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루가 21,1-4)
I tell you truly,
this poor widow put in more than all the rest;
for those others have all made offerings
from their surplus wealth,
but she, from her poverty,
has offered her whole livelihood.”
말씀의 초대
요한 묵시록은 시온 산 위에 서 계시는 어린양과 그분을 따르는 십사만 사천 명의 사람들을 소개한다. 어린양은 그리스도이시며, 십사만 사천 명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고난과 박해를 참고 이겨 낸 이들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는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믿음으로 바친 예물을 더 좋아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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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시온 산 위에 서 계시는 어린양과 그분을 따르는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의 사람들을 소개한다.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헌금을 봉헌하는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다. 렙톤은 그리스 화폐 단위 가운데 가장 낮은 단위다. 보기에도 하찮은 금액을 봉헌하는 과부를 주님께서는 눈여겨보시며 그녀의 희생과 정성을 칭찬하신다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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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에서 과부는 고아나 떠돌이와 함께 공동체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의 대표로 자주 언급됩니다. 오늘 복음의 바로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이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도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는 위선자들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사실 율법 학자들이 가난한 과부들의 재산을 관리해 준다는 명목으로 과부들을 속여 먹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장면을 유심히 보셨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전부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과부의 헌금은 비록 적은 액수였지만 하느님께는 부유한 그 어떤 사람의 헌금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녀가 가진 것을 모두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신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모두 넣고 난 뒤의 손은 빈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빈손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하느님께 바친 손이었습니다. 비록 손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친 그 손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손입니다. 그녀의 가난한 손에는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가장 풍요로운 부(富)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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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개신교의 십일조(1/10) 헌금에 대해서 가끔씩 빈정거릴 때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그들이 그렇게 헌금하는 것을 못마땅해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십일조 헌금은 구약 시대 때부터 내려온 헌금 방식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신앙심을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 교회법을 지키는 것을 못마땅해하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십일조를 봉헌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봉헌하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교리를 좀 안다는 신자는 “교무금 1/30, 헌금 1/30, 불우 이웃 돕기 성금 1/30”을 봉헌한다고 대답합니다. 합치면 십일조라는 이야기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실제로는 십일조가 되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수입의 십일조는 굉장히 큰 액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 큰 액수를 개신교 신자들은 두말하지 않고 봉헌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특별 헌금까지 낸다고 하니, 천주교 신자는 적어도 헌금에 관해서는 그들의 믿음을 따라갈 수 없을 듯합니다.
주님께서는 헌금을 봉헌하는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과부는 일용할 양식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그 양식 이외의 것은 모두 봉헌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주일 헌금은 차치하고라도, 교무금 책정을 가지고 다투기도 하고, 더러는 성당마저 등지는 경우를 봅니다. 이럴 때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봉헌은 정직하게, 그리고 정성스럽게 해야 합니다. 설마 주님께 봉헌하는 것은 정직하고 정성스럽지 못하면서, 얻어 누리려는 은총은 누구보다도 더 크게 욕심을 내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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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은 정성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헌금함 앞에 섰는지요?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바치는 헌금이어야 합니다. 복음의 가르침은 여기에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을 봉헌합니다.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바칩니다. 하루를 ‘기쁨으로’ 희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정성에 감격해하십니다.
렙톤은 그리스 화폐 가운데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두 닢’의 헌금이라면 주목받을 액수가 아닙니다. 하지만 가난한 여인의 ‘마음’을 읽으셨기에 주님께서는 칭찬하십니다. 그녀의 소박한 믿음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물질이 부족한 것만 가난이 아닙니다. 시간이 부족한 것도 가난이고, 마음이 바쁜 것도 가난입니다. 일상에 떠밀려 허겁지겁 살고 있다면, 물질이 넘쳐도 부자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바치는 시간도 주일 미사가 거의 전부입니다. 그 시간에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요? 한 주간 살아온 삶을 바쳐야 합니다.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다시’ 받아들여야 합니다. 봉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분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헌금을 보고 계십니다. 한 주간의 ‘아픔’도 헌금 속에 함께 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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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어디를 보고 계셨을까요? 얼굴 표정이나 손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몸 전체를 다 보고 계셨을 겁니다. 헌금은 정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정성을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정성은 몸가짐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물건 사고 돈 내듯 헌금한 것은 아니었는지, 신자라는 의무감 때문에 헌금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봅시다.
