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벳은 1207년 헝가리에서 공주로 태어났다. 남부럽지 않게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참회와 고행의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엘리사벳은 남편이 전쟁으로 사망하자 프란치스코 재속 형제회에 가입하여 기도 생활과 자선 활동에 전념하였다. 1231년에 선종한 그녀는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또한 프란치스코 재속 형제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 같으냐?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who call out to him day and night?
Will he be slow to answer them?
I tell you, he will see to it
말씀의 초대
요한은, 선교사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로, 이교인들에게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선교사들을 돌보아 주는 것은 결국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이다(제1독서). 불의한 재판관도 계속해서 매달리는 과부를 모르는 척할 수 없었듯이,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청하는 이의 간청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하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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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3서의 저자는 형제들은 물론이고, 낯선 이들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 성실히 하라고 한다. 그러면 그들도 우리가 베푼 사랑에 관하여 증언할 것이고, 그들은 우리의 형제들이 되어 진리의 협력자로 거듭날 것이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로, 우리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청을 들어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데,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더더욱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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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불의한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움을 모르던 한 과부의 끈질긴 청원 앞에서는 손을 들고 맙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한 여인의 끈질긴 청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야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부하시는 기도는 긴 기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필요한 것은 겸손과 끈기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께 들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꾸준히 드리는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사람은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합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평소에는 하느님을 잊고 지내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 매달립니다. 곤경에 처할 때에 기도드리는 것도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칠 때에만 기도한다면 너무 이기적입니다. 궂은 날이건 좋은 날이건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늘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며 사는 복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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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억울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범인으로 지목되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하소연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의 죄상이 언론에 게재되어 사회의 여론마저 그의 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대법원에서도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내내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 뒤 몇십 년이 지난 어느 날, 법원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국가는 뒤늦게 유족에게 배상을 해 주었습니다. 사형수를 대신해 유가족이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한 덕분이었습니다. 1970-1980년대에 빨갱이로 내몰려 희생되었던 사람과 그 유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기도는 주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대화는 서로 진실을 이야기하면서, 상대방 이야기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제대로 잘 풀리지 않으면 소통이 되도록 끊임없이 믿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끊임없이 주님의 은총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고 믿을 때만, 우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꼭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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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마음을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은 경건한 느낌을 줍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이러한데, 주님께서도 어여쁘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니, 억지 기도나 ‘후다닥 바치는 기도’는 가능한 삼가야 합니다. 한두 번 청하고 ‘그만두는’ 기도 역시 피해야 합니다. 기도를 ‘끊임없이’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즐겁다면 ‘쉽게 자주’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의 항구함은 분명 즐거움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쁨의 기도’를 체험하게 해 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기도는 은총의 이끄심이기 때문입니다.
‘토머스 머튼’은 트라피스트 수도회 소속 사제로 영성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종교에 대해 냉소적이었습니다. 그를 바꾼 것은 28세 때 체험한 수도원의 침묵입니다. 어느 수도회의 단기 교육에 참가했던 것이지요. 이후 그는 삶의 자세가 바뀌었고, 죽을 때까지 침묵을 사랑했습니다.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애썼습니다.
기도가 기쁨이 되려면 ‘침묵’을 연습해야 합니다. 기도가 힘들다는 ‘이유’를 말하지 않는 일입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일입니다. 행동하는 기도일 때, 은총은 ‘마음의 눈’을 열어 줍니다. 기도 생활의 문제점은 늘 자신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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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보고 굿을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한 장에 천만 원이 넘는 부적도 있다고 하니 놀랄 일입니다. 그까짓 종이 한 장이 무슨 힘이 있을는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매달립니다. ‘참믿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힘과 기운을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거액을 투자합니다. 그렇게 정성을 쏟으면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고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지요.
과거를 족집게처럼 알아맞히는 점쟁이가 있다면서 놀라워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집어내는 과거는 모두가 ‘아픈 과거’입니다.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의 과거를 더 잘 알아냅니다. 그런 뒤 그들이 내리는 처방은 대개 비슷합니다. ‘곧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머지않아 큰돈이 생길 것이다. 좋은 인연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서 조건을 다는 것이지요.
