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눈을 떠라. (루가 18,35-43)

2012. 11. 19. 오전 6:3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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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19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예수께서는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18,35-43) 

 

Jesus asked him,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He replied, “Lord, please let me see.”
Jesus told him, “Have sight; your faith has saved you.”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그가 대답하자

 

 

말씀의 초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기호와 상징을 사용하여 오늘날 터키로 알려진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전하고 있다. 요한은 박해로 위협받고 있는 교회에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리코의 눈먼 이의 청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 주신다. 그 눈먼 이는 예수님께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힘이다(복음).

☆☆☆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한다. 이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리코를 지나시다가 눈멀고 구걸하는 이의 청원을 들어주신다. 그는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소원을 들어주신다 (복음).

☆☆☆

 

오늘의 묵상
길가에서 구걸하던 눈먼 이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소리를 질러 자비를 청하지만 그 소리는 군중의 무리에 파묻히고 맙니다. 그러자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어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눈을 뜨게 된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오늘 복음은 이복숙 시인의 ‘하늘이 보이는 때’라는 시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늘은/ 늘 열리어 있습니다만/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 메마르지 않은 사람에게만/ 하늘은 보이는 것입니다.// 늘 하늘 아래 살면서도/ 참 오랜만에야 하늘을 보는 것은/ 이따금씩만/ 마음의 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볼 적마다/ 이제는 늘 하늘을 보며 살자 마음먹지만/ 그러한 생각은/ 곧 잊히고 맙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늘은 열리어 있지만/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만에야/ 참 오랜만에야/ 하늘은 보이는 것입니다.
평소 주님을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아프거나 어려움에 빠질 때에만 애타게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병이 치유되거나 절박한 문제가 해결되면 또다시 주님을 잊고 살아갑니다.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하늘은 늘 열려 있지만 마음이 메마른 사람은 열린 하늘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마음의 문을 열면 보이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

 주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방법이 다양한 것처럼,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주님을 따라나서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오늘 예리코 근처에서 애타게 주님을 기다리던 눈먼 걸인도 마침내 주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주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큰 소리로 주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애타게 부르짖으며 당신께 자비를 구하는 그 눈먼 거지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청원을 기꺼이 들어주십니다.
그 거지는 주님만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시고 병을 낫게 해 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소망대로 주님을 만나 뵌 그는 주님께 신앙 고백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참된 신앙 고백에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고, 그는 곧바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라나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일상 속에서 언제든지 우리를 부르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고 우리의 신앙을 매순간 고백하고, 그분을 따라나서느냐 아니냐가 중요할 따름입니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오늘 예리코의 ‘눈먼 이’는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결국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목이 빠지게, 정말 간절하게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치 구조를 기다리는 난파선처럼, 구급차를 기다리는 응급환자처럼,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번 따라가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강렬히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또 그의 예수님을 향한 기대감, 믿음은 또 얼마나 컸었는지 모릅니다.

 그의 안테나는 오로지 한 방향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만나 뵙고 말겠다는 강한 열의, 그분께 도움을 청해보겠다는 열의, 그분은 반드시 나를 더 나은 삶에로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 그 능동성, 적극성이 그의 외침 안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부르짖음이 얼마나 컸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갑작스런 외침, 돌발 상황 앞에 사람들은 당황한 나머지 ‘조용히 좀 하라’고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단 한 번의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욱 큰 소리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절박하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새 삶을 향한 ‘눈먼 이’의 열정, 적극성, 간절함이 드디어 하늘에 닿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와 만나십니다. 시각 장애로 인해 비참하고 혹독했던 그의 지난 삶을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따뜻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기다렸다는 듯이 ‘눈먼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보십시오. 예수님을 향한 그의 호칭은 어느새 ‘주님’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눈먼 이’에게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을 넘어, 이스라엘의 왕을 넘어,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그래서 자신의 삶과 죽음, 인생 전체를,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당신 손에 쥐고 계시는 ‘주님’이 된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예리코에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앞에 멈추셔서 우리 얼굴을 내려다보시며, 우리의 인생 전체를 바라보시며 똑같이 질문 하나를 던지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오늘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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