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 루카12,54-59

2012. 10. 26. 오전 8: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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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 루카12,54-59
주님의 수인이 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신자들에게 서로 일치하며 살아가라고 당부한다(에페4,1-6).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시대의 징조를 알아 올바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시대의 표징이 무엇인지 알아내어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다(루가12,54-59).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나는 아니야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고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아니라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12,58)는 것입니다. 화해를 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5,24) 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 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에페4,26)권고 합니다.
더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 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사랑합니다.





예전에 본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빠삐용은 살인 누명을 쓰고 절해고도(絶海孤島)의 감옥에 갇힙니다. 그는 감옥에서 탈출하다가 붙잡힙니다. 하루는 그가 꿈속에서 판사를 만납니다. 그는 판사에게 “나는 무죄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하고 항변합니다. 판사는 그에게 “너는 살인죄로 기소된 것이 아니다. 네가 저지른 죄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흉악한 범죄다. 너는 네 인생을 낭비한 죄로 기소되었다.” 이 말을 들은 빠삐용은 유죄임을 인정하며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날씨가 어떠할지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여러 징표로 보여 주셨지만 군중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주님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의 멸망이 곧 닥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촉구하십니다.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길은 때가 더 늦기 전에 지금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조지 버나드 쇼는 생전에 자기 묘비에 새길 말을 정해 놓았습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답니다. “내 인생,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지.” 우리 역시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대며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물쭈물하며 인생을 낭비하다 보면 무덤에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인생살이에서 주님을 몰라보고 지내는 것만큼 후회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유교 사상의 핵심 내용들 가운데 ‘시중’(時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주재하는 하늘의 때에 딱 들어맞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역』(周易)은 이 ‘시중’을 잘 실천할 수 있도록 참고 도서 역할을 하는 책입니다. 이 개념은 어느 것이 하늘의 뜻이고 아닌지를 잘 식별하여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전통적인 유가의 가르침이지요.
굳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들 가운데에서도 더러는 운명 철학관에 가서 이른바 ‘사주팔자’나 ‘운수’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현실은 답답하고 미래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철학관을 찾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약해 흔들리거나, 주님의 뜻에 충실하지 못하고 요행을 바라거나, 희망을 주님께 두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호통을 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무엇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옳은지 아닌지를 식별할 줄 알면, 운수니 사주팔자니 하는 따위를 찾을 필요가 없을 겁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주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가는 것이 이 시대에 참된 신앙인의 삶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내일의 날씨는 예측하면서 내일의 삶은 왜 덮어 두느냐는 말씀입니다. 재물이 앞날을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곁에는 돈과 물질이 넘쳐 나고 있지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현실을 풀이할 열쇠는 언제나 사랑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애정 결핍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능의 탐닉에 쉽게 빠져듭니다. 물질로 영혼을 달래려는 것이지요. 하지만 답이 아닙니다. 갈증만 심해질 뿐입니다. ‘사랑하는 삶이 정상적인 길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화해에서 시작됩니다.
싸운 적도 없는데 무슨 화해를 하란 말인가?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다가서는 행위가 화해입니다. 먼저 웃고, 먼저 말을 걸고, 먼저 손을 내미는 행동입니다. 늘 만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의 뜻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소송 중인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재판관이신 주님께로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보이는 것만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삶 속에는 보이지 않는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깨달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부분들입니다. 사랑도 깨달음입니다. 아픔 없이 어떻게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질책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참사랑의 결핍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능의 탐닉에 빠지고, 또한 그것으로 메마른 영혼을 달래려 합니다. 사랑이 목마른 탓입니다. 그럼에도 원인을 알아채지 못하는 가운데 갈증은 더욱 심해지고, 불안과 허무감이 더해집니다. 젊은이들이 스피드와 폭력과 성적 놀이에 빠지는 주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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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지름길은 사랑하는 삶에 있습니다. 그 삶은 화해에서 시작됩니다. 싸운 적도 없는데 무슨 화해를 하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화해는 마음을 열고 다가서는 것을 뜻합니다. 먼저 인사하고, 먼저 웃고, 먼저 걱정해 주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화해의 시작입니다. 자주 만나는 사람과 가까운 이웃에게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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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만 따라가려 합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깨달음을 통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길에는 십자가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사랑 역시 십자가입니다. 아픔 없이 어떻게 시대의 뜻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시대의 징표를 읽는 것은 또 하나의 깨달음입니다.

 

 

 

세상일은 잘 내다봅니다. 세상이 주는 사인 역시 잘 읽습니다. 경제적 상황이나 미래의 예측 또한 정확합니다. 그런데 사람과는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가족과의 관계도 서툽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요? 자기중심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머리만 믿고 남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늦기 전에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과의 화해입니다. 가족과의 화해요 이웃과의 화해입니다. 돈과 재물이 많다고 노년이 자동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하고 똑똑하면 가만있어도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더 늦기 전에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노년과의 화해입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꾸짖고 계십니다. 시대의 요구는 언제나 화해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건 화해는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말에 공감하는 여유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들의 말을 먼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웃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하면 주님의 말씀도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시대의 ‘아웃사이더’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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