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2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 11,28-30)
(과달루페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분만을 믿고 의지하라고 강조한다. 주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시는 분이시다(제1독서). 유다인들에게 율법은 부담스럽고 무거운 짐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해방시키시려고 당신 품으로 초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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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위대한 분이시다. 하늘의 별들을 창조하셨고, 땅 위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다. 그분께는 피곤함도, 지치심도 없다. 오히려 힘겨운 이를 위로하시고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힘을 얻는다(제1독서). 예수님의 멍에는 그분의 가르침이다. 서로 사랑하며 용서를 베풀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기에 멍에라고 하셨다. 힘들지만 지고 가야 한다는 암시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삶의 멍에가 무거울 때는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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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기수의 안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안장이 다른 안장에게 “나는 기수를 태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안장이 “잘 생각해 봐!” 하고 충고했습니다. 안장은 깊이 생각한 끝에 깨달았습니다. “그래, 나는 기수를 태우지. 그러나 말은 나를 태우고 있지 않나!” 이렇게 안장은 말이 자신만이 아니라 기수도 태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에 태워진 존재이기에 비로소 기수를 태울 수 있음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하늘은 땅에서 열린다』에서).
사람들은 가끔 자신만이 모든 짐을 짊어지고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 자신이 다른 누구의 등에 타고 있기 때문에 짐을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기 쉽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짐을 짊어지시는 근원이십니다. 시편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날이 찬미받으소서. 우리 위하여 짐을 지시는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68〔67〕,20). 하느님께서는 짐을 진 우리를 늘 태우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무거운 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가족의 생계에 대한 부담, 끊임없는 경쟁, 질병과 가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친지와 이웃 등 우리 어깨에 지워진 짐이 우리를 지치고 힘들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삶의 짐을 진 사람은 다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상처에 입맞춤한다고 통증을 없애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나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우리 어깨에 놓인 짐을 지고 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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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누구에게나 힘겹습니다. 쉽고 편한 인생은 없습니다. 곁에서 볼 때 아무런 고생 없이 사는 듯해도 그 나름대로 어려움은 있습니다. 돈과 재물이 넘치는 사람일지라도 자신만이 느끼는 공허가 있는 법입니다. 아픔과 기쁨이 ‘함께 얽혀 있어야’ 건강한 인생이 됩니다. 너무 풍족하기만 해도 행복한 삶은 아닌 것입니다.
많은 경우 신앙인은 착각합니다. 올바르게 살면 인생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든’ 인생의 문제점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이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면 ‘시련이 왔을 때’ 자신을 희생자라고 단정하게 됩니다. 바르게 잘 살아왔는데 왜 고통을 주시느냐며 원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삶의 ‘멍에’가 있습니다. 인생을 엉뚱하게 살지 말라고 주님께서 주시는 ‘제동 장치’입니다.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성격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자라난 환경이나 가족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선택한 직장이나 직업이 멍에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사는 것이 힘들고 관계가 고통스러울 때, 이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조용히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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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짐을 지지 않는 인생이 있을는지요? 누구나 ‘힘든 짐’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나 혼자만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생각은 유혹입니다. 물론 실제로 무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마음먹기’입니다. ‘지고 갈 수 있기에’ 주셨음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힘든 짐을 지지 않으면 인생의 깊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밤새워 울어 보지 않았다면 삶을 논하지 말라.” 어느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뇌 없이는 깨달음도 없다는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짐이 힘겹고 무겁기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삶에 아픔이 없으면 신앙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 인간 속성입니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반항하고 저항하다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믿음입니다.
볼 수 없고 들리지 않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삶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그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에 부활이 있습니다.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시인 김용택의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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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천천히 가야 합니다. 빨리 가다 보면 쉽게 지칩니다. 삶의 무게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아무렇게나 살기에는 너무나 고귀한 삶이 되었습니다. 천천히 가고자 우리는 신앙을 선택하였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믿음의 길에 들어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가르침을 멍에에 비유합니다. 멍에는 소의 목에 걸어 두는 구부러진 막대기입니다. 그곳에 줄을 매어 소를 부립니다. 멍에가 없으면 소를 제대로 부리지 못할 겁니다. 우리네 인생에는 멋대로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제동 장치를 하지 않는다면 어려움이 참으로 많을 겁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합니다. 좋은 것만 찾으려 하고, 쉬운 것만 택하려 듭니다. 맛있는 것만 먹고 싶어 하고, 즐거운 것만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질병이, 때로는 고통이 멍에가 되어 달라붙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때는 어린이의 말과 행동을 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하고 필요한 것만 청합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 노릇을 계속한다면 곤란한 일입니다. 그러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꾸짖고 사회가 질책합니다. 인생의 멍에를 깨닫게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어른으로 대접합니다. 그러기에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의 멍에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피곤하고 지친 나를
-김찬선신부-
우리말 오늘 복음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합니다.
영어 복음을 보니
“Come to me, all of you who are tired from carrying heavy loads, and I will give you rest."입니다.
오늘 이사야서는
“그분은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지칠 줄 모르시는 것은 힘이 샘솟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지치는 것은 얼마 없는 힘을 다 썼기 때문이다.
