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3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루치아는 로마 박해 시대에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루치아의 순교 사실을 전하는 5세기의 기록에서 일부 전해지고 있다. 신심 깊은 부모의 영향으로 일찍 세례를 받은 그녀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딸의 신변을 염려한 어머니의 주선으로 귀족 청년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동정을 결심하고 있던 루치아는 한사코 혼사를 거절하였다. 이에 격분한 청년의 고발에 따라 그녀는 결국 300년 무렵에 순교하였다. 루치아(Lucia)라는 이름은 ‘빛’ 또는 ‘광명’을 뜻하는 라틴 말에서 유래되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태오11,11-15)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억압받는 백성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운다. 이스라엘은 새 타작기가 되어 세상을 타작하는 한편,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며 자랑스러워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요한 세례자를 극찬하신다. 그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는,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완수하였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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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억압받는 백성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운다. 언제나 가련한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심을 일깨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버려두시지 않는 분이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신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였다.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닦아 온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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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 꽃다발을 선물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장미 꽃다발을 보면 대개 안개꽃이 장미를 받쳐 줍니다. 빨간 장미를 하얀 안개꽃이 받쳐 줄 때 장미의 아름다움은 더욱 돋보입니다. 작고 흰 안개꽃은 하나하나씩 보면 드러나지 않습니다. 꽃들 가운데 장미가 제일 아름답다고들 합니다. 다른 꽃들이 아름다운 장미를 질투할 만합니다. 그런데 안개꽃은 장미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안개꽃이 없으면 장미의 아름다움도 덜 드러납니다.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 드리고 자신은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지는 해요, 예수님을 떠오르는 해로 생각했습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주어진 주님의 선구자 역할을 다 한 뒤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요한이야말로 주님을 돋보이게 하고 자신은 주님의 배경이 된, 안개꽃과 같은 사람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시인은 “그대가 빨간 장미라면 난 흰 안개꽃이 되겠습니다.” 하고 노래했습니다.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 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안개꽃처럼 다른 사람의 배경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에 나서지 않으면서 남들을 묵묵히 받쳐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요한과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기꺼이 안개꽃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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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하십니다. 21세기인 지금도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는 못된 세력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아니 오히려, 경제가 발전하고 교육과 문화 수준이 높아질수록, 하늘 나라는 점점 더 좁아져 가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이천년 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했지만, 모두 폭력을 쓰는 자들에게 핍박을 받거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도 모자라,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러한 세력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날뛰며 횡포를 부리고 있습니다. 비신앙인들뿐 아니라, 일부 경건하다는 신앙인마저도 적극 가담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사실 경제가 발달하고 지식 수준이 높아갈수록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경제가 밥 먹여 주고, 지식이 권력과 명예를 대신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부르짖을 때도 영적 지도자들마저 속화(俗化)되어 달갑게 여기지 않더니, 오늘날에도 그런 현상은 여전한 듯합니다.
이제 구원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그분을 맞이할 각오를 새롭게 다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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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칭찬하십니다. 아직까지 그보다 ‘더 큰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가 메시아의 출현을 준비하며 철저하게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엘리야’ 예언자라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종말이 되면 사람들을 준비시키려고 그가 다시 온다고 유다인들은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준비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있기에 ‘행사’는 빛이 나고, ‘일’은 성공을 거둡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음으로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어디에나 주인공 뒤에는 묵묵히 일하는 조연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진정한 주인공은 그들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어떤 영화를 촬영하는 자리였습니다. 화려한 배역을 끝낸 주인공은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석양을 바라보며 만족한 듯 연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메라 뒤쪽에서는 또 다른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그는 주인공을 보면서 ‘혼잣말’을 합니다. “잘 죽어야 할 텐데.” 그는 ‘엑스트라’입니다. 오늘의 배역은 죽는 역할입니다. 그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주인공의 역할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모두가 주인공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착각하며’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뛰어난 조연을 거쳐야 뛰어난 주연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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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가 왜곡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개인적인 소유물’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이런 엉터리 이론과 가르침이 있었나 봅니다.
