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7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5-33)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나무랄 데 없는 순결한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살아가라고 당부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실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올 때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자기 소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사람도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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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라고 권고한다. 하느님께 순종하려면, 그분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기뻐하고,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써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 뒤를 따라오라고 하신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도 당신 제자가 될 수 없음을 천명하신다 (복음).
오늘의 묵상
제주도의 대정 성지에는 정난주 마리아의 묘소가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앞에는 정 마리아의 생애가 적혀 있는 묘비가 있습니다. 정 마리아는 신앙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에서 신앙의 증거자로서 모범을 보여 준 분입니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실학자 형제인 정약전, 약종, 약용의 조카로 일찍부터 입교하여 전교에 힘썼습니다.
그녀의 남편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해 박해의 실상을 밝힌 ‘황사영 백서’를 썼다가 발각되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 결과 정 마리아는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두 살 난 아들을 추자도에 남겨 둔 채 생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제주도에서 관노로 생활하면서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 내는 가운데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이웃을 감동시키고 교화시켰습니다. 그녀는 신앙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으며 37년 동안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으로 살다가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가족이나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난주 마리아의 삶은 그 자체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신앙의 증거였습니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삶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으며 사는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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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누구를 따른다는 말에는 ‘순종’(順從)과 ‘순명’(順命)이라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두 단어가 똑같은 뜻으로 쓰이긴 하지만, 자세히 따져 보면 약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순종은 ‘좇아서 따르는 것’이고, 순명은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은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측면이 강하고, 순명은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는 ‘순명’보다는 ‘순종’ 쪽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순종은 어린아이가 엄마나 아빠를 따르는 것과 같고, 순명은 종이 주인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명하기보다는 순종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요. 그렇다고 순명이 나쁜 의미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따라나서려면, 스스로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일어나야 합니다. 누구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자유로우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만이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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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황당한 말씀입니다. 마치 가족을 멀리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형제자매를 미워해야 제자가 될 수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는지요?
가족이 주는 십자가는 작아도 무겁습니다.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뜻대로 따라 주지 않으면 모든 것이 십자가로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면 가족은 ‘서로에게 십자가’가 됩니다. 다투고 멀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뜻과 네 뜻의 ‘공통분모’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공통분모를 ‘예수님의 뜻’에 일치시키려 애써야 합니다. 복음 말씀은 그렇게 하면서 살라는 당부입니다.
누구나 가족에게 기대를 겁니다. 자녀들에게서 희망을 찾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즐거움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아이들이 ‘삶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기대가 무너지고 희망이 꺾이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제는 그 안에 숨겨졌던 ‘주님의 뜻’을 찾아봐야 합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상황의 반전’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은총입니다.
집 나간 사람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서로의 의견은 다를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다르다’는 것이 서로 ‘틀리다’는 것으로 인식되어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부모와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집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그가 ‘가출’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집을 나간 행위이지만 어떤 뜻을 품고 구도의 길을 걷겠다고 나가면‘출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야말로 ‘출가’의 길입니다. 집착을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두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다른 여러 유대관계를 뒤로하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을 첫째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인맥에 매이게 되면 자유를 잃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주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이신 주님께서 다음 일을 안배하십니다.
가출한 사람은 온갖 것에 마음을 쓰며 궁리합니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은 지금 당장은 집을 버린 것 같지만 결코 집안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따르는데 어찌 사랑을 외면하고 자기 실속만 챙기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출가한 사람을 존경하고 우러러 봅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길을 가시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참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녀의 출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훌륭하다고 한 그 길에 자기 자녀는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의 길에 신중함이 있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단호한 결단과 응답이 요구됩니다. 내 자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식하기 바랍니다. 혹 남의 자녀가 출가하는 것은 환영하고 내 자녀의 출가는 막는 이가 있다면 그 집착을 버리기를 희망합니다. 출가하는 자녀가 많아지길 기도하며 그 길에 은총 충만하길 빕니다.
내일은 수능 시험일입니다. 시험은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준비된 이에게는 그동안의 수고와 땀의 결실을 기뻐할 수 있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탈란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25절..<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 중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군중심리 때문에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한 자격을 말씀하십니다.
