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일 수요일 위령의 날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 특히 연옥의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5,1-12ㄴ)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형제 여러분, 5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로마서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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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고통 속에서 울부짖다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제 하느님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며, 그의 삶의 목적은 하느님을 뵙는 일이다(제1독서). 희망은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이다. 우리 신앙인의 희망은 구원이며,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제2독서). 행복은 인간의 소원이다. 그런데 참된 행복은 인간이 소유한 것으로는 얻을 수 없다. 참된 행복은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 누릴 수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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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사람은 누구든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조건을 물질적인 풍요로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이 가진 사람이 반드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일수록 가난한 나라보다 이혼율이 높습니다. 자살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일까요? 물질적인 풍요가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짧은 시간 안에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성장의 대가로 치르는 통증 또한 매우 심각합니다. 우리나라는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회원국 34개 나라 가운데 자살률과 이혼율이 제일 높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경제적으로 잘살면 삶의 질과 행복 지수도 높아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 렇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참행복’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께 의지하며 살기 때문에 가진 것이 적어도 그분께서 채워 주시리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여기며 모든 일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일에 감사드리며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처지를 주님께 맡겨 드리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행복은 선물로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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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울에 행복을 달면 /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 불행 49% 행복 51%면 / 저울이 행복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 행복의 조건엔 / 이처럼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 …… // 단 1%가 우리를 행복하게 / 또 불행하게 합니다. / 나는 오늘 그 1%를 / 행복의 저울 쪽에 올려놓았습니다. / 그래서 행복하냐는 질문에 /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 행복하다고 …….
이해인 수녀님의 “1%의 행복”이라는 시에서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내 마음의 무게를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 기울기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이 온전히 행복할 수도 그렇다고 온전히 불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다고 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는 말 못할 슬픔이 잠겨 있고,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희열과 행복이 감추어 있습니다. 사실 행복과 불행은 우리 마음이 어디에 기울어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영성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아야 하는 신앙인은 늘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걷는 사람입니다. 1%의 차이가 우리의 모습을 다르게 만들어 놓습니다. 이 말은 성과 속의 저울 양편에 놓인 우리 마음처럼 1%만 더 주님께 관심을 기울여도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의 삶에는 가난해도, 슬퍼도, 때로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세상이 주는 행복과 다른 행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1%의 마음 기울기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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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우리를 참행복으로 초대하십니다. 참행복은 곧 당신 자신이시고, 당신의 말씀이십니다. 당신 안에, 당신의 거룩하신 그 말씀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고, 하느님 나라야말로 우리가 얻어 누려야 할 참행복입니다.
이미 우리보다 앞서 돌아가신 분들은 그분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 참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연령들이 있다면, 하루빨리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참행복은 세상을 떠난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또한 마음을 비우고, 슬퍼할 줄 알며, 온유한 사람이 되어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도 이미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결국 주님께서 주시는 참행복,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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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0월이 되면 시제(時祭)라는 것을 지냅니다. 5대 이상의 선조들을 함께 기억하며 묘소에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때 벌초도 하고 무너진 곳도 손질합니다. 먼 친족과는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기도 합니다. 직계든 방계든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동양의 전통입니다.
‘위령의 날’은 ‘서양의 시제’입니다. 앞서 간 영혼들을 기억하며 위령 미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사제들은 세 대의 미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중세 때부터 시작된 특전입니다. 더 많은 영혼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라는 취지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대로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라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때가 되면 누구나 하늘 나라로 갑니다. 그들과의 이별이 아쉬운 것은 애정 때문입니다. 그분들 역시 모두를 잊어버린 채 천국에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의 남은 이들을 위해 ‘반드시’ 기도하십니다. 죽음 저쪽에서 ‘행복을 누린다면’ 지상의 가족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습니다. 성인 반열에 오르신 분만이 통교의 대상은 아닙니다. 연옥 영혼들과도 친교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앞서 간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도 기도해 주십니다. 각박한 현실에서 ‘행복과 기쁨’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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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가난’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름답거나 화려한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힘겹고 두려운 표현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의 가난이겠습니까? 아무 욕심도, 아무런 욕망도 없는 마음이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욕심으로 얼룩진 마음을 가난한 마음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마음은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욕심이 솟구치고 욕망이 흔들더라도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본능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본능이 일으키는 충동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능이 자기를 지배하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이 절제입니다. 그런 절제를 지닌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행복의 조건을 갖춘 이가 많습니다. 객관적 기준으로 볼 때에는 행복해지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삽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절제를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능만을 따라간다면 그 누구도 진정한 행복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슬퍼하는 이도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 때문에 슬픔을 견디어 낼 때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도 그 원인이 주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참행복에 담긴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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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행복한지요? 행복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무슨 말을 해도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행복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지만 행복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남모르는 고통과 걱정 때문입니까? 아니면 재산이나 물질의 부족함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행복은 그러한 것과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고통과 산더미 같은 걱정 속에 있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민이나 걱정이 전혀 없는 것 같은데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행복은 고통이나 걱정거리가 있느냐 없느냐 그런 것은 분명 아닙니다.
행복은 결과입니다. 정성을 드린 만큼 되돌아오는 꽃이며 열매입니다. 식물은 꽃을 피우기 위해 일 년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나무 역시 열매를 맺기 위해 여름과 겨울을 견디어 냅니다.
복음 말씀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려 줍니다. 마음의 가난입니다. 슬픔과 억울함을 참아 내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며 평화를 위해 애쓰는 일입니다. 먼 곳이 아니라 함께 부딪치며 살고 있는 가족 안에서 먼저 실천하는 일입니다.
죽음을 두려워 마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 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언젠가 맞이할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사주’를 믿었습니다. 청년시절에 한 번 위험한 고비를 넘길 것이라는 것도 얼굴이 곱상한 여인과 결혼할 것이라는 것도 용케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주에 의하면 그한테는 삼십대에 재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믿고 어디 가서든 큰 소리를 쳤습니다. ‘두고봐라. 내 나이 마흔을 넘기 전에 너희와 앉은 자리가 달라질 것이다.’ 서른 고개를 막 넘었을 때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어떤 사주를 지닌 사람인데 남의 밑에 가서 일을 한단 말이야’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몇 년 후에는 친구가 동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웃으며 거절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그런 시시한 장사를 할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해외로 갈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돈복이 터지게 되어 있다구’하면서 밑이 터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그만 일찍 죽게 되었답니다.
그는 저승사자에게 항의했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한테는 재복이 예정돼 있었잖습니까?’그러자 저승사자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대꾸했습니다. ‘우리는 기회만을 제공할 뿐입니다. 직장 운 한번, 장사 운 한번, 무역 운 한번, 이 세 번의 기회를 다 주었었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할 기회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욕심을 부리거나 요행을 바란다면 그 기회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11,28).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편한 쉼이 아니라 자기 힘에 알맞으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이에게 그 쉼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30) 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은 하루의 생활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주님의 멍에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성 엘리지오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죽기를 원한다. 이는 죽음으로써 만이 하늘에 계신 그리운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의 기회들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편히 쉬게 하신다’고 약속하심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요, 희망입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성 안눈시아따). 그러므로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할 수 있음을 기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