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6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루가 17,26-37)
I tell you,
on that night there will be two people in one bed;
one will be taken, the other left.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루카 17,26-37
말씀의 초대
‘사랑의 사도’라 불리는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고 충고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은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 곧 세상의 종말이 갑자기 닥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에 마음 두지 말고 오직 영원히 변하지 않을 구원을 위해 힘쓰라고 이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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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서의 저자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어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실 수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다는 말씀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 곧 세상의 종말이 갑자기 들이닥칠 것이라고 하신다. 하느님 나라와 더불어 사람의 아들이 내리시는 심판은 역사 속에서 실현된다. 사람의 아들에게 구원과 멸망이 달려 있다. 그날에 사람의 아들처럼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과 생애를 바친 사람들만이 구원받을 것이다 (복음).
오늘의 묵상
온갖 사치를 누리며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한 여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죽어서 천국에 도착하자 천사가 천상에 마련된 그녀의 집으로 안내했습니다. 그 여인은 아름다운 저택들을 지나치며 그중의 하나가 자기가 살 집이려니 생각했습니다. 큰길을 지나자 집들이 훨씬 작은 변두리가 나왔습니다. 바로 그 언저리에서 오두막보다 나을 것이 없는 한 집에 이르렀습니다.
여인을 안내하던 천사는 그녀에게 “저것이 네가 살 집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천사의 이 말을 들은 여인이 항의했습니다. “뭐라고요? 저 집이요? 저기서는 살 수 없어요.” 그러자 천사는 “안됐구나. 하지만 네가 세상에서 올려 보낸 자재들로는 저 집밖에 지을 수 없었단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뿌린 씨앗』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지난달에도 전했습니다만, 우리가 현세를 살면서 하늘의 곳간에 쌓아 놓은 것으로 죽어서 살 집을 짓는다는 의미의 내용입니다. 죽음을 앞둔 많은 사람들이 ‘걸걸걸…….’ 하며 후회한다고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죽기 전에 ‘좀 더 사랑할걸’, ‘좀 더 베풀걸’, ‘좀 더 참을걸’이라고 말한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하는 이 말들은 아직 건강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요 의미일 것입니다. 죽음을 잘 준비하려면 평소의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죽음의 문제는 곧 삶의 문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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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세상이 끝나는 날, 과연 인류는, 또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세상 종말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각 종교마다, 각 시대마다 많은 사람들이 종말에 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 왔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휩쓸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종말이라는 말 대신에 “사람의 아들의 날”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주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날에는 노아의 홍수 때처럼, 하늘의 불과 유황으로 소돔이 멸망했을 때와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홍수가 나고, 불과 유황에 모든 것이 타 버리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날이 사람들이 짐작도 못한 시간에 온다는 것을 뜻합니다.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이란 말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날은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께만 유보된 때입니다. 사람이 판단하고 결정하여 일어나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현상을 알 수 없고, 알 필요조차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종이며 자녀로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걸어야 할 길을 다 걷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 곧 은총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을 뵙지 못하고, 죽음의 길, 멸망의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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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때의 홍수’는 창세기 7장에 나옵니다. 불신으로 얼룩진 세상을 주님께서 홍수로 쓸어버리신 사건입니다. ‘소돔’에 내린 불과 유황 역시 주님의 ‘정화 작업’이었습니다. 죄악의 상징이었던 도시를 태워 버리고, 의인 ‘롯’만이 구원된다는 내용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능력’을 뛰어넘은 사건들이었습니다.
미구의 종말 역시 인간의 상상력 밖입니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무관하게 찾아옵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재산과 물질은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경우 종말은 개인의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저축한 돈이며 부동산이 무슨 소용이 있을는지요?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계산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은 호기심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삶의 결과일 뿐입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저세상’의 삶이 결정됩니다. ‘이승’의 인연과 체험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저세상을 살아갈 기초와 바탕이 됩니다. 성경은 이를 ‘심판’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종말의 준비는 이처럼 중요합니다. 낙엽 지는 계절에 ‘현실의 삶’을 한 번 더 돌아보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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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오늘 복음에서 듣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얼마나 비장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이 곧 올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씀에서도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종말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오는 것일까요? 몰래 와서 순간적으로 사람들을 덮치기만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종말은 마지막이면서 시작입니다. 이 세상의 끝이면서 저세상의 출발입니다. 한 해가 끝나면 새해가 시작되듯, 종말 역시 하나의 과정이지 그 자체로 막을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해마다 12월 31일은 묘한 느낌을 줍니다. 지나온 해는 아쉽지만 보내야 하고, 새해는 호기심으로 기다려지기 때문입니다. 종말은 그러한 12월 31일과 같은 것이 아닐는지요.
이 세상은 분명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저세상이 시작됩니다. 종말은 이를 구분 짓는 사건입니다. 이 세상과 저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저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이 세상 삶의 축적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지요? 그 모든 것은 저세상 삶의 바탕이 됩니다. 성경은 이를 심판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중요한 종말을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준비 없이 살아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그러기에 그처럼 비장한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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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사람들은 ‘웰빙’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삶 속에서의 웰빙은 물론 죽음도 잘 준비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깨어 기다리는 죽음과 종말은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가교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깨어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소돔의 시민들처럼 그날그날을 먹고 마시고 즐기면 될 것입니다. 영원한 삶을 바라는 우리는 방주를 준비한 노아처럼 늘 깨어 준비하여야 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 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고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이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신의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온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비춰보십시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는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2,12)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 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성 예로니모).
최 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