26절..<"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구든지' 라는 말은 예외가 없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오면서', 즉 예수님에게 가는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가는 것은 시작일 뿐이고,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이 26절과 27절에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형제, 자매'는 일차적으로는 가족을 가리키지만 넓은 뜻으로는 세속적인 인간관계 전부, 그리고 세속적인 모든 일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자기 목숨'은 세속적인 목숨, 또 세속적인 삶을 뜻합니다. 앞의 9장 24절에도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자기 자신'이라고 번역했는데, '자기 목숨'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미워하다.' 라는 말의 성경 원문의 단어는 'miseo'(미쎄오)인데, 이 단어는 원래 '덜 사랑하다, 버리다.' 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 미워하라는 말은 우리말 그대로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탈, 단절, 초월 등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라는 말은 단순히 사도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족을 미워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겉으로만 보면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가르침이나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십계명과 반대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러나 이것은 가족을 정말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27절..<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이 구절의 말씀은 이미 앞의 9장 23절에서도 하신 말씀입니다.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사형집행 장소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제 십자가를 짊어지다.' 라는 말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뒤를 따르려는 사람은 순교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 그냥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으로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28절..<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탑'은 유대인들의 포도밭 감시대입니다. 때로는 숙소로도 사용되는 건물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망대'로 번역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원두막과 용도가 비슷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두막은 대강 지은 임시 구조물인데 비해 여기서 말하는 '탑'은 제대로 지어진 건축물입니다. 그래서 상당한 경비가 필요합니다. 그런 건축물을 지으려면 먼저 공사에 필요한 비용을 계산해 보게 될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라는 말은 지금 청중 중에 탑이 세워진 포도밭을 운영하는 이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처럼 실생활에서 볼 수 있는 생생한 가르침일 때가 많습니다.
29절-30절..(29)<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공사비용 계산을 잘못해서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할 수도 있고, 비용이 없는데도 무턱대고 시작했다가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시작만 하고 완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비웃음만 사게 되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탑을 세우기 전에 비용을 계산해 보고, 모자라면 차라리 단념하라.' 라고 해석한다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자신이 없다면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를 생각을 하지 마라, 라는 뜻이 됩니다.
즉 신자답게 살 자신이 없다면 아예 세례를 받지 마라, 라는 뜻이 되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뜻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구절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좁은 뜻으로는, 예수님의 사도들, 또는 사도가 되려는 사람들, 또는 사도직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성직자, 수도자)에게 주는 가르침으로서, 사도직을 수행하려면 그만큼 희생과 헌신을 감수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그럴 자신이 없다면 그 길로 들어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꼭 그 길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넓은 뜻으로는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되는 것인데,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탑을 세울 비용이 모자란다면 그 비용을 조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비용이 모자라서 공사를 중간에 그만두거나, 아니면 비용이 모자란다고 처음부터 단념하면 갖고 싶은 탑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례를 받고나서 중간에 냉담하거나 세례를 받기 전부터 신자로서 살 자신이 없어서 세례받기를 단념한 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건 둘 다 어리석은 일인데, 사실은 중간에 냉담자가 되는 것이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없도록 세례를 받기 전에 예비신자 기간을 충분히 두는 것입니다.)
31절..<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지금 청중 중에는 임금이 없기 때문에 '너희 가운데 누가' 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 구절은 28절과 뜻이 같습니다. 다른 임금과 전쟁을 하러 가면서 아무런 전략 전술도 없이 무작정 그냥 가는 임금은 없습니다. 상대방의 군대에 대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자기 군대의 상황을 파악하는일도 필수적인 일입니다. 여기서 '이만 명, 만 명'이라는 말 자체에는 중요한 뜻이 없고, 32절의 상황을 이야기하기 위해 설정된 숫자입니다. 즉 상대방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상대방이 더 강하기 때문에 싸우다가 멸망하든지, 아니면 항복하고 평화 협정을 맺든지 해야 할 상황입니다.
32절..<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맞설 수 없겠으면'이라는 말은 상대방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면, 이라는 뜻입니다. 이길 수 없다면 지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전쟁에서 지게 되면 죽거나 노예가 되었습니다. '아직 멀리 있을 때에' 라는 말은 '너무 늦기 전에' 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임금이 원하는 것은 목숨을 보전하는 것과 평화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다가오고 있는 적과 싸워서 이기거나, 아니면(이길 자신이 없으면) 항복하거나 해야 합니다.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한다.' 라는 말은 항복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항복을 한다면 적에게 조공을 바쳐야 합니다. 즉 자존심을 버려야 하고, 돈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야 목숨도 지키고 평화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이 구절도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성직자나 수도자의 경우 - 성직자, 또는 수도자로 살면서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가르침입니다.
2) 넓은 뜻의 신앙인의 경우 - 하느님께 모든 걸 바치고 믿고 의지하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평화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33절..<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이 구절은 26절-27절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예수님을 따르려면) 모든 희생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린다.' 라는 말은 전적인 희생과 헌신을 뜻합니다. 실제로 재산이나 가족이나 친구를 버리라는 것은 아니지만 세속적인 인간관계나 소유물들에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즉 초탈(超脫)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하고, 자기 삶의 첫 번째 자리에 무엇을 두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고, 예수님이 항상 우리 삶의 첫 번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 송영진 모세 신부(루카복음 주해)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