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이 성령을 통하여 굳세어지고,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들 마음 안에 사시기를 기도드린다. 그렇게 되어 그들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빌고 있다(에페3,14-21).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정화시키는 불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은 서로 갈라져 대립하게 될 것이다(루가12,49-53).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묵시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여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하시며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하십니다.
즈카르야서에서는 “나는 그 삼분의 일을 불 속에 집어넣어, 은을 정제하듯 그들을 정제하리라.”(13,9 참조)라고 하며 종말 때에 불로 심판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말라키서에서는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3,2 참조) 하고 말합니다. 이렇듯이 구약 성경에서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결단을 내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결단하기 전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평화가 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하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결단을 내리고 나면 마음 안에 더 큰 평화가 찾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가져오신 불은 정화의 불입니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불이 아니라 세상을 정제하여 깨끗하고 순수하게 만드는 불입니다.
불로 정화되는 데 겪는 과정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려면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갈등과 번민으로 힘이 듭니다.
그러나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주님의 뜻에 맡길 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불은 어지러운 세상을 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타오르는 불은 주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걸러 낼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는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주님 안에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가 곧 불의 세례이지요.
또 주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평화이시고 일치이신 분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은 얼른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고, 주님께서 당신 날개 안에 모으시는 일치는 세상에서 말하는 일치와 다릅니다. 세상의 평화는 힘의 논리에 따른 것이고, 세상이 말하는 일치는 독재자의 횡포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주님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지 결정하고,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논리를 따라간다면, 우리는 그 즉시 참된 주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와 모녀와 고부가 서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불’은 분명 변화의 불입니다. 세상이 바뀌는 변화가 아니라 내가 바뀌는 변화입니다. 그리하여 바뀐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변화입니다. 그 불을 우리 각자 안에서 일으키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불은 서서히 타오르고, 작은 불이 결국은 거대한 산마저 태웁니다. 한 사람의 보잘것없는 믿음이 나중에는 가족 모두가 입교하게 만듭니다. 박해를 받지만 결국은 박해를 하는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면 언제나 박해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준비를 시켰던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입교한 뒤 가족의 반대를 받는 가운데에서도 꿋꿋이 신앙생활을 계속하여 가족 모두를 입교시킨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면 반드시 보답이 주어집니다. 그 보답은 아무도 기대할 수 없었던 은총입니다. 그 은총이 집안을 변화시켜 새로운 집안으로 바꾸어 나갑니다.
세상은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는 것도 복잡해졌습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습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사회생활은 분명 예전 같지 않습니다. 모임과 단체가 많아지고 의무 사항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가끔은 정말 해야 할 일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본질’이 아닌 것은 포장이 요란합니다. 알맹이가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평화와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권태와 불안에 휘말릴 뿐입니다. 감사와 편안함보다 허영과 낭비가 느껴진다면 돌아서야 합니다. ‘어둡고 습한 길’을 걸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미련과 ‘망설임’은 서서히 불에 태워야 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신뢰’에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행동입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좋은 쪽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희망입니다. 필요한 모임이라도 ‘이 사실’을 방해한다면 접어야 합니다. 중요한 사람이라도 박해자로 등장한다면 달리 처신해야 합니다. 복음 말씀은 가족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은 분명 ‘변화의 불’입니다. 세상이 바뀌는 변화가 아니라 ‘내가 바뀌는’ 변화입니다. 그리하여 바뀐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변화입니다. 불꽃의 점화를 시작하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 12,49-53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분심이 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행복해 지리라 기대했는데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니 당황 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분심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번거로워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토마스 머튼). 사실 진정한 평화를 얻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있을 뿐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 했습니다.” 평화는 주님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집안 식구라 하더라도 주님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고, 세상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의견을 달리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결국 각각의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미카 예언자는 온 백성의 타락을 슬퍼하며 말했습니다.
“경건한 이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들 가운데 올곧은 이는 하나도 없구나….그들의 손은 악을 저지르는데 이력이 나 있고 관리와 판관은 뇌물을 달라 하며 권력자는 제가 원하는 것만 지시한다……
이제 그들에게 큰 혼란이 일어나리라.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 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바라보고 내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내 하느님께서 내 청을 들어주시리라”(미카7,1-7).
사실 하느님 평화 안에 머무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와 구원의 시대를 기대하는 만큼 인간적인 욕심을 버려야 하는 갈등의 시기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평화를 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의 평화를 깬다고 생각하지 말고 참 평화를 위하여 일하십시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토마스머튼).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참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분열을 두려워 마십시오.
오히려 내 마음의 악을 떨쳐버리고 사랑함으로써 평화를 누리십시오. 주님은 평화를 넘치도록 주십니다.
주님을 차지하여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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