지난 일을 점쟁이에게 물어볼 이유가 없습니다. 과거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앞날은 언제나 ‘본인의 몫’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평한 주사위입니다. 그러니 늘 기도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힘과 기운을 청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나와 함께 있으면 어떤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중단 없는 기도만이 ‘하느님의 보호’를 체험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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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한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왔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가르침은 누누이 들어 온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기도하면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즐겁고 행복하다면 자연스레 바치게 됩니다. 기도할수록 피곤함이 사라진다면 누구나 매 순간 기도할 겁니다.
기도의 항구함이 부족한 것은 이렇듯 기도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진정 즐거운 것일까요? 기쁨을 줄까요? 그것은 경험의 문제입니다. 그러한 경험을 한 번만 해 보더라도 기도의 기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시도해 보십시오.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기도해 보십시오. 아무 생각도, 아무 상상도 하지 말고 십자가만 바라보십시오. 시간을 내어 그렇게 한다면, 기도를 이끌어 주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는 이끄심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힘이 이끌어 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먼저 조용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아무리 할 일이 많고 감정이 복잡하더라도 그것을 제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재판관은 사람을 우습게 보는 거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도 과부의 청원에는 마음을 움직입니다. 주님께서는 거만하지 않으십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청원을 들어주실 분이십니다.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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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이다.”라는 독일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노라면 한때 잘살 때가 있고, 공부도 한때 잘할 수가 있고, 한때 인기도 누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까지 잘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꾸준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데에도 역시 꾸준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재판관에게 꾸준하게 졸라 대는 과부처럼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한 그루 느티나무가 되기를>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때로 기도하기 힘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악이 선을 능가하는 듯 여겨질 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아갈 길이 없다고 느껴질 때,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이 차갑게 식어버릴 때...
그래서 과연 하느님이 계시긴 하는 걸까? 계신다 하더라도 과연 내 간절한 부르짖음, 내 이 끝도 없는 기도를 들어주시기나 하는 걸까? 내 이 혼신을 다한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로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도 많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적당하게가 아니라, 들어주시면 좋고 아니면 말고가 아니라, 더 큰 열정을 지니고, 혼신의 힘을 다해, 지극정성으로,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열심히 기도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 공정한 재판이라고는 기대하기 힘든 날라리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한 과부가 재판관을 찾아와 자신의 억울함을 털어놓습니다.
처음에는 별것도 아닌 일 같아 짜증도 나고 해서 그냥 돌려보내곤 했겠지요. 그러나 세상에 찰거머리도 그런 찰거머리가 없었습니다. 귀찮다고, 짜증난다고, 그러니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그렇게 화를 내도 절대로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매일같이 찾아와 계속 졸라댔습니다. 재판관 입장에서 다른 것보다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스트레스가 하늘을 찌르고 귀찮고 짜증나 죽을 지경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과부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는데 마다 따라다니며 졸라대니 사생활도 없고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짜증나고 귀찮은 나머지 재판관은 어쩔 수 없이 그 과부의 억울함을 들어주고,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겠냐는 예수님의 논리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미래와 현재를 영원하신 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거듭되는 실패와 좌절, 절망과 괴로움 속에서도 항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큰 희망을 안고 하느님 집의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나는 과연 무엇을 집요하리만치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봅니다.
작고 이기적인 바람, 터무니없고 허황된 소원, 지상에서 결코 이뤄질 수 없는 황당한 희망을 청해서는 결코 안 될 일입니다.
상처 입은 이웃들을 넉넉히 감싸 안을 큰마음을 청할 일입니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삶임에도 불구하고 그 삶마저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큰 영혼을 청할 일입니다. 이 세상이 결코 다가 아니기에, 이 세상 너머에 더 큰 세상이 있음을 믿기에 이 세상에 몸숨 걸지 않게 되기를 청할 일입니다. 더 원대한 꿈, 하느님 안에 더 큰 일취월장을 청할 일입니다.
내안의 가능성을 120% 발휘할 수 있기를 청할 일입니다. 하느님 안에 끝도 없이 성장하기를, 그래서 하느님 계신 곳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되기를, 다시 말해서 성인(聖人)이 되기를 청할 일입니다.
