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삶. (루가 10,21-2 )

2012. 12. 4. 오전 6:41:24

글자

2012년 12월 4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루가 10,21-2) 

 

말씀의 초대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는 그날,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가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그곳은 정의와 신의가 살아 있는 평화의 왕국이다(제1독서).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맡은 사명을 다하고 돌아오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달은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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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평화의 왕국에 대하여 예언한다. 다윗 위에 머무른 주님의 영은 지혜, 슬기, 경륜, 용맹, 지식, 경외심이다. 이것은 뒷날 자비의 영이 더해져서 교회 안에서 성령의 일곱 은사로 표현된다(제1독서).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저마다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오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볼 수 있고 깨달은 사람은 행복하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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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아는 분이 고관절 수술로 입원했다가 퇴원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신부님, 이제야 저는 철이 들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많은 연세에 철이라니요?”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그러자 “병원에서 철을 넣어 수술했거든요. 그러니 제가 철이 든 거죠.” 하는 것이었습니다. 불편한 몸을 투덜대지 않고 세월의 흐름을 여유 있게 받아들이는 그를 보고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우리는 철없는 사람을 두고 ‘철부지’라고 합니다. ‘철’이란 ‘계절’을 뜻하기도 하는데, 계절의 변화를 모르면 철을 모르는 법입니다. 철부지란 옳고 그름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철부지는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철없는 어린아이를 말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린아이라서 철부지가 아닙니다. 일상을 살면서 우리 삶의 곳곳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작용하게 하시어 좋은 일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사실의 놀라움을 일상 안에서 발견하게 합니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이 깊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과연 철든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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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구상 조각을 하는 작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인체를 조각한다는 것은 어쩌면 다른 조각보다 더 어려운 작업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날마다 보고 느끼는 사람의 몸을 흙덩어리로 빚어서 살아 있듯 생명과 아름다움이 느껴지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작가에게는 멋진 모델이나 훌륭한 손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눈입니다. 작가가 사람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깊을수록 배불뚝이 아저씨는 물론, 균형을 잃은 몸을 가진 장애인의 모습도 인간의 육체가 지닌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처럼, 예술가도 결국은 살아 있는 사랑으로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가졌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귀를 가졌습니다. 향기가 나지 않는 곳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고, 소리가 없는 곳에서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손이 없어도 만질 수 있고, 발이 없어도 천 리에 가닿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가진 사람만이 보이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고, 들리지 않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한 줌 흙에도 생명과 아름다움을 불어넣는 조각가처럼 신앙인 또한 ‘사랑의 눈’으로 삶을 조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해 내고 그 생명과 아름다움을 드러내 주는 예술가입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사랑 가득한 신앙인은 매우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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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하느님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명령까지 내리셨습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로 고백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살고 있는지요?
눈 덮인 산길을 버스가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넘어야 할 고개입니다. 눈발은 여전히 휘날립니다. 사람들은 운전기사를 쳐다봅니다. 그 역시 긴장하고 있습니다. 여차하면 산 아래로 미끄러집니다. 차 안에는 적막이 감돕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코를 골며 자는 소리를 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둘 돌아봤습니다. 열두 살 정도 된 사내아이가 자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고개를 넘었습니다. 차 안의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며 비로소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아직도 자고 있는 소년을 깨웠습니다. “얘야, 우리는 엄청난 고개를 넘어왔단다.” “알고 있어요. 여차하면 큰일 나지요.” “너도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었니?”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이 차의 운전기사는 제 아버지랍니다.” 소년은 아버지의 운전 실력을 믿고 있었기에 태평스럽게 잘 수 있었습니다.
인생 역시 산길을 넘어가는 곡예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이신 주님께서 이끌고 계십니다. 맡기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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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세상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십니다. 사실 지식을 많이 갖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심오한 지혜를 쌓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우주 만물과 자연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 사람들의 마음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로 철이 들수록 하느님을 더욱 알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철이 없는 사람일수록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람들의 지식과 지혜가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 사용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진리를 추구한다 할지라도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이론 안에 그 진리를 한정하려는 교만에 쉽게 빠져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내 자신이 알고 있는 하느님은 내가 필요해서 만들어 낸 하느님이지, 하느님 당신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습 그대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하느님을 알아보려면 하느님에 대한 나의 필요와 욕구 그리고 기대치에 대한 전제들을 포기한, 곧 자신을 온전히 비운 상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듣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자신을 조금씩 덜어내는 일>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나이가 조금 더 들면 하고 싶은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선호하는 기술 한 가지 확실하게 익혀 하루 온종일 아이들 곁에서 보내고 싶은 바램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적한 바닷가에 아이들 집 하나 마련해서 머리 쓰기 싫어하는 아이들만 따로 골라 함께 살며 밥해주는 일입니다. 함께 밭을 일구고 함께 낚시를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추억을 쌓아주는 일이 제 꿈입니다.

살면 살수록 단순한 삶이 얼마나 은혜로운 삶인가를 실감합니다. 비록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매일의 노동이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매일 땀흘려 일하다보면 하루해가 짧은 소박한 삶이 진정 행복한 삶입니다.

너무 머리 쓰지도 않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한적한 자연 속의 삶이 별 가치 없어 보이는 삶 같지만 사실 본래 인간 본연의 삶이었고, 정상적인 삶이었습니다.

지나치게 복잡하고 세분화된 사회구조와 인간관계의 틀 안에서 잠시의 여유도 없이 빡빡하게 돌아가는 우리들의 일상입니다. 잠시의 여유라도 있으면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의아심이 들 정도입니다. 할머니들도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일일이 스케줄을 확인하시는 세상입니다. 바쁜 사람이 잘 사는 사람, 유능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다보니 한적함, 단순함, 소박함, 겸손함, 천진함, 동심, 비움, 버림, 떠남과도 같은 단어들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너무도 어색한 단어, 별세계에서나 사용되는 단어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눈만 떴다하면 머리를 회전시키고, 밥만 먹었다하면 복잡한 문명의 바다로 우리의 온몸을 던져버리니 철저하게도 영적인 존재인 하느님을 체험할 여유가 참으로 부족합니다.
이런 우리 앞에 예수님께서는 보란 듯이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보다 단순하게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보다 여유 있고, 보다 자연스럽게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우리 삶의 여백에, 우리 삶의 주변 어디든 자리잡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인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도록 말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가난하다는 말은 잃을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결국 가난한 사람은 소유의 상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에, 성낼 필요도 없게 됩니다. 결국 가난함으로 인해 자유를 느끼고 가난함으로 인해 영적인 눈이 뜨여 하느님의 손길을 보다 자주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버리면 버리는 만큼 진리와 자유에로 결국 하느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을 닦는 다는 것은 날마다 자신을 조금씩 덜어내는 일입니다.

    쫓기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 끝의 풍경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주시고
     굳어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 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 구절이 좋아 한참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 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 틈에서 피어난 민들레 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 낱에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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