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병자 치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루카5,17-26)

2012. 12. 10. 오전 7:08:22

글자


2012 12월10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루카5,17-26)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영광과 영화를 보게 되리라고 전한다. 그때는 광야에서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 냇물이 흐르게 되는 구원과 해방의 때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중풍 병자를 내려보낸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며 고쳐 주신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복음).

☆☆☆

이사야는 메마르고 황폐해진 이스라엘에 하느님께서 오시어 구원해 주신다고 외친다. 그날에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영광을 볼 것이며, 사람들 머리 위에 끝없는 즐거움이 넘치고,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들것에 들린 채 당신 앞에 실려 온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다. 중풍 병자의 믿음뿐 아니라 들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의 믿음을 보시고 개인도 살리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아픈 몸을 고쳐 주실 뿐만 아니라, 영혼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인간의 몸과 마음을 함께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여겼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버린 자는 버림받은 이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버린 자는 버림받은 이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살인자는 죽은 이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살인자 또한 죽은 이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자칭 의인이라고 떠벌리는 자는 죄인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버린 자를 용서하시고자 버림받으셨습니다. 자칭 의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위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살인자를 용서하시고자 몸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식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 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그를 낙원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참으로 힘든 일이 용서일 것 같습니다. 나에게 크게 손해를 끼쳤거나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 준 적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믿습니다.

☆☆☆

옛말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중풍에 걸려 신음하고 있던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지만,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주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자신의 병이 낫기를 희망하며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비록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주님을 뵙겠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때가 왔습니다. 주님께서 그들 가까이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주저하지 않고 중풍 병자 친구를 들것에 싣고 주님께 데리고 갑니다. 사람이 많아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의 일이라면, 그리고 주님을 만나 뵈려는 열망으로 지붕에 올라가 천장을 뚫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중풍 병자와 친구들은 주님을 뵙는 일에 한마음 한뜻이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한마음 한뜻이 된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칭찬까지 해 주십니다.
이와 같이 공동체가 마음을 모아 구하면, 무엇이든지 주님께서는 다 들어주십니다. 개인은 공동체의 한 구성원일 뿐이지만, 각 개인이 서로 마음을 모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넘치는 말씀입니다. 즉각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이의를 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로서는 당연한 의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답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물론 죄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이 쉽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죄가 용서되었는지’ ‘아닌지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것은 아무나 말할 수 없습니다. 결과가 즉각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나 말할 수 없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중풍 병자가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천상 능력이 증명된 것입니다. 그분께 죄를 용서하는권한이 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인색해지면내면 세계는 굳어집니다.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기적을 보고서도 마음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만큼 굳어 있었습니다. 한의학에서는 몸이 굳어지는 현상을 불인(不仁)이라고 합니다. 어질지 못하면 마비된다는 암시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 들것에 실려 왔던 중풍 병자가 우뚝 일어섭니다. 그러고는 두리번거리며 걷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탄성도 지르지 못합니다. 순간적인 적막 속에 사람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때의 분위기를 쉽게 그려 볼 수 있습니다. 분명 그 자리는 기적의 자리였고, 감동의 자리였습니다.
중풍은 무서운 병입니다. 나이 들수록 더욱 두려워지는 병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중풍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이 오늘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중풍 병자의 이웃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 앞으로 환자를 데려갈 수 없자, 지붕을 벗겨 내고 줄에 매달아 그분 앞에 내려 보냈습니다. 대단한 열성입니다. 우리네 가옥 구조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스라엘에서는 가능했습니다. 우기와 건기가 뚜렷했기에 비가 없는 건기에는 지붕에 거적을 덮어 두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이러한 용기와 적극성이 예수님을 감동시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병을 낫게 하시면서 죄를 용서한다고 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중풍과 같은 무서운 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참에 그들의 잘못된 생각까지 고쳐 주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죄의 결과가 중풍이라 믿어 왔기에 그 원인인 죄를 용서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행복한 사람들

-상지종 신부-

 중풍병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새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는 죄를 용서받기 이전에 이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손발이 되어준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자신의 허물을 벗기는커녕 예수님께 다가갈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소박한 믿음이 값지게 받아들여져,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소망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믿음이 받아들여지기 전에도 이미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통 받는 친구를 제 몸처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위해 무모함을 감수하는 용기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은 행복한 사람이십니다. 가진 사람들의 거친 눈빛보다 더 강한 아름다운 사랑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중풍병자와 친구들을 여럿으로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하나의 마음, 하나의 몸, 하나의 믿음, 하나의 소망을 가진 갈라질 수 없는 단 한 사람으로 받아 안으셨습니다
.
갈라진 이들이 하나가 되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을 향하는 그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하나인 여럿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를 통해 중풍병자의 새로운 삶을 선언하심으로써, 사람의 아들이 이 땅에 온 이유를 밝히심으로써 그들 안의 하느님 나라와 당신과의 참된 일치를 선포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간절한 마음은 하늘에 닿는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복음을 묵상하던 중, 중풍병자를 평상에 누인 채 예수님께로 데려온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환자 얼굴도 잘 모르던 사돈의 팔촌 쯤 되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니면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길 가던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누구였을까요? 오랜 세월 한 지붕 아래 동고동락해왔던, 그래서 환자의 끔찍한 고통을 매일 직접 자신의 눈으로 지켜봐왔던 가족들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이 가족의 모습, 한번 가족이면 영원한 가족인 가족, 끝까지 가족 구성원을 포기하지 않는 가족, 끝까지 책임져주는 가족의 모습은 자꾸만 무너져내려가는 오늘날 우리 가족상 앞에 큰 의미와 성찰거리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족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물론 아주 모범적인 가족들도 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가족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팽배해져만 가는 성공지향주의, 물질만능주의의 여파로 인해 우리의 가족상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말만 가족이지 진정한 가족이 아닌 가족이 많습니다. 한 지붕 아래 같이 살고는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가족이 아닌 가족이 많습니다. 가정이 마치 잠만 자는 여인숙이요 끼니만 해결하는 식당처럼 전락한 가족도 있습니다.

