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1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준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마태오 18,12-14)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시는 그날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볼 것이다. 주님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품에 안으시며 조심스레 이끄시는 분이시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처럼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신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고 기뻐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시다(복음).
☆☆☆
진정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다. 그 양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주님께서도 한 사람의 회개를 기다리신다. 그만큼 회개는 소중한 것이다. 한 사람이 회개하면 은총은 그와 연관된 모든 이에게 내린다. 하늘과 땅의 기쁨이다
오늘의 묵상
오래전 신학생 시절, 방학 때 며칠 동안 어느 절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불교의 스님들은 어떻게 기도하고 자신을 수양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스님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참선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6시에 아침 공양을 하고 잠시 쉬었다가 12시까지 참선합니다. 점심 뒤 잠깐 쉬고 나서 또다시 참선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 뒤 9시까지 참선을 하고서 잠자리에 듭니다. 이것이 깊은 산에서 도를 닦는 스님들의 일과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단조롭고 힘든 일과를 스스로 선택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스님들의 일과를 그대로 따라서 해 보았습니다. 허리도 아프고 온갖 잡념이 머리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하루하루가 중노동을 하는 것처럼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집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왜 스님들은 산중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는 이러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깨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자신을 깊이 바라보는 것은 바라보는 사람과 바라보는 대상의 구분을 사라지게 합니다. 자신을 깨친 사람은 어떻게 대중을 사랑해야 할 것인지 알게 됩니다. 스님들의 자기 성찰의 시간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데 필요한 공부였던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고자 온갖 어려움을 견디어 냅니다. 그리고 그 양을 찾으면 기뻐서 어깨에 짊어진 양의 무게가 무겁지 않게 느껴집니다. 무엇이 목자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목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으면 하는 일이 힘들어도 기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시며 무엇을 하셔야 되는지 훤히 아셨던 착한 목자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당신처럼 살기를 바라십니다.
☆☆☆
오늘 복음에서 들은 것처럼,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면 그 양을 찾으러 나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아흔아홉 마리를 들판에 그대로 둔다는 것이 어린 시절에는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도둑이 와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상한 느낌은 어른이 되어도 바뀌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도둑이 올까 하는 염려 때문이 아니라 ‘정말 그러한 목자가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다수를 위해 소수는 희생될 수 있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다수 의견에 소수 의견은 따라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진리는 정말 다수의 의견에 있는 것일까요? 세상은 그럴지 몰라도 하느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위하여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는 분이심을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병들면 부모 역시 아파합니다. 자녀가 몹쓸 병이라도 걸리면 부모는 더욱 아파합니다. 자녀가 나을 수 있다면 부모는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것입니다. 건강한 아이를 제쳐 두고서, 아픈 아이를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할 것입니다.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은 이러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에게는 들판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목자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그렇게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작은이들도 잃어버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입장 바꿔 생각하기
-조명연 마태오신부-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한 마리 양을 위해서 아흔아홉 마리 양을 그대로 놔두고 찾아나선다는 것. 이 사회에서 이런 행동을 한다면 멍청하다는, 어리석다는 평을 받기 십상일 것입니다.
물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선 사이에 열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생각을 뒤엎으십니다. 즉, 작은 것 또한 내쳐서는 안될 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힘주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목자의 위치가 아니라 양이 되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길을 잃고 애타게 목자를 찾는 그 한 마리의 양이 바로 나라고 생각해보세요. 나를 지켜주는
목자도 없고, 사나운 짐승들만이 주위에서 나의 허점을 노리면서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때요? 목자가 나를 포기하는 것이 옳은가요?
절대 그래서는 아니지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이것입니다.
작은 사람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에….
