에게 보이거나 말하지 않으면 의사는 환자를 고칠 수 없습니다. 열등감이라는 상처는 자신의 약점과 불완전함을 숨기려고 할 때 생깁니다. 그러면 열등감은 치유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시며 사랑하십니다. 이웃이나 주님께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 놓을 때 상처에서 해방되어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있는 자캐오를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주님의 이 말씀에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주님을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주님께서 자캐오를 부르셨고, 자캐오는 주님의 부르심에 기쁜 마음으로 지체 없이 주님께 응답합니다.
신앙은 주님을 우러르며 믿는 것이고, 신앙생활은 그 믿음을 생활로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자캐오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주님을 드디어 만나 뵙습니다. 이 만남은 주님의 부르심과 자신의 노력과 응답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만남으로 자캐오의 삶은 180도로 바뀌게 됩니다.
부르심과 응답의 역학 관계로 만남과 변화라는 새로운 삶의 방향이 설정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서 온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게 된 자캐오는 말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자캐오는 세관장이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았습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자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눈이 마주쳤을까요?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감동한 자캐오는 다른 사람을 등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그의 ‘핸디캡’을 뜻합니다. 어쩌면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사람들을 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나무 위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신은 사람들을 피했는데, 주님께서는 부르신 것입니다. 그의 ‘열등 의식’을 감싸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역시 ‘부족함’을 안고 살아갑니다. 자캐오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좋아하는 이에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이를 닮아 가는 행동입니다. 서서히 그에게 ‘물들어 가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먼저 실행해야 합니다. 가족 중에도 분명 ‘자캐오’는 있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사람은 닮습니다. 좋은 모습은 빨리 닮습니다. 사랑하면사랑하는 이에게 조금씩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사랑하는 것은 물들어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인도 모르는 새 서서히 물들어 가는 것이지요.
자캐오는 예수님에 관한 여러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매료되어 갔습니다. 한 번이라도 뵈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캐오는 그런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고향을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려고 했지만 키가 작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핸디캡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죄에서 희망을

-양승국신부-

사막의 대영성가 까를로 까레또 형제는 침묵과 은둔, 심오한 묵상 끝에 자신의 깊은 내면을 정확하게 들여다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죄와 부족함을 하나 하나 알아가면서 절망하기보다는 오히려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고백을 하기에 이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심연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죄악에서다. 악의 심연 밑바닥에 도달할 때 우리는 가까이 있는 은총의 심연에 눈뜨게 된다.

우리의 무력함이 뼈저리게 느껴질 때 우리에게는 무엇인가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비참의 심연에 떨어졌을 때보다 인간의 눈에 하느님이 분명히 비치는 때는 없다.

바빌론에 끌려간 이스라엘이 거기서 자기네 하느님을 다시 보게 된 것은 당연했다. 그 암담한 절망과 고독 속에서 그들에게는 참다운 희망이 되살아났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관장 자캐오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회심의 과정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캐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세리 중의 세리, 세리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유대 사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손가락질 받았던 죄인들의 대표였습니다. 로마에 빌붙어 동족들을 등쳐먹던 매국노의 대명사였습니다.

비록 많은 부를 축척했겠지만 공공연한 죄인으로 낙인찍혀 우울하게 살아가던 자캐오의 당시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어쩌다보니 그런 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자캐오의 내면은 뒤죽박죽이었습니다.

죄책감, 수치심, 참담함, 우울함, 분노, 좌절로 얼룩진 절망의 상태였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캐오, 자신 안에 깃들어있던 철저한 어둠을 먼저 깨달은 자캐오였기에 보다 쉽게 하느님으로부터 다가온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는 희망이 없다, 돈 역시 다가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자캐오였기에 선물로 다가오신 구원자 예수님의 옷자락을 꽉 움켜쥘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짓는 진짜 죄는 이런 저런 자질구레한 죄보다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늦게야 하느님을 만난 자캐오였지만, 그는 회심이후 오직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었습니다. 비록 갖은 죄를 다 지은 중죄인이었지만 죄보다 더 강렬한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런 자캐오에게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신구약성서 전체를 다 훑어봐도 찾아보기 힘든 말씀, 구원을 100% 확증하는 말씀을 자캐오에게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연중 33주간 화요일(루카19,1-10)

버려야 할 것 

반영억라파엘신부

사람은 각기 자기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그에 맞는 처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접은 크게 받기를 원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기를 바라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고 주위에는 나무도 새소리도 없습니다. 사해는 물이 흘러 나가는 강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인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썩어버렸습니다. 반면에 갈릴래아 호수는 요르단 강에서 물을 받아들인 만큼 사해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언제나 생명이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면 결국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세관장이라는 위신과 체면을 포기하고 나무에 올랐습니다. 주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 때문입니다. 갈망이 큰 만큼 키가 작다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고, 따라서 나무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의 정성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하시며 그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죄인 취급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찾아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신을 보고 못마땅해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9-10)

만약 자캐오가 부자라는 것에 대한 자만이 있었더라면, 세관장이라는 위치를 고집했더라면 그 위신과 체면 때문에 나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돈에 눈멀었던 그였지만 가난한 이를 위해 재산의 반을 내놓을 마음이 생겼고, 혹시라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라도 갚아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룰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무리 풍요하더라도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가 나무에 오르지 않더라도 자캐오를 부르실 수 있으시지만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10)고 하신대로 모든 이를 구원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주님 때문에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이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주님과의 깊은 입맞춤으로 삶의 쇄신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티모1,15)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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