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 루카 10,1-9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유연성, 부드러움, 낙관주의>
한 친절한 택시기사님의 체험담이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플레이오프전 야구중계방송에 신경을 쓰다 보니 ‘전민동’으로 가자는 한 손님의 말씀을 거의 반대편인 ‘정림동’으로 착각하고 출발을 하셨답니다. 거의 도착하고 나서야 ‘이게 아니란 것’을 확인했던 기사님은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는 정중하게 사과를 드렸답니다. 그리고 늦었지만 친절하게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렸답니다.
기사님 쪽에서 크게 굽히고 들어가니 잔뜩 화가 났던 손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거듭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짓는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고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답니다. 기사님의 그 선한 얼굴과 몸에 밴 친절 때문에 비록 도착시간이 두 배로 걸렸으며 빙 돌아와서 미터기 요금도 많이 나왔지만 큰 마음먹고 요금을 내시더랍니다.
그러나 기사님 역시 “순전히 제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까 절대로 요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하고 빨리 차를 돌려 나오셨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자마자 즉시 두 가지 좋은 일이 동시에 생기더랍니다. 조금 달리다보니 당신이 응원하는 야구팀이 극적인 승리를 챙겼는가 하면, 조금 더 달리다보니 마음씨 좋은 장거리 손님이 승차하셔서 손해 본 요금의 몇 배나 벌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음 한번 비우니 거기서 천국이 시작된다’는 말씀은 불변의 진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쪽에서 크게 한번 물러서면 상대편 역시 크게 물러서는 것은 공식입니다. 이쪽에서 확실하게 한번 양보하면 저쪽의 양보도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루가 복음사가 축일을 맞아 선포되는 루가복음에서는 복음 선포자의 자세에 대해서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 참으로 힘겹고도 어려운 과제입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나서는 신자들에게 즉시 와 닿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영과 박수, 대대적인 결실이 절대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냉랭함입니다. 적개심입니다. 모멸감입니다. 문전박대입니다. 쓰라린 실패입니다.
어떤 시대, 복음 선포는 죽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복음 선포가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투쟁이었는가 하면, 때로 놀림감이 되는 지름길이기도 했습니다. 철저한 따돌림이나 집중적인 돌팔매를 자원하는 험난한 길이기도 했습니다.
복음 선포자들 앞에 전개될 이런 난감한 상황을 미리 잘 예견하셨던 예수님이셨기에, 관대한 마음,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유연성, 한없는 부드러움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거듭되는 실패에도 절대로 실망하거나 물러서지 않는 낙관적 삶의 태도를 강조하십니다.
분명히 예견되는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걱정이 크셨던지 이런 표현까지 쓰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복음 선포에 앞서 평화의 인사를 던지는 제자들에게 소금을 뿌리는 이교인들, 제자들 머리 위에 퍼부어질 갖은 욕설과 비난을 미리 예상하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상황 앞에서도 놀라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그 어떤 난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상황을 복음 선포의 기회로 삼으셨던 루가 복음사가의 축일에 복음 선포와 관련된 우리들의 마음자세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던 루가 복음사가였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더 없는 보람으로 여겼던 루가 복음사가였습니다. 갖은 박해와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던 루가 복음사가였습니다. 단 한 번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루가 복음사가였습니다.
기쁜 소식을 듣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이 적음을 항상 가슴아파했던 루가 복음사가였습니다. 세상은 사제들로 가득 찼었지만 주님의 밀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턱없이 부족했음을 안타까워했던 루가 복음사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일생을 끝없이 묵상했으며 세밀하게 적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자신의 생활로 복음을 실천했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한 눈 팔지 마라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고등학교를 다닐 때 자취생활을 하였습니다. 신부가 된 후에도 특수사목에 종사하다 보니 자취 아닌 자취생활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안타까웠는지 많은 분들이 맛있는 반찬도 해 주시고, 곰국도 끓여 주셨고 좋아하는 미역국도 준비해 주셨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냉장고에 있는 국을 꺼내보면 국물에 기름이 떠올라 있습니다. 따뜻하게 데우면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콩깍지가 씌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도 그렇습니다.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땐 기도시간도 많고 성경도 읽으며 활동도 적극적입니다. 열정이 식으면 내 것 먼저 챙기고, 하느님의 몫을 뒤로 밀치게 됩니다. 내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그 다음에 하느님의 것을 챙기려 하니까 찜찜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열정을 다시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분부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 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가10,3).
이 말씀은 온전한 투신을 위해서는 한 눈 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명을 받았으면 그것에 충실해야지 돈 주머니나 식량자루,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장황하고 의례적인 인사에 허비할 틈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있지만 내 사랑이 그 안에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요한15,9-10).
일상 안에서도 내 본업이 무엇이고 그것에 충실하고 있는가? 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다른 부업에 마음을 더 쏟는 것은 아닌지…….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본분이 있고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실 근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한 눈 팔지 말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나 혼자만의 구원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구원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 일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는 능력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선교의 사명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기왕이면 돈 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은 채 더욱이 길에서 인사하느라 지체함도 없이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또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일꾼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온갖 뜻을 꾸준히 전파하도록 합시다!” (성 그레고리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