헌금은 당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좋아서 하는 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성이 됩니다. 액수가 많고 적음은 별문제입니다. 정성이 들어 있어야 참된 헌금이 됩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성으로 헌금하는 여인을 보셨습니다. 액수는 적었지만 내용이 그분을 감동시킨 것이지요. 여인은 자신의 생활비를 바쳤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행동입니다. 자신의 생활비를 바치다니, 그럼 무얼 먹고 어떻게 산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여인은 바쳤습니다.
물론 가난한 여인이었기에 생활비는 얼마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생활비를 바친다는 것은 자신의 전부를 바친 것이 됩니다. 먹지 않아도 좋다는 희생을 전제로 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정성을 그렇게 희생으로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래도 속마음은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자!’고 말하면서도 자꾸만 비교를 하게 됩니다. 본당 사목을 하면서도 전임본당과 견주게 됩니다. 추수감사미사를 봉헌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본당규모가 큰 것에 비하면 감사예물과 곡식이 적게 봉헌되었다고 생각하며 서운해 하였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준비시키지 못하고, 믿음을 성장시켜드리지 못했으면서도 그것은 잊고 있었습니다. 예물에 매이지 않고 믿음에 마음의 중심을 둘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어린시절을 생각해 봅니다. 명절이 되면 기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삼촌이나 누나로부터 용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기쁨중의 하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액수가 많고 적음에 관계하지 않고 그저 받는 것이 좋았습니다. 때로는 돌아 서서 액수를 헤아리며 ‘에게, 요것밖에 안돼!’하며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받을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인데 속마음은 욕심이 가득했습니다. 받는 것도 익숙해지면 결국 감사함도 잊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빈곤한 과부를 칭찬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활비 전체를 예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부자들은 풍족한 데서 일부만을 바쳤습니다. 부자가 바친 예물은 가난한 이의 것에 비하면 훨씬 많은 금액이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먼 훗날 잘 되면 크게 돕겠다는 마음은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돈의 액수보다 마음을 헤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정성보다 돈의 액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의 잣대로 판단합니다. 제 모습이 꼭 그랬습니다.
오래 전일입니다. 수녀원과 교육관 건축 기금을 모으면서 나름대로 모금액수를 정하고 아무개는 얼마, 아무개는 이 정도는 해 주겠지! 하며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힘이 들었습니다. 정성을 보고, 마음을 보아야 하는데 돈의 액수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도 별수 없었습니다. 물질에 약한 저를 보며 다짐했습니다. 돈 이야기를 많이 하지 말자! 물질의 봉헌을 아까워서 마지못해 한다면 아무리 많은 액수를 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믿음이 크면 모두가 주님의 것이다. 믿음을 키우는 것에 마음을 두자. 믿음의 성장에….. 그리고는 비로소 자유로워졌습니다.
속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물질보다 주님을 선택하는 지혜로 모든 것을 차지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도둑의 뉘우침
한 성직자가
물건을 훔쳐 나가는 도둑을 붙잡았습니다.
그에게
“도둑질을 한다는 것은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것입니다.
순간의 잘못으로 큰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둑은 깊이 반성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네 맞아요, 물건을 훔쳐 나오면서 발자국을 닦지 않았어요.
바로 가서 닦아야 하겠어요.”

하느님의 표시를 받은 그리스도인
-경규봉 신부-
요한은 환상 중에 어린양이 시온 산 위에 서 있는 것을 본다. 여기서 시온 산은 지상에서 이루어질 메시아 왕국을 뜻한다. 어린양과 함께 있는 십사만 사천 명은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완성된 교회를 뜻한다(로마 2,28-29; 9,6-7). 이들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13,16)과는 달리 이마에 아버지와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이 씌어져 있어서 이들이 하느님께 속한 백성임을 보여준다.