    잘 나갈 때만 가족이지 어쩌다 한번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면 가족도 아닌 가족이 있습니다. 건강할 때만 가족이지 어쩌다 중병 한번 들면 가족도 아닌 가족이 있습니다. 돈 잘 벌어 올 때만 가족이지 실직이라도 하면 인간취급도 못 받는 가족이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의 가족들이 보여준 모습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중풍병자 가족이 가슴마다에 치유의 희망을 한 가득 안고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도착만 하면 바로 치료실로 안내될 줄 알았는데, 아니 이게 웬걸, 집 앞은 치유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습니다. 대기번호표를 나눠주는데 번호가 2000번이었습니다. 그냥 기다리다가는 사흘을 기다려도 소용없을 상황이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완장 차고 정리하고 있는 사도들에게 사정사정 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새치기하다가는 몰매맞은 분위기였습니다. 고민 끝에 중풍병자 가족들은 비상대책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기가 막힌 묘안을 짜냈습니다. 다른 줄을 하나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편법이었지만 새치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붕위로 올라갔습니다. 조심스럽게 지붕을 뜯어냈습니다. 지붕위에서 몰래 내려다보니 저 밑에 그들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예수님께서 앉아계셨습니다. 그들은 환성을 올리며 중풍평자가 누워있는 평상 끝 네 곳에 긴 줄을 매달아 조심스럽게 밑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밑에 계시던 예수님 상황은 어떠했겠습니까? 한 마디로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너무나 열심히 공생활을 하셔서 시장하셨겠지요. 짜장면 한 그릇 시켜 드리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냥 열렸겠습니까? 지붕위에 싸여있는 먼지며 나뭇가지며, 이물질들이 밑으로 떨어져 내렸겠지요. 아무리 다급하다고 해도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겠습니다.

    정말 예의가 아니었고, 몰상식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중풍병자를 치유해주십니다. 중풍병자 가족들의 병자를 향한 지극정성, 한번 낫게 해주고 싶다는 그 간절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은 하늘에 닿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웃을 향한 그 간절한 마음, 애틋한 사랑, 지극한 정성을 요구하십니다. 멀리 있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장 가까이 살아가는 내 가족구성원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을 바라십니다.


조재형(가브리엘)신부

사제 생활21년을 했습니다. 본당주임 신부 8, 해외 연수 2, 교구청 사목국 3, 보좌 신부 8년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많은 신부님들이 원하는 안식년을 하고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늘 바쁜 제게 하느님께서는 좀 더 알차게 쉴 수 있도록 발목이 골절되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는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해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을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대림 제2주간 월요일을 묵상하면서예전에 쓴 강론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살아가며 편리해진 것들이 많아졌음을 알게 됩니다. 겨울철에는 연탄을 많이 사용했었습니다. 연탄을 가는 것은 어머니들의 일이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 연탄을 갈아 보았던 추억이 있습니다.
이제는 도시 가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연탄을 땔 일도, 연탄을 갈 일도 없어졌습니다. 명절 때가 되면 이웃에 사는 친지들에게 선물을 전해 드리곤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소고기며 돼지고기를 신문지에 담아 주셨고 저와 형들은 그것을 친척들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러면 친척들께서는 고마워하셨고 용돈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이제는 선물도 택배로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이 많이 절약되고 택배로 보내는 선물은 포장도 예쁘게 합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장례가 났을 때입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집 앞의 도로에 큰 천막을 쳐 놓았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오셔서 음식 준비를 도와 주셨습니다. 이제는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합니다. 장례의 음식 준비며, 손님맞이도 상조회사에서 도와줍니다. 예전처럼 가족이 많은 것도 아니고, 상조를 이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었습니다.
 
편리해진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버렸습니다. 빨갛게 타오르던 연탄도 버렸습니다. 명절 때 준비했던 사랑의 마음도 버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함께 하던 장례의 풍습도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편리한 세상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과 문화도 함께 버린 것은 아닌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하느님께서는 비록 우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하얗게 하시고,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하실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희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절망은 희망으로, 어둠은 빛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죄인으로 멸시받고, 공동체로부터 쫓겨났던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았고, 공동체로부터 다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화려하고, 커다란 건물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어도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희망현실이 되도록 함께하는 이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웃들은 예수님께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이웃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저는 봉성체를 다니면서 10년 이상 자리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본인도 힘들지만, 가족들도 함께 아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풍병자는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가족들과 이웃들이 함께 할 때, 중풍병자는 힘을 얻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5
년 동안 중풍병자인 아내를 위해서 헌신하시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지금, 아내는 말도 하고, 비록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밖으로 나가서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들도 함께하니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골절 사고로 4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두발로 서서 걸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행복인지 새삼 알았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의 지친 육신과 영혼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꿈과 희망은 혼자일 때는 그대로 꿈과 희망으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함께 할 때면 꿈과 희망은 현실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함께하는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시고,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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