서로 잃어버린 채
-김명희-
요즘 저에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를 대라면 아이를 키우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물질적·정신적·육체적으로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아이들과 부모가 혼연일체가 되어 애를 써야 합니다. 마치 가을 운동회 날 흔하게 행해지던 부모와 아이의 이인삼각 경기처럼 말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이른 아침부터 학교에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하고, 방과후에는 학원과 과외 교습소에서 밤늦게까지 심지어 새벽 한두 시까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집은 그저 서너 시간 잠을 자기 위해서 들르는 장소일 뿐 더 이상 아이들의 보금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허리가 휩니다. 학원비·과외비 등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시달리고도 일찍 잠자리에 들기는커녕 밤늦게 돌아오는 아이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때로는 학원이나 과외 교습소 앞에서 밤늦게 귀가하는 아이들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 것처럼 대학입시에서 이기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이기기 위해 애를 쓰고 승자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부모는 아이들을 잃어버리고 아이들은 부모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몸은 같이 살지만 마음은 서로 잃어버린 채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길 잃은 우리를 찾으십니다. 하느님은 길을 잃고 헤매는 양 한 마리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아니 길을 잃은 양이기에 하느님은 길을 잃지 않은 양보다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을 오늘 말씀하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내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내 아이의 마음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지는 않은지 먼저 살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길 잃은 양을 찾아가시는 것처럼 학원 앞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 안으로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가 소중하다
반영억라파엘신부
한 생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만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분에 넘치도록 좋은 사람도 있지만 기대와는 다른 사람,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골치 덩이를 만나서 아파하기도 합니다.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런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이 크고 넓지 않고서는 화병이 나기도 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길을 잃은 것이 자신의 부주의 탓이든, 경솔함의 탓이든, 아니면 남의 탓이든 상관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골치덩이든 그 한 사람이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하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길을 잃었던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한시라도 빨리 나타나 안내해 주기를 소망하지 않습니까?
골치덩이일수록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이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를 구원하는 도구로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다 보면 내가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바로 나 일수도 있습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떤 공동체이든 골치덩이는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서로를 소중히 인정해 주는 노력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되찾은 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는 마음이 가득한 곳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때론 내가 바로 길 잃은 양이라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
예언자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도록 하실 것을 예언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의 포로생활을 통하여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와 계약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천사는 그들이 종살이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리라고 선포한다.
이 말씀 속에는 죄의 저주 아래에 있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리라는 예언까지도 담겨져 있다. 그리스도의 강생을 위하여 먼저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를 준비할 것이며(말라 4,6 ; 루가 1,17), 그 후 주님께서 오실 것이다.
인생은 한낱 풀포기나 들꽃과 같아서 시들고 지는 것이다. 사람이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 - 예절, 친절, 선행, 건강, 지식이나 지혜, 명예나 지위 등 인간적인 모든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시드는 풀이나 지는 꽃처럼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이 영원불변하며, 말씀은 반드시 실현된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져 바빌론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이며,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권능을 떨치시며 오시어 당신을 대적하던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정복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시어 당신 백성을 찾으시고 구원하시어 데려오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귀환하리라는 이 예언 속에는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라라는 예언을 담고 있다(요한 10,11-15).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천지창조 때부터 인류구원을 계획하셨다. 그래서 에덴이라는 기쁨의 동산을 사람에게 주셨고, 첫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도 구원을 약속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하여 한 백성을 선택하셨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의 왕이 되시고, 그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축복을 내리셨다. 그들이 계약을 어기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며 죄를 지어 그 대가를 치를 때에도 그들에게 구원의 약속만은 거두지 않으셨다.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이 어떤 죄를 짓고, 어떻게 배반할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함이 없고, 그래서 사람의 구원계획 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끊임없이 구원을 약속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신다. 당신 백성이 고통과 좌절에 빠져있을 때,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가도록 구원을 약속하신다.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그처럼 크다.
