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흘리시는 예수님 (루카19,41-44)

2012. 11. 22. 오전 8:33:17

글자

2012년 11월 22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체칠리아 성녀는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 성녀의 생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260년 무렵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며, 박해 시대 내내 성녀에 대한 신심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체칠리아’라는 말은 ‘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으로,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으로 순교한 성녀의 삶을 그대로 보여 준다. 흔히 비올라나 작은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체칠리아 성녀는 음악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루가 19,41-44)
 

 

As Jesus drew near Jerusalem,
he saw the city and wept over it, saying,
“If this day you only knew
what makes for peace?
but now it is hidden from your eyes.

 

 

 

 

 

말씀의 초대
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이외에 그 누구도 그 속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를 모른다.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역사 속의 온갖 고통의 의미를 드러내 보여 주실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시어 그 도성에 장차 일어날 일을 내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예루살렘 도성의 파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복음).

☆☆☆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일곱 번이나 봉인된 두루마리를 뜯어 볼 수 있는 분은 어린양 한 분뿐이시라고 증언한다. 어린양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분만이 봉인을 뜯고 나라를 다스리기에 합당한 분이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도성의 파괴를 예고하신다. 사람들이 참평화를 가져다주시는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복음).

☆☆☆

 

오늘의 묵상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또는 ‘평화의 근원지’라는 뜻을 지닌 도성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예루살렘을 통일 왕국의 수도로 삼아 계약의 궤를 그곳에 옮겨 왔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은 뒤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때를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때가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시고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때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안타까운 나머지 눈물을 흘리십니다. 실제로 기원후 70년,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성벽 일부만 남기고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자식이 파멸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픕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심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멸망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은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의 눈물을 닦아 드리는 길입니다.

☆☆☆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그 화려한 도성을 보고 슬피 우십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참평화의 의미, 그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분이 누구이신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참평화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을 보시면 어떠하시겠습니까? 아마 똑같이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서울이 진정한 평화와 그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서울은 지금 평화와 역행하는 길을 가면서 온갖 착취와 사기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심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멸망했습니다. 그 원인은 그들의 독선(독재)과 종교적, 문화적 우월주의, 경제 제일주의 등에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계획을 자신들의 뜻에 끌어들여 입맛에 맞추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위험하고 얼토당토않은 발상입니까? 참평화는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 실천할 때만 가능합니다. 주님만이 참평화이시고, 그분 안에 머무를 때만 사랑과 정의와 행복이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

☆☆☆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며 슬픔에 잠기십니다. 성전의 파괴를 가슴 아파하십니다. 파멸의 원인은 ‘독선’ 때문입니다. 유다인만이 구원받고, 율법만 지키면 어떤 간섭도 없다는 ‘자만심’ 때문입니다. 고칠 수 있는 길은 시련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은 불탔고, 성전은 로마인들의 손에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입니다. ‘선택된 민족’일지라도 선민답게 살지 않으면 당연히 퇴색합니다. 위대한 민족이라는 무늬만 믿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기에, 이스라엘은 로마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신앙은 옳고 남의 믿음은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자신만 ‘구원된다’는 생각만큼 옹졸한 생각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민의 주님이시지, ‘어떤 특정인’의 주님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유다인들은 시련을 겪었던 것입니다.
연약하게 교육받은 어린이는 집에서는 사랑받지만, 밖에서는 사랑받기 힘듭니다. 엄하게 교육받은 어린이는 예의를 알고 ‘남을 알기에’ 밖에서도 사랑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우월감에 점점 약해지는 이스라엘에게 충격 요법을 쓰신 것입니다. 성전의 멸망이라는 ‘히든카드’를 꺼내신 것입니다.