자라고 자라서, 성장시키고 성장시켜서 한 그루 큰 느티나무가 되기를 청할 일입니다. 그래서 힘겨운 사람, 상처 입은 사람, 죄인들이 내 그늘에서 쉴 수 있게 되기를 청할 일입니다.

떼를 쓰면
반영억라파엘신부
어린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 떼를 써서 이룬 것에 죄송함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서 “30센티미터 자”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자를 가져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자를 사달라고 했지만 자를 살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다음에 구입해 준다고 달랬지만 저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옷을 재단할 때 쓰는 꼭 필요한 긴 ‘나무자’를 30센티에 맞춰 자르고 말았습니다. 그날 구지 가져가지 않아도 될 것인데 저의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어머니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떼를 쓰는 아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기위해 당신의 것을 포기하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입니다.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어버이의 마음이 우리를 기억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18,1)는 뜻으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재판관이 한과부의 끈질긴 청을 못 이겨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자신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 두고 싶을 때에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다가 “얼마나 더” 청해야 하는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야 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끈기 있는 기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끈기 있는 기도가 ‘꼭 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되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한 두 번이 아니라 천번 만번 거절을 당해도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열릴 때까지 두드리지 않으니까 문이 안 열리는 것입니다.
문 안에는 반드시 그 문을 열어줄 하느님의 손이 있습니다. 모든 기도는, 그냥 한번 건성으로 해보는 기도가 아니라면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조금도 의심을 품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의심을 품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흔들리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예 주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일편단심으로 하느님을 찾아야겠습니다. 시편에도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라고 적고 있습니다.
부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청하면 그 청을 반드시 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떼를 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제1독서 3요한 5-8
복음 루카 18,1-8
이명언마태오신부
어렸을 때,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그때에 누군가가 “노래 한 번 해볼래?”하면 자신 있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춤 춰봐~~”라고 말하면 신나게 개다리 춤을 췄습니다. 그림 그려보라고 하면 마치 세상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것처럼 자신 있게 그렸습니다.
실제로 유치원을 방문했던 어떤 사람이 노래 부를 줄 아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전원 즉각 속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춤을 출 줄 아는 사람, 그림 그릴 줄 아는 사람을 물었을 때에도 유치원생들은 똑같이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이 똑같은 질문을 대학생에게 했을 때 어떻게 되었을까요? 손을 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면서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할 수 없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즉,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줄어드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감탄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항상 감탄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를 보고서도 “와~ 개미다!!”라며 감탄하기 때문에 사소한 것도 소홀히 하지 않지요. 그래서 모든 면에서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큰 것을 보고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못합니다. 실제로 강의를 나가서 보면 어떤 이야기를 해도 무표정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피식’ 웃을 뿐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도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보니, 무슨 일에 적극적으로 어떻게 임하겠습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마음이며, 그래서 감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은 매사에 적극적이며, 자그마한 일에도 감탄하며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을 어른이 되면서 점점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의 시작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말씀을 해주시지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과부의 끈질긴 청을 결국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의한 재판관도 들어주는 끊임없는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받아들이시겠느냐는 것이지요.
만약 그녀에게 올바른 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매달릴 수가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매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거역하는 불의와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악함을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는 의미가 이곳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보십시오. 과연 우리들은 끊임없는 기도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지요? 보통의 어른들처럼 점점 약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너무나도 감동적인 글이라 그대로 옮겨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인생을 멜로드라마처럼 살아도 괜찮은지.
하느님은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키가 작아도 괜찮은지 물었습니다.
하느님은 물론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또 물었습니다.
매니큐어를 발라도 괜찮은지, 혹시 그러면 안 되는 건지.
그분은 대답하셨습니다.
아가야(그분은 가끔 나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네 맘대로 하려무나.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고 저는 또 물었습니다.
편지를 쓸 때 문단 나누기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지.
내 귀여운 강아지야(대체 그분이 이런 말을 어디서 배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대답은 언제나 똑같단다.
괜찮다, 괜찮아, 괜찮고말고...
하느님께서는 괜찮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안 괜찮다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