제가 자주 하는 말 중의 하나가 우리 인간은 자가 발생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치 배터리와 같아서 쓰고 나면 이내 힘이 바닥납니다.
그리고 자가 발생적이지 않기에 외부로부터 다시 힘을 받아야지만 다시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을 하고 싶지만 얼마큼 사랑을 쏟아 붓고 나면 더 이상 줄 사랑이 없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상을 바라지 않고 조건 없는 사랑을 하고 싶지만 사랑이 고갈되어 이제 너의 사랑으로 채워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고는 꼭 사랑을 받고자 합니다.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많이 있는 것 같지만 힘 좀 쓰고 나면 이내 지칩니다. 힘 꽤나 쓰겠다고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을 다 써서 지치게 되면 스스로 힘이 솟지 않기에 반드시 힘을 어디서 얻던지 받던지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힘을 얻습니까? 쉼을 통해서 힘을 얻습니까?
쉬고 나면 힘이 나는 것 같지만 쉼은 일을 쉼으로 힘을 더 이상 쓰지 않는 것이지 쉼 자체가 힘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과 격려로 힘을 얻습니까? 인간의 사랑과 격려가 힘이 되기는 하지만 완전하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찬미하며 “당신은 힘이시나이다.”하고 노래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힘의 원천, 힘이 샘솟는 지칠 줄 모르는 분이시니 신앙인이란 모름지기
하느님 안에서 쉬고 하느님에게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글라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님을 관상함이 우리의 휴식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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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이 비록 3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복음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을 충실히 알아듣기엔 무게가 만만치 않습니다.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은 단순한 기복적 차원에서 이 복음을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네 삶이 갖가지 어려움과 슬픔과 고통들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만큼 예수님께 나아가면,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이런 모든 슬픔과 고통이 제거될 것이라는 바람 속에서 기도하거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십중팔구 실망하거나 좌절을 맛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겠다고 하신 그 안식의 내용이 무엇인지 깊게 알아듣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안식과 예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안식은 사뭇 다를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당신 짐은 가볍다고 하십니다. 기도하는 여러분에게 이 말씀이 당연한 것으로 들어오는지 깊게 깊게 살펴보십시오. 과연 예수님의 멍에가 편하고 짐이 가벼운가? 만일 그런 것 같지 않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가?
예수님이 삶을 살아내시는 방식과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어디가 같고 어디가 다른가, 내가 삶을 살아가면서 겪는 온갖 어려움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런 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이뤄지는 만큼 우리 존재는 깊이를 더하게 되고, 자유와 기쁨과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한 화두입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멕시코 시티 북쪽 고지에는 멕시코 제일의 과달루페 성당이 있습니다.
1531년 12월9일 성 ‘후안 디에고’(Juan Diego) 가 현 과달루페 성당 자리인 테페약 언덕에서 검은 머리와 갈색 피부를 가진 성모의 발현을 목격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디에고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계획이 드러나도록 이곳에 성당을 지으라고 주교에게 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디에고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들은 ‘수마라가’(Juan de Zumarrage) 주교는 그 언덕이 아즈텍의 여신인 토난씬(Tonanzin)의 성소였기 때문에 디에고의 말을 불신하면서 성모님의 증표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디에고가 이 사실을 다시 성모님께 전하자 성모님께서는 징표로 테페약 산 꼭대기에 올라가 장미를 주워 주교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월임에도 산 정상에는 과연 장미꽃들이 있었고, 디에고는 자신의 틸마(외투 또는 보자기로 쓰는 겉옷)에 장미를 담아 주교에게 내보이자 수마라가 주교는 디에고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디에고의 틸마에 귀부인의 모습과 그 옷자락을 한 천사가 받들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교는 그 자리에 성당을 짓게 되었습니다.
