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가 13,22-30)
오늘의 묵상
시월의 마지막 날이면 기억나는 신학생 때의 일이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밤 11시면 잠자리에 드는데 이때 하루를 잘 마무리하며 좋은 꿈을 꾸라고 5분 동안 조용한 음악을 들려줍니다. 음악을 선곡하여 들려주는 담당자는 신학생 가운데에서 뽑습니다. 그런데 시월의 마지막 밤에 귀에 들린 음악은 당시의 유행가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들리는 소문으로는 전날 밤에 음악을 틀어 준 그 신학생은 학장 신부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답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살면서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꺾고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물리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고통을 감수하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좁은 길은 외롭고 두려워서 자발적으로 선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쉽게 현실과 타협하며 넓은 길로 가려고 합니다.
인간은 이기심과 탐욕으로 말미암아 자신 안에 계실 하느님의 자리를 몰아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본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 변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서실 그 자리에 다른 것들로 채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들어서실 그 자리에 하느님으로 채우셨습니다. 그러한 길이 십자가의 길이요 좁은 문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는 무엇이 가득 차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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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주님께서 과연 우리를 구원해 주실까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이 주님께 질문을 합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그가 어떤 이유로 그 같은 질문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마을마다 다니시면서 가르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걱정이 되어서 드린 질문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불의를 일삼지 말아야 합니다. 의로운 사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기쁘게 다른 이를 섬기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 주님의 뜻에 따라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이 결국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갈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좁은 문은 결코 좁게 보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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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의 목적은 구원에 있습니다. 온갖 신학 지식과 이론도 결국은 구원에 대한 안내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구원에 대한 열쇠로 좁은 문을 제시합니다.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그러나 들어가기 어렵기에 좁은 것이 아니라, 작아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기에 좁은 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작아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묵상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그분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느낄 때 작아질 수 있습니다. 많은 죄와 큰 잘못을 아시면서도 크나큰 은총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점을 깨달을 때 작아집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자주 체험합니다. 슬프고 끔찍한 일도 당하고, 억울한 일에 말려들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일로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일을 분노 없이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노력을 시작할 때 작아짐이 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대단하나 하느님 은총의 힘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은 말합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현실의 기준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하느님 품안에 있다 할지라도>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수도자 양성소에서 일하다보니 은연중에 가시로 콕콕 찌르는 말들을 자주하게 됩니다. 정곡을 찌르는 말, 들으면 가슴 뜨끔뜨끔한 말들이지요.
보다 수도자다운 삶, 늘 쇄신된 삶을 살라는 의미로, 또 기대치가 높다보니 본의 아니게 어조가 자극적인 경향을 띠고 강경해집니다.
“냉담자는 신자들 가운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도원 안에도 냉담자가 있습니다.” “옷만 그럴듯하게 수녀복을 입었지 실제로는 수도자가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나 미사, 묵상시간에 졸고 있는 형제들, 영성생활에 소홀히 하는 형제들에게는 인정사정없이 몰아 부칩니다. “평신도들 한번 바라보십시오. 얼마나 열렬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하시는데,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시는데 수도자가 그게 뭡니까?” 제대 가까이서 봉사하시는 분들, 본당 구조 안에서 봉사직을 수행하고 계시는 사목회 임원들, 여러 단체 간부들에게도 저는 자주 강조합니다.
“여러분들, 부디 ‘행사진행자’나 ‘이벤트 회사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다른 일반 신자들보다 다섯 배, 열배 이상 더 정성스럽게, 더 경건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석하며, 그 토대 위에 봉사활동을 해나가십시오.
잘 해보겠다는 마음, 실수하지 않겠다는 마음, 좀 더 매끄럽게 진행해보겠다는 마음, 좀 더 프로처럼 해보겠다는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목회 간부란 이유로, 전례 진행자란 이유로, 전례봉사자란 이유로, 성가대원이란 이유로 자신들의 역할에만 몰두한 채, 가장 본질적인 것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절대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의 핵심인 하느님과 체험, 그분과의 긴밀한 만남, 성체성사 안에서의 감동과 회개, 새 생활...이런 요소들은 뒷전인 채, 단지 매끄러운 행사 진행, 행사 뒤풀이, 완벽한 전례, 환상적인 성가 등등의 외형적인 요소들에만 몰두할 때 우리는 쉽게 ‘속빈 강정’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자신의 역할수행을 이유로 전례에 진지하게 참여하지 않고, 열렬히 기도하지 않고, 깊이 몰입하지 않는 전례봉사자들은 ‘이벤트 회사 사람’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신앙인으로서의 연륜이 더해갈수록, 수행의 햇수가 늘어갈수록 더욱 겸손하게 처신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잘 되어나가고 있다고 본인 스스로 여겨질지라도 혹시라도 부족한 점은 없는지? 혹시라도 고칠 것을 없는지? 혹시라도 잘못하고 있는 점은 없는지? 주변사람들에게 수시로 물어보는 그런 겸손한 신앙인으로 매일 하느님 앞에 서길 바랍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하느님 품안에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늘 조심스럽게 자신의 발밑을 살펴보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신앙인이 되길 바랍니다.
갓 수행을 시작한 초심자의 마음, 갓 수도생활을 시작한 지원자의 얼굴로 그렇게 이 세상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지속적인 겸손’ ‘지속적인 자기낮춤’ ‘지속적인 자기쇄신’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 루카 13,22-30
있는 힘을 다 하여라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에는 유명한 매장 패션밸리가 있습니다. 한국의 백화점이나 마찬가지인데 규모는 훨씬 큽니다.
한국은 땅이 귀한 까닭에 위로 치솟지만 미국은 땅이 넓은 탓인지 바닥에 넓게 펼쳐놓았습니다. 지진을 대비한 안배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고층빌딩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참으로 매장이 넓습니다. 동행한 분이 명품코너를 가리키며 아름다운 보석들이 있는데 아주 비싸다고 하시며 한번 구경하시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석인데 어디서 보석을 찾습니까?” 했더니 “신부님은 왕자 병”이랍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답고 귀한 보석을 들여다보면 욕심이 납니다. 귀한 보석을 보는 사람들은 그 보석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석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귀한 보석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석을 아름답게 빛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가13,23)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를 얘기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가13,2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된 미래는 오늘을 통해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나의 보석을 잘 가꾸어야지 남이 만들어 놓은 보석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하지 않고 주어진 기회를 최선을 다해 이용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지 않으면 결국은 마지막 날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루가13,28). 지금 노력하지 않고 훗날 우정과 연줄에 매달려 호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같은 고향 사람이나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형제들이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루가8,21참조).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요한사도는“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7). 라고 선언합니다. 사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힘을 다하십시오.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24,13).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지금 힘쓰고 있는 하나하나의 수고와 땀을 헤아리십니다.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