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일 대림 제1주간 월요일
(백)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06년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하비에르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였는데, 그곳에서 만난 이냐시오 성인의 영향으로 수도 서원을 하였다. 1537년에 사제품을 받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예수회 첫 번째 회원이 되어 자선 사업에 헌신하였다. 그 뒤 그는 인도와 일본에서 열정적인 선교로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이끌었다. 중국 선교를 위해 중국으로 향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52년 12월 중국이 바라보이는 산첸 섬에서 선종하였다. 1662년에 시성된 그는 흔히 바오로 사도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다.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먼 거리를 여행하며 선교에 헌신하였기 때문이다.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아기 예수의 데레사(소화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코 16,15-20)
말씀의 초대
레위 지파는 전례 거행을 위하여 선택되었다. 그들은 주님의 계약 궤를 나르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세금이나 병역에서 면제된다(제1독서). 복음 선포는 세상의 어떤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사명은 거저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사도가 하는 모든 일은 복음을 위한 것이요, 복음에 동참하는 것이다(제2독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신 뒤 승천하시어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신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과 함께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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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저는 해외에서 선교하고 있는 동창 신부들을 위하여 늘 기도합니다. 온갖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선교하는 그들을 생각하면,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가는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고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고생하는 동창 신부들이 고맙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제가 그들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기도뿐입니다.
‘소화 데레사’로 잘 알려진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선교사로 파견되고자 하는 소망이 불타올랐으나 육신의 병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위대한 선교사’로 존경받고 있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전구를 청하는 9일 기도를 바치기도 했습니다. 선교사의 꿈을 이루지 못한 그녀는 영적인 선교, 곧 선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일상의 모든 것을 통하여 선교사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녀는 봉쇄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 모든 것을, 곧 해야 하는 일과 포기해야 하는 것, 그리고 참아 견뎌야 하는 것을 통하여 선교사들에게 영적인 지원을 한 것입니다.
오늘은 선교의 수호자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대축일입니다. 그는 인도와 일본에서 수많은 역경을 이겨 내며 선교 활동을 펼친 뒤 중국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먼 나라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지는 못하더라도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처럼,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가 주변에 퍼져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면 그것 또한 선교의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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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자존심, 자만심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 자존감이 높다고 하면 긍정적으로 들리지만, 자존심이나 자만심이 강하다고 하면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자존감이 높다는 것은 속이 잘 익은 과일처럼 성숙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들은 대인 관계에서도 스스로 존중감이 있어서 내면 깊숙이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방어하려고 화를 내거나 변명하지도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스스로 내면에 가진 것이 별로 없다는 열등감으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려움을 방어하고자 내세우는 것이 자존심입니다. 그래서 자존심이 센 사람들은 열등감을 감추고 자신을 지키려고 상대를 먼저 공격을 하거나, 고집을 부려서 자신을 보호합니다.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받고, 분노하고, 사람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까닭은 자존감이 낮아서 그 방어 기재로 자존심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자만심 역시 자존심처럼 자존감이 낮은 데서 비롯합니다. 이런 사람들도 스스로 내면에 별로 든 것이 없다는 열등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빈 곳을 엉뚱한 것으로 채워 넣습니다. 곧 자신이 가진 조그만 지식이나 재물이나 재능을 부풀려서 내면의 빈 곳을 채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드러내 보이고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 하며, 공명심과 허영심이 많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을 가진 것이나 능력으로 평가합니다. 자기보다 잘난 사람과는 가까이 사귀고 싶어 안달하고,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면 무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백인대장이 보여 준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겸손은 자존감이 낮은 자기 비하와는 다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의 부족함, 죄스러움, 약함, 그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느님께서 잘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약함과 부족함을 오히려 더 사랑하신다는 믿음에서 겸손함이 나옵니다. 우리의 높은 자존감은 겸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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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信〕은 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성장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와 같다면, 하물며 주님과 맺는 관계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서로 관계에 문제가 있다면, 믿음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사람들과 맺는 관계가 진실하지 못하다면, 주님과 맺는 관계도 진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과 관계가 진실하다면,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도 떳떳할 것이 분명합니다.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파견하신 아드님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이제 그는 주님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이미 들어와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께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백인대장의 태도를 보시고,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하시면서 칭찬해 주십니다. 그 백인대장은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대림 시기의 첫 번째 기다림은 오실 분이 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심을 느끼는 데 있습니다. 이미 나의 생애 한복판에 들어와 계신 주님을 느낀다면 곧 그분을 믿을 수 있고, 믿는다면 알아뵐 수 있으며, 알아뵙는다면 그분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맺는 관계에서는 백인대장처럼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바람 같은 분>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얼마 전 한 국제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주최 측에서는 각국에서 온 손님들을 그야말로 극진히 챙겼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남국 특유의 향기 가득한 산해진미가 매끼니 마다 풍성하게 차려졌습니다.