틸마에 새겨진 성모님은 현재에도 성당의 제단 뒤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 갈색 피부의 과달루페 성모님은 그 후 멕시코 중부지방의 원주민들의 숭배 대상이 되었고 과달루페 성당을 자신들의 신을 모신 것처럼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 때문에 7년 만에 멕시코 원주민 700만 명 이상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이때부터 과달루페 성모님과 디에고는 멕시코인들의 신앙적.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고 19세기 초에 있었던 멕시코 독립전쟁에는 모든 계층의 멕시코인들이 과달루페 성모님의 깃발아래 하나로 뭉쳐 스페인 사람들을 몰아냈습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은 그들의 신앙 속에 깊이 자리하여 국가의 중요한 시기마다 당신 백성들을 돌보아 주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과달루페의 의미는 ‘돌뱀을 쳐부수다.’또는 ‘박멸하다.’는 뜻입니다.”돌뱀은 아즈텍인들이 섬기는 날개 돋힌 사신 ‘퀴트잘코아틀’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돌뱀의 우상을 물리치고 그곳을 당신의 지배하에 두신다는 것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3장 15절에도 보면 뱀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고 기록하여 사탄의 세력을 물리칠 것이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우리는 과달루페 성모님의 축일에 일상 안에서 어둠의 세력과 세상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저는 2004년 성체대회를 기해서 그리고 2005년 미국 남가주 사제 협의회의 성지순례 때 과달루페 대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주교회의가 있는 날이라 사도들의 후계자인 150여명의 주교님들이 장엄하게 미사를 봉헌하고 계셨습니다. 그날 뜨거운 감동으로 틸마에 새겨준 성모님의 보습을 보면서 성모님과 함께 죄악을 끊어 버리고 거룩한 사제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자신을 봉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까맣게 잊고 살았으니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둠의 세력인 돌뱀을 물리치는 강인한 믿음의 소유자 되기를 기도하며 어머니의 마음을 많이 상해드렸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11,28)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무거운 짐과 멍에를 메고 괴로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억눌리고 고된 생활의 짐이 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수많은 규정을 지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지키기만 하면 살수 있는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에제키엘 20,13)을 율법학자들은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을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습니다. 법을 만든 그들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율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하시며 산상 설교를 통해 참된 행복과 율법(마태5장-7장)을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법에 사람을 맞추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위한 법을 확인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1요한5,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며 스스로 모든 이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주어진 짐이요, 멍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스스로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이셨기에 편한 멍에요, 가벼운 짐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은 결코 넉넉한 삶의 편안함에서 오는 무사태평함이나 악과 공존하기 위해 놓여진 안일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여정도 고달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면 내적인 평화와 기쁨,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사실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로마13,10). 주님의 계명을 준수하고 계명의 의미를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멍에는 위로의 원천이 되고 인간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네”(시편19,8-9). 고달픈 삶의 여정 안에서도 주님의 멍에를,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짐을 기꺼이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십자가의 아름다운 구속拘束
-정찬호-
아무리 생각해도, 멍에가 편하고 짐이 가벼울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멍에와 내 짐’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기에 편하고 가볍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신약 성경에서 멍에는 ‘율법’을 의미하는 상징어입니다(사도 15,10; 갈라 5,1 참조).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된 율법이 멍에로 전락한 것은, 유다 종교 지도자들이 율법의 외형적 준행에 집착한 나머지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과 자비를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우는 ‘엄격한 율법주의’를 치우시고,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 성취되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멍에는 다름 아닌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위로와 구원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리석음이며, 로마인들에게는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지는 치욕스러운 사형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으로 그 의미가 질적으로 변화합니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오로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예수님의 십자가로 상징되는 멍에와 짐은 어쩌면 영혼이라는 바다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단단히 매어주시는 ‘생명줄’이자, 바다에 가라앉지 않도록 손수 입혀주시는 ‘구명조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내 안에 천상 예루살렘>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형제들과 산행을 다닐 때 마다 오늘 복음을 온몸으로 묵상하곤 합니다. 1박 2일, 혹은 2박 3일 산행을 하려면 필요한 물품들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물품들을 중심으로 리스트를 만듭니다.
계획이 마련되면 이제는 짐을 싸기 시작해야죠. 먼저 각자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큰 배낭을 하나씩 준비합니다. 그 안에 별의 별 것들이 다 들어갑니다. 쌀, 라면, 밑반찬, 과일, 과자, 휴대용 버너, 코펠, 침낭, 우의, 랜턴, 미사도구, 그 외 개인 짐들...
바리바리 싸고 나서 저울에 올려보면 20-30Kg는 너끈히 나갑니다. 평지에서도 걷기가 꽤 힘든 배낭을 메고 수십Km를 오르락내리락하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산 능선을 따라 걷다가 가끔씩 경치 좋은 곳에서 잠시 쉴 때는 배낭을 내려놓습니다. 그 순간의 해방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꿀 같은 ‘휴식’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거운 멍에를 잔뜩 메고 가고 있는 우리 인생길에 한 줄기 소나기처럼 시원한 존재, 먹장구름 사이를 뚫고 화사하게 나타나는 무지개 같은 존재, 갈증 끝에 만나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옹달샘 같은 존재...
하느님께서는 팍팍한 일과 속에 고생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가끔이나마 참 평화를 맛보기를 바라십니다. 지고 가는 짐이 너무 무거워 주기적으로 모든 것 내려놓고 쉬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때때로 참된 평화, 제대로 된 안식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짧은 순간의 안식을 통해서나마 잠시 피로를 씻고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의외로 사람들이 의외로 참 휴식, 진정한 안식, 제대로 된 평화를 맛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아무래도 내 안에 그 누군가가 들어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면 내 삶을 내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떡하니 내 중심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내적인 평화나 고요도 기대하기 힘듭니다. 당연히 기도생활이나 영적생활도 지지부진합니다.
필요한 노력은 한 가지 내 안에서 ‘그’를 쫒아내는 것입니다. 그를 몰아내고 나면 또 다른 ‘그’가 들어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그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4세기 수도생활의 대가였던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그 자리를 ‘하느님의 처소’ ‘천상 예루살렘’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 나라, 내 안에 천상 예루살렘이 마련될 때 이제 더 이상 나는 다른 사람들과 사사건건 다투게 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그 누군가가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내 삶을 당당하게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으며 침해할 수도 없는 작은 공간 하나 만드는데 힘써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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