그리고 때가 이르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인류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셨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과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셨다. 하느님은 구원의 하느님이시며 약속의 하느님,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의 하느님, 약속과 성취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자.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서 종살이를 하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좌절과 절망이 밀려올지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어려움을 이겨나가자. 비록 인간적인 상황이 절망스러울지라도 그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시드는 풀이나 지는 꽃과 같은 것임을 생각하고, 오직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자.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자..........◆
우리는 지금 대림절이라는 시간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셨음을 기억하고 다시 오마 하신 약속인 재림을 기다리는 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교회는 성탄을 준비하며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통한 하느님 오심에 대한 깔끔한 준비하게 하고 예수님 오시는 길을 잘 마련하도록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불과 장식으로 성탄을 꾸밉니다. 성탄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날로 그 날을 여기는 세상의 떠들썩함과 더불어 우리의 성탄도 그렇게 점점 다가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들려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유, 곧 첫성탄이 우리에게 다가온 이유를 알려줍니다.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비유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이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연히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서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마땅히 그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으로 보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과는 다른 삶을 삽니다. 주님은 당연히라는 표현을 쓰시지만 우리에겐 길 잃은 괘씸한 한 마리 양보다는 아직 내 품에 있는 아흔아홉마리 양이 더 커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한 마리는 나중에 다른 방법으로 보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깝지만 그 정신 없는 짐승 하나 따위에 내 모든 제산을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약한 것 처럼 들리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으며 심지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 한마리를 다른 방법으로 빨리 채우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기는 일까지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것은 주님의 오실 날에 대한 기대에서도 드러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왕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분 앞에서 우리의 심판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대게 그 심판에 대해 우리는 공정하시고 엄하신 하느님 만을 기립니다. 그래서 더 고해성사를 강조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유 속의 예수님은 오신 이유가 당신 우리 안에 있는 대다수의 양이 아닌 길을 잃은 한 마리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이 당연한 길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이 같이 그 정신 없는 양 한 마리에 집착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에게 양은 우리의 소유물로 여겨지지만 그래서 없으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예수님께 그 양은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소유물인 그 양이 사실 우리 자신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중 우리가 실망하고 단죄하고 나쁘다고 하는 그 어리석은 사람 하나 때문에 사람이 되신분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며,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고 다시는 버리지 않겠다 하신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그 길을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살아있는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분을 알던 이들이 자신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름으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 목자의 모습은 당연한 우리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대림절, 그 날에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주님의 첫성탄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리시고자 찾아오신 하느님의 발걸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날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우리에게 바라시는 그 심판의 기준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할 주님의 삶을 우리가 살고 있는가, 곧 그만큼 세상을,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가임을 나타내줍니다.
사랑을 기준으로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과 무서운 심판을 기준으로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의 태도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사랑으로 준비하는 성탄은 주님과 우리를 하나되게 만들겠지만 심판만을 생각하는 이는 심판 앞에서 하느님과 한 없이 멀리 떨어지게 되어 버릴 것입니다.
길을 잃은 양을 떠난 목자, 그 목자가 우리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분을 생각하며 행복하게 성탄을 준비합시다. 우리도 그분처럼 말입니다...........◆
<마술사가 되는 비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한국청소년상담실에서 한 일간지에 제공하는 작은 글귀를 보고 눈이 다 번쩍 뜨였습니다.
어느 고등학교에 자기가 맡은 반을 시험이든, 체육대회든 늘 1등에 올려놓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매해 3월 새 학년이 시작하는 날,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교사 생활 이십 년에 너희처럼 우수한 아이들을 맡는 것은 처음이다. 어제는 너희들 만날 생각에 잠도 못 잤다. 우리 올 한해 잘 해보자.
마술사가 되는 첫 걸음, 모자 속에서 비둘기가 나온다고 자기부터 믿는 것입니다.
위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부끄럽더군요.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 아이들 안에 감추어져있는 보물 같은 가능성,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눈여겨보기보다는 부족한 측면, 덜떨어진 측면만을 바라보면서 때로 무시하고 지레 포기하는 경향이 많았음을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길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간 받아온 상처가 너무도 크다는 것에 깜짝 놀랍니다. 철저한 무관심과 소외와 냉대 속에 살아온 아이들이어서 그런지 사회를 향한 적개심도 대단하지요. 아이들 마음 구석에서는 어른들을 향한 분노로 이글거립니다.
그래서 보다 청소년들에게 다가갈 때는 보다 세심한 관심, 민감함을 통한 접근이 필요하지요.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서 하고, 가능하면 따뜻한 위로나 격려의 말, 칭찬의 말로 다가서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소위 문제청소년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이들이 저지르는 문제행동은 "제발 나한테도 관심 가져줘"라는 강한 외침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삐딱하게 나가는 것은 "날 좀 더 사랑해주세요! 나한테도 눈길을 좀 주세요"라는 부르짖음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비행청소년들도 고분고분한 청소년, 제 갈 길을 잘 가는 범생이 청소년들 못지않게 소중한 청소년, 특히 예수님께서 다시금 이 땅에 오셨다면 가장 먼저 찾아 나설 한 마리 길 잃은 어린양이란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이 땅의 많은 착한 목자들이 건강하고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양들 백 마리 보다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어린 양, 병들고 말라서 돈 안 되는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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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년중 병상에서 ~~
조재형(umbrella)
가브리엘 신부
‘아! 벌써 15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 하셨는데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지 못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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