그러나 맛이 너무도 밋밋했고, 그 특유의 향료 냄새 때문에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주로 맛이 검증된 빵이나 음료, 야채, 과일 쪽으로만 손이 갔고, 제 머릿속에는 매콤하고 칼칼한 한국 음식만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김치, 어리굴젓, 우럭매운탕, 부대찌개, 갈치조림...
겨울 일주일 남짓한 시간인데도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때문에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새삼 선교사 형제들이 우러러보였습니다. 음식이나 문화, 기후, 환경이 180도 다른 이역만리 타국에서 가장 음식을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물론이고 수시로 떠오르는 향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일상적으로 포기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분들이 정말 대단해보였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예수님의 당부말씀에 따라 세상 구석구석까지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해외 선교사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일까 생각해봤을 때 아마도 타문화에 대한 관대하고 부드러운 시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 만민들 한 형제, 한 동포로 바라보는 만민동포애, 인류 전체가 이웃이요 한 형제로 바라보는 큰마음이 아닐까요?
그런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 지칠 줄 모르는 선교열정과 기적을 이루는 힘을 선교사들에게 부여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인간 존재이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세상 모든 사람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훌륭한 선교사로 거듭납니다.
이렇게 선교사들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협력자인 성령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여러 가지 설명이나 비유를 통해 성령께 대해 설명할 수 있겠지만, 성령은 다른 무엇에 앞서 ‘바람’ 같은 분이십니다.
바람이 무엇입니까? 공기의 흐름입니다. 밀도 높은 고기압에서 저기압을 향해 흘러가는 공기가 바람입니다. 성령도 마찬가지로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움직이십니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 기쁨, 은총의 에너지로 충만한 성령, 결국 고기압 자리에 위치한 성령께서는 죄와 죽음, 질병과 상처, 좌절과 분노 상태에 놓인 우리, 결국 저기압 자리에 위치한 우리 인간을 향해 내려오십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 뜨뜨미지근합니다. 신앙생활에 감동이나 열정이 전혀 없습니다. 역동적이고 폭발적이며 뜨거운 하느님 현존 체험도 요원합니다. 그러다보니 적극적인 이웃 선교나 능동적인 복음 선포는 뒷전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분히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협조자이신 성령과의 친교가 활발하지 못해서입니다. 성령께 온전히 내어맡기는 노력의 결핍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성령과 함께, 그분의 인도에 따라 하겠다는 의지의 부족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도 낮추고 그분께 내어드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놀라운 일을 체험할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사랑의 기적을 우리 각자가 계속해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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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하라
반영억라파엘신부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4,2) 하고 권고합니다.
로마서10장 17절에서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막상 입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장 큰 일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승이 하신 일이요, 참된 제자라면 그 일을 이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어려움이 따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구애 없이 복음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포하는 자는 듣는 쪽의 반응에 얽매이지 않고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로마1,16).
따라서 우리도 “예수천국”, “불신지옥” 하면서 요란을 떨지 못하더라도 이웃에게 주보를 보내준다든지 전화를 한다든지 하는 좀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가두선교에 참여하여 천주교 소책자를 나눠주며 복음을 전하는 분들에게 더 큰 지혜와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06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하던 중 성 이냐시오의 동료가 되었고 1541년 동양으로 와 인도와 일본에서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이냐시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현장에서 어린아이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느라 성무일도를 보거나 식사하거나 휴식을 취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문에 쏟는 열정만큼 활동도 꼭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과 자신이 얻은 지식을 잘 쓰면,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인도까지라도.”하고 고백할 많은 이들이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삶 자체가 선교가 안 된다면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성인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자신이 먼저 복음화됨으로써 전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코린1,25). 삶으로 말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