‘큰 물소리’는 크고 우렁찬 소리를, ‘요란한 천둥소리’는 위엄과 승리를, ‘거문고 소리’는 아름다운 선포와 조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늘의 찬양은 크고 위엄차고 듣기에 아름다운 소리일 뿐만 아니라 고난을 이기고 승리한 성도들을 환영하는 천사들의 노래이다. 이는 지상에서의 승리와 하늘나라에서의 기쁨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새로운 노래를 부르는데, 이 노래는 죄 가운데 있는 옛 사람들은 배울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마음과 생명이 새로워진 새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2,17; 로마 8,1-6; 12,2). 새 노래를 배울 수 있는 십사만 사천 명은 그리스도의 피로서 하느님께 구원된 사람들로서 하느님의 도장을 받고(7,4-8)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든 사람들이다(7,14).
이들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순교(殉敎)한 이들로서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짐으로써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고 하느님께 속하게 되었다(출애 23,19; 야고 1,18). 이들은 거짓말을 모르고 흠도 없는 깨끗하고 정결한 이들로서 지상에 사는 동안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순결을 간직한 이들이다(히브 9,14;1베드 1,19).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요한 3,5)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도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친히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중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셨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깊이 느꼈던 것이다. 세례는 그처럼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소중한 의식이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9-20)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는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가 씻겨지고 다시 태어나게 되어 하느님의 유산을 물려받을 자격을 얻게 된다. 때문에 교회는 일찍부터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풀었고, 죽을 위험에 처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세례를 베풀도록 가르쳤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환상 중에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과 함께 누리는 영광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마에 주님의 표시가 각인되어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천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지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이 박해와 고난을 이겨내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표시를 받은 하느님의 사람임을 기억하자.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굳게 믿고 감사드리자.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며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는 고귀한 하느님의 백성임을 감사드리자.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영광과 기쁨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라 충실히 살아가자..............◆
<자기가 무슨 성인군자라고>
어린 시절 "친척은 자주 만나야 된다."는 어머니의 압력에 못 이겨 제일 만만한 사촌 형님 집에 자주 놀러가곤 했습니다. 당시 사촌형님 내외는 대부분의 서민들이 그랬듯이 겨우겨우 생계를 꾸려갔었지만 언제나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왠만 해서는 서로 언성을 높이지 않는 화목한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둘이 큰 목소리로 언쟁을 벌였는데, 바로 외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툼한 외투 하나로 겨울을 거의 나다시피 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사촌 형님의 "불쌍한 사람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약점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당신 외투는 어쩌고 그냥 셔츠차림으로 들어와요?" 우물쭈물하던 사촌형님은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아 외투? 공장에 두고 왔나봐." 즉시 상황을 파악한 형수는 매몰차게 몰아 부칩니다. "지난번에도 그래놓고 또 그러내. 자기가 무슨 성인군자라고. 그게 얼마짜리 인줄 알아요? 도대체 누굴 줬어요?" 계속 다그치는 바람에 겨우겨우 사실을 말합니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글쎄 적선하는 사람이 이 추운 날 거의 내복차림으로 앉아서 떨고 있잖아? 그래서 빌려줬지."
벌써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사촌형님의 따뜻한 마음은 아직도 제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걸인들을 끝내 물리치지 못하고 집까지 데려와서 씻기고 밥 먹여서 보내던 기억들도 생생합니다.
단 한 벌뿐인 자신의 겨울 외투를 형수로부터 혼날 줄 알면서도 서슴없이 벗어 걸인의 어깨에 걸쳐준 사촌형님의 모습에서 가난한 과부의 체취를 느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극구 칭찬하십니다. 빳빳한 십만 원 짜리 수표를 헌금 궤에 넣은 부자들에게는 한마디 칭찬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동전 단 두 개를 헌금 궤에 넣은 과부를 극구 칭찬하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과부의 헌금은 비록 그 액수는 적었지만 전적인 봉헌, 순수한 봉헌, 사심 없는 봉헌, 목숨까지 건 봉헌이었기에 극구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이리저리 다 빼돌리고 바치는 봉헌, 우려먹을 때까지 다 우려먹고 빈껍대기만 바치는 부자들의 봉헌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의 여가 활동을 위한 시간은 철저히 지키면서도 하느님 앞에 잠시 머무르기는 왜 그렇게 힘든지요? 우리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끝없이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만 하느님을 위한 투자에는 왜 그리도 인색한지요?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