 

☆☆☆

기원후66년 로마 총독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큰돈을 강탈합니다. 유다인들이 반발하자 총독은 군인들을 성전 안에 배치합니다. 유다의 저항 세력들은 분노로 뭉쳐 성전으로 쳐들어가 주둔해 있던 로마 군인들을 몰아냅니다. 그러고는 황제에게 바쳐진 제단을 없애고, 이를 말리던 대제사장을 살해합니다. 제1차 유다 독립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소식을 접한 로마의 네로 황제는 진압군을 파견합니다. 그들은 먼저 북쪽의 갈릴래아부터 공격합니다. 그래서67년 이스라엘 북부 지방은 로마 군인들에게 장악되었습니다. 69년에는 진압군 사령관 티투스(Titus)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합니다. 공격이 개시된 지5개월 만에 성벽은 무너졌고, 로마 군대는 밀물처럼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
유다인의 저항 세력은 항복을 거부하고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가 마지막 저항을 합니다. 로마 군인들이 성전에 횃불을 던지기 시작하자 성전은 삽시간에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화려한 성전은 불타오르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기원후70년의 일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이러한 멸망을 내다보시며 슬픔에 잠기십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보속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사랑하는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고색창연한 아름다운 도시 예루살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랑 예루살렘, 온갖 지혜와 은총의 보고인 예루살렘, 그 사랑스런 도시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환호성을 터트려야 마땅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왜 우셨을까요?
원인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겉은 호화찬란하고 그럴 듯 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부패와 타락으로 곪아 터져가는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돌아서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끝끝내 우상숭배와 배신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자식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세상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많이 빗나간 자녀, 맛이 간 자녀, 생명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접어드는 자녀가 있다면 부모 입장에서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정말 그 길이 아닌데,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가고 있다면 부모 입장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처음에는 불러 앉혀놓고 차근차근 설득도 시도해 볼 것입니다. 그게 안 먹혀들면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언성도 높일 것입니다. 완력도 사용할 것입니다. 갖은 수단을 총동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수단들이 전혀 먹혀들지 않을 때, 어떤 부모는 그 자녀 앞에 눈물로 호소할 것입니다. 제발 돌아오라고, 제발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부모의 마음으로 당신의 아리따운 딸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 흘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과 온 세상이 지금 자신들의 목전에 들이닥친 이 시간의 중차대한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가슴 아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육화강생하시고 그들 사이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지금 바로 이 시간이 구원의 때이며 은총의 시기라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함을 슬퍼하십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메시아께서 카이사르처럼 자신들에게 세속적인 힘과 권세를 부여해줄 것을 바랐었지 실제적인 메시아 본질적인 메시아의 도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세상의 왕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인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정작 참 메시아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고 가난한 얼굴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돌아서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 아무리 눈물로 호소해도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 사람들, 머지않아 영원할 것 같던 성채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며 더 이상 도성 안에서는 찬미가가 울려 퍼지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비탄과 통곡소리, 칼부림이 난무할 것임을 예견하신 예수님이셨기에 그리도 슬피 우셨던 것입니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끝까지 애타는 하느님의 마음을 저버리는 예루살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하기는커녕 언제나 반대하고 거부하는 예루살렘의 최후를 내다보시던 예수님이셨기에 그리도 슬피 우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울고 계십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으로 인해, 우리의 절벽같이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 슬피 우십니다.

 

 

 눈물을 닦아드리자

반영억라파엘신부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비시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청한다고 하지만 그분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고 계시며 그 범주에서 벗어날 것을 염려해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시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지 않고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아프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들, 평화를 갈망해야 할 사람들이 그 본연의 것에는 관심이 없고,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평화의 길을 걸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완고한 마음은 자신의 삶을 돌이킬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의 길을 자초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우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소리에 우십니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자니 눈물이 납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주님을 생각할 틈이 없으니 참된 평화는 영영 멀기만 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마음의 무질서를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고요를 누립니다.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구애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주님의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 평화를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사사건건 마음의 혼돈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텐데 . 주님께 대한 믿음은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하고 또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 구원을 갈망하며 구원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눈물을 씻게 됩니다. 참으로 올바르게 주님을 믿는 이에게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평화를 갈망합니다. 재물이나 명예, 건강, 외모, 자식 등이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전력투구하며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건 것들은 영원하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합니다. 결국 그것이 참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그것을 믿는 이는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주님의 눈물을 씻겨드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해드리고 웃음꽃이 피게 할 수 있는 새 삶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기를 희망합니다. 세실리아 축일을 맞이하여 축하와 사랑을 드립니다. 행복하십시오. 사랑합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