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4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루가 17,11-19)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토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남을 중상하지 말고 모든 이를 온유하고 관대하게 대하라고 충고한다. 사람들을 의롭게 하여 구원하신 것은 인간이 행한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말미암은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셨으나 그들 가운데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 한 명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드린다.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입었으면서도 그렇지 못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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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남을 중상하지 말고, 온순하고, 관대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이를 아주 온유하게 대하라고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신다. 그러나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은 외국인 한 사람뿐이다. 믿음으로 사는 이가 예수님께 감사드릴 줄 안다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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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아침 식사 때에 꿀 한 숟가락을 먹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꿀 한 숟가락,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몇 천 마리 벌을 몇 천 시간 동안 날아다니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몇 천 가지 꽃을 피게 하셨고 태양을 비추셨습니다. 비가 오면 벌들이 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하늘은 땅에서 열린다』에서). 꿀 한 숟가락에도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이 담겨 있다는 고백입니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알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렸습니다. ‘천형’(天刑)이라고 불릴 정도로 끔찍한 나병이 깨끗이 치유되었으면 머리가 땅에 닿도록 감사드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병이 치유된 아홉 명의 유다인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린 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유다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지적하십니다.
천국에 사는 복자들의 주된 기도는 감사 기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감사송’을 바치며 이렇게 기도드립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이처럼 감사는 인간이 하느님께 드려야 할 첫째 의무이자 인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기도하며 오늘 하루를 지냅시다. “주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제 한 가지만 더 주소서.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저에게 심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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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는데, 보기에도 끔찍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 높여 청원을 드립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병을 천형(天刑)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나병은 인간이 걸릴 수 있는 질병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병이라는 뜻입니다. 최근에는 의학의 발달과 높아진 생활 수준 탓에 나병 환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체가 직접 상처 부위와 맞닿지 않으면 전염되지 않는다는 임상 결과까지 나와서, 나병이 결코 ‘천형’이 아님이 확인되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몸을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몹쓸 병에 걸린 사람이 나으면, 사제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사제에게 가는 동안 병은 깨끗이 나았지만, 주님께 감사드리러 온 사람은 사마리아인 한 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자신들의 이권만 챙긴 뒤 어디론가 가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면서 구원을 덤으로 주십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이 주님께 감사드릴 줄 알고, 더불어 주님께 구원의 은총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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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한센인 열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했습니다. 혼혈인이라며 비웃고 이방인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은 감사드리러 왔는데, 정통 유다인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책입니다. 감사를 잊어버리는 것이 한센병보다 나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아홉’은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은혜를 망각하며 산다는 암시입니다.
병이 나은 사람들은 왜 감사를 잊고 가 버렸을까요? 예수님께 갔더라면 또 다른 은총을 받았을 터인데, 왜 그랬을까요? 너무 기뻐서 그랬을 것입니다. 벅찬 감정에 취해 순간적으로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랬더라도 그들은 은혜를 망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그렇게 됩니다. 청할 때의 ‘다급한 모습’을 감추려 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은총에는 감사가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더 큰 축복으로 인도됩니다. 감사는 은총을 붙잡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불만이 아홉이고 감사가 하나이더라도, ‘하나’를 기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바뀌게 됩니다. 기쁨이 아홉이고 불평은 하나인데도 불평만을 잡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지요? 언제라도 시각이 삶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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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이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천형의 시인이라 불리었던 한하운의 시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의 한 부분입니다. 일생을 나환자라는 멍에 속에 살다 간 그의 한이 유리 조각처럼 아프게 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한과 설움은 오늘날의 현실만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이 병의 출발은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음보다 더한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려집니다.
레위기에서는, 그 병의 증상이 나타난 사람이 있으면 ‘7일간 격리 수용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 다시 검진을 받아 병이 진전되지 않았다면 ‘7일간 한 번 더 수용된 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13,4-5 참조).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기에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아픔을 아셨기에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토록 애원한 그들이었건만 은혜를 망각한 것입니다. 너무 기뻐 잠시 모든 것을 잊어버렸을 겁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금이라도 받은 은혜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갔느냐?”
- 양승국신부-
<불평불만, 이제 그만!>
언젠가 미혼남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한 가지를 관심 있게 본적이 있습니다. 질문 내용이 ‘내 남자(혹은 여자) 친구, 이럴 때 제일 싫다.’였는데, 그중에 눈에 띄는 상위권 대답이 이랬습니다. ‘대중식당에서 큰 소리로 종업원들에게 야단치고 유세부리는 남자(여자)친구.’
저 역시 대중식당에서 제일 꼴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상전도 그런 상전이 없습니다. 종업원들을 마치 몸종 다루듯 다룹니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피곤한 사람들을 제대로 괴롭힙니다. 다른 데서 못 푼 스트레스를 풀기라도 하려는 듯 수시로 불러대고, 이것 왜 짜냐? 저것은 왜 식었냐, 갖은 불평불만들을 털어놓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젠가부터 다짐을 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시키지 않고 직접 가져온다. 주면 주는 대로 먹는다. 절대로 음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는다.
참으로 하지 말아야할 것이 ‘불평불만’이란 것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게 쉽지 않습니다. 불평불만이란 것, 한 번, 두 번 하다보면 그게 슬슬 습관이 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입만 열었다 하면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불평불만, 그것은 우리 인류의 역사와 같이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시대 때도 이 불평불만은 대단했습니다. 출애굽 시절을 한번 돌이켜보십시오. 민족의 지도자 모세의 인도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염원이었던 이집트 노예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향해 기쁨의 행렬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사랑과 자비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섰을 때 홍해를 둘로 가르셔서 그 한 가운데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게 되었을 때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백번 천 번도 더 감사하고 찬양해도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몇몇 ‘개념 없는’ 사람들 처신하는 것 좀 보십시오. 즉시 불평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합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빼내왔느냐?” “왜 가도 가도 끝이 없냐?” “이집트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고기에, 술에 산해진미였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지긋지긋한 만나를 먹어야 되나?”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에 하느님께서도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시고 전혀 그러실 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크게 진노하십니다.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정말 싫어하시는 것, 바로 불평불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큰 치유의 은총을 입은 나병환자들의 모습도 한번 보십시오. 자신들에게 새 삶을 부여하신 예수님, 생명을 도로 찾아준 예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열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었습니까?
하느님께서 가장 즐겨 받으실 봉헌은 바로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생토록 베푸신 하느님 자비에 대한 우리 인간 측의 응답은 너무나도 당연히 ‘감사’여야 하지 않을까요?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참 수도자라면, 입을 열었을 때, 즉시 튀어나와야 하는 말이 감사의 말이어야 합니다. 찬미의 노래여야 합니다. 축복의 인사여야 합니다.
가장 많은 불평불만은 대체로 인간관계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말입니다.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러나? 저 사람은 왜 인생 저렇게 사나? 저 사람은 왜 나와 이토록 철저하게도 다른가? 내가 과연 언제까지 저 사람을 참아줘야 하나?
그러나 한번만 생각을 뒤집어보십시오. 한번 크게 뒤로 물러서서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은 선물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보물보다 값진 선물입니다. 한 사람이 내게 온다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입니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입니다(정현종, 방문객 참조).
이웃에 대한 불평불만은 이제 그만 접읍시다.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의 노래로 우리 삶을 가득 채웁시다.
매사에 감사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 앞섭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17,13)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 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그 사람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선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은혜를 당연히 생각 말고 은혜를 통해서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매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결국은 불평불만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보십시오. 살아있음이 감사입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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