사람들은 하늘 나라를 쉽게 오해합니다. 죄짓지 않고 공로가 많은 사람들만 가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는 이들만 모이는 곳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사람들이’가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천국 가기에 당연한 삶’은 없습니다. 완벽한 삶이더라도 그것은 우리 판단이지 주님의 판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실천해야’그분의 허락을 받습니다. ‘사랑의 삶’이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사랑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아름다워집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면’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삶을 계속해야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율법 준수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러기에 회개와 천국을 이야기하던 요한을 제거하려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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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과 엘리야가 오늘 복음의 핵심 단어입니다. 두 분은 예언자입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고, 엘리야는 종말에 나타날 예언자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엘리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착각이 아니라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통째로 바뀌어 새 하늘 새 땅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입니다. 받아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말을 하게 됩니다. 가짜가 되는 것이지요. 예언자랍시고 인기에 매달리다 보면 그렇게 됩니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그렇게 해서 속화되었습니다. 청중의 뜻을 하느님의 뜻보다 중시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다 보면 배우가 되는 것이지요. 영적 지도자가 대중 스타로 떠오르면 위험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의 모든 예언은 예수님을 알리는 데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 역할에 충실하다 그는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삶을 기억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오늘 기념하는 루치아 성녀도 명문가의 출신이었지만 사람의 뜻보다 주님의 뜻을 따랐기에 순교하였습니다. 어디서나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무척 아까운 것마저도 내놓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삽과 포크레인>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회의 차 로마에 잠시 머무를 때의 일입니다. 반나절 정도의 휴식시간이 있어 몇 군데 성당을 둘러보려고 시내로 나갔습니다. 당연히 첫 번째로 선택한 성당은 바티칸 대성당이었지요. 그러나 웬걸, 주일이어서 그런지 바티칸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입장을 기다리는 수많은 인파에 기가 질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긴 꼬리에 붙었다가 적어도 3시간은 걸릴 것 같았습니다.
할 수 없이 바티칸에서 좀 떨어진 다른 성당들을 몇 군데 순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바티칸 대성당만큼은 아니었지만 다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단한 성당들이었습니다. 어디 가나 비슷비슷했습니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성당 좌우편 여기저기에는 나름 의미가 있는 작은 제단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벽이나 천장에는 유명 예술가들의 그림이나 작품들이 즐비했습니다.
그렇게 서 너 시간을 돌아보고 나서 드디어 해질 무렵 발걸음을 바티칸 대성당으로 옮겼습니다. 다행이 그 많던 인파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신속히 대성당 안으로 입장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같이 갔던 일행들의 입은 ‘짝’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봐왔던 성당들도 대단했지만, 성당의 규모와 건축미, 내부의 예술성, 화려함 등은 바티칸 대성당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바티칸 대성당은 최대 6만 명 이상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네요. 성당 내부에는 500개에 달하는 기중과 400개가 넘는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중앙 제대 외에 여기 저기 44개의 제대와 10개의 돔이 있습니다. 1300개가 넘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돌아보려면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일반 성당과 바티칸 대성당을 비교하는 것은 한 마디로 삽과 포크레인을 비교하는 것 같았습니다.
살다보면 유사한 케이스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밤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보름달, 그 광채와 아름다움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새벽이 오고 동녘이 밝아오면서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 달은 순식간에 그 빛을 잃고 맙니다. 한마디로 태양 앞에 달은 ‘깨갱’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그가 특별했으면 예수님조차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은 탁월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를 종결짓는 마지막 대 예언자로서 걸맞는 삶을 살았습니다. 종래의 유다 지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갖은 권모술수와 잔머리 싸움이 오고가는 기존의 지도자들과 선을 긋기 위해 세례자 요한은 극단적 청빈생활을 추구했습니다. 깊은 광야에 거처를 마련했고 기름진 음식과 안락한 생활을 거부했습니다. 오랜 수행과 기도생활로 내면을 다스렸습니다.
때가 이르러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한 세례자 요한이 입을 열자마자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했습니다. 그가 선포하는 설교에는 종래의 지도자들과는 다른 힘과 맛과 깊이가 있었습니다. 때로 청천벽력 같고 때로 흐르는 강물 같은 그의 설교에 수많은 사람들이 요르단 강으로 내려와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그의 인품이 뛰어났으며 그의 영성이 깊었던지 사람들은 ‘이분이 혹시 오시기로 한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지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하고 대단했던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이어서 등장한 예수님에 비교하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대단했지만 예수님이라는 큰 빛 앞에서는 순식간에 그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늘나라는 모든 곳이 구원과 생명의 빛으로 충만히 채워진 곳이기에 그 광채 앞에 모든 것이 빛을 잃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나라에 입국한 인간, 그곳에서 머무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위엄, 새로운 광채가 생깁니다.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과 자비로 인해 부족한 인간들도 빛나는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상에서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한 하늘나라 시민, 하느님의 빛을 받은 천국의 영혼들의 위엄과 영광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별 것 아닌 사람이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위성,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셔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입니다. 그분이 오심과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마지막 예언자였고, 그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끝입니다. 그분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종결자입니다. 서막이 아니라 절정입니다. 이정표가 아니라 길입니다. 구원의 예표가 아니라 구원 그 자체입니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반영억라파엘신부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어느 누구 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주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세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11,12) 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어 일한다고 비난 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으나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유혹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함을 우습게 여기고 성을 상품화하며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을 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