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일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마태오 11,16-19)

2012. 12. 14. 오전 8: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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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4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십자가의 요한은 1542년 스페인 아빌라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을 체험한 그는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후 요한은 ‘아빌라의 성녀’로 잘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영성 생활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1591년 세상을 떠난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1926년에는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어둔 밤』, 『영혼의 노래』 등은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마태오 11,16-19)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서 이르신 계명을 저버렸다. 주님의 계명 안에 평화와 의로움과 축복이 담겨 있는데도 그들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저버린 백성에게 안타까움을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한탄하신다. 그들은 회개하는 마음이 없으니 하늘 나라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다(복음).

 

☆☆☆

주님의 이끄심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리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틈만 나면 엉뚱한 길로 나아갔다. 그때마다 시련이 닥쳤고 백성들은 흩어졌다. 이제라도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한다면 주님의 인도를 받을 것이다.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들 것이다(제1독서). 바리사이들은 세례자 요한을 외면했다. 백성들은 따르고 있었지만, 조상들의 전통을 왜곡한다고 비난했다. 예수님께도 같은 불평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들의 유치한 처신을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신다. 장터의 아이들 같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사람들은 요한 세례자가 광야에서 회개와 세례, 죄의 용서를 부르짖자 그를 마귀가 들린 사람이라고 여기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시 세대를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놀이하는 것에 비유하십니다. 당시의 세대가, 아이들이 장터에 모여 한쪽에서 춤을 추면 상대편에서 곡을 하고, 다른 한쪽에서 곡을 하면 맞은편에서 춤을 추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맹자』에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임금이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입니다. 임금이 백성에게 고통을 주면서 자기만 즐긴다면 백성은 반발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임금이 백성과 늘 함께한다면 임금이 즐기는 것을 백성도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여민동락’은 백성을 위한 통치자의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비단 통치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심보가 고약한 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사목 헌장’에서는 변화하는 현대 세계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헌장의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무릇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이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슬픔과 고뇌에 함께해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만일 소외된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

편견은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입니다. 그러기에 공정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엄청난 오해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복음 말씀은 바리사이들의 편견을 꾸짖는 내용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단식하며 사람들을 가르치자, ‘마귀 들린 선생이라며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통 사람들과 어울리시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소문을 냅니다.
오늘날에도 편견은 여전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속도와 연관된 일입니다. 무엇이든 빠른 것이 좋은 것이고, 느린 것은 안 좋은 것이라는 편견입니다. 그리하여 단번에 화끈하게 끝나는 것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빨리 교세를 확장해야 하고, ‘미사도 빨리’, ‘회합도 빨리’, 강론도 짧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빠른 것은 그저 빠른 것일 뿐입니다. 느린 것도 그저 느린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삶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세상 모든 것이 빠르기만 하다면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빨리 하는 습관보다 즐겁게 하는 습관을 염두에 둬야 할 것입니다.
우리 곁에는 즉흥 병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즉흥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물결입니다. 한 번쯤 멈춰 설 줄 알아야 합니다. 바리사이들도 편견을 깨고 조금만 천천히 다가갔더라면 예수님을 알아봤을 것입니다. 너무 서둘렀기에 가까이 계신 구세주를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

 

자폐증에 걸린 사람은 백약이 무효입니다. 가족의 사랑만이 겨우 제 한 몸을 가눌 수 있게 합니다. 자폐증이 있는 자녀를 헌신과 애정으로 바로 세운 어머니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위대한 어머니들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자폐 증상이 없을는지요? 믿음에 대해 말하기 싫어하고 신자인 것을 감추고 싶어 한다면 의심해 봐야 합니다. 선교에 대해서는 냉소적이고 믿는 이들에 대해서도 차가운 시각을 드러낸다면
신앙의 자폐증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분명한 이유 중의 하나는 신앙생활에 끌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믿음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이어야 할 신앙이 멍에가 되어 있는 셈입니다. 누군가 애정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사랑으로 다가가
기쁘게 믿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합니다. 간섭이 아니라 감동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따뜻함만이 차가움을 녹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변덕스러운 모습 때문입니다. 그러니 꾸준히 믿음의 길을 걸으면 누구나 기쁨과 평화를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애정을 주시고자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앙의 자폐증을 극복하면 삶의 자폐증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반영억라파엘신부

오늘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저는 ‘십자가의 요한’하면 잊혀 지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 사무실 화장실을 들렀는데 앞에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이라는 글귀가 붙어있었습니다. 용변을 보는 동안 그 짧은 글귀를 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묵상합니다. 성경구절이나 성인 성녀들의 말씀을 자주 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붙여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서로에 대해 도무지 무관심한 세상입니다. 때로는 자기주장을 펴고 그것만이 옳다고 우기는 세상입니다. 자기 뜻대로만 하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틀렸다고 말합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들의 유세가 한창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정책으로 미래의 비젼을 제시하기 보다는 서로를 비난하고 깎아 내려서 그것을 통해 이득을 보려고 합니다. 정책을 제시하는 것도 재원마련에 대한 대책은 없이 인기몰이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헛된 공약을 남발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국민들도 쉽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마음 한 번 굽으면 모든 것이 굽어보이게 마련입니다. 서로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고 인정해 주는 성숙함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11,17)고 말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 뜻대로 하자고 우기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면 하하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덜대는 세상에서 누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속죄의 생활을 하였던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굽어서 이것도 저것도 다 못 마땅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마음이 굽어져 있는 이상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눈을 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봐 줄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예수님께서는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 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 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11,34-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 1장18절에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말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볼 눈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3,16).
사랑합니다.



<경청과 공감, 환대와 지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끔씩 강의나 강론을 할 때 아주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오버도 하고 생쇼도 해보지만 미동도 없이 그저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는 사람들 앞에 설 때입니다. 등줄기에 땀이 다 흐릅니다.   그래서 "미움보다 더 못 견딜 것은 무관심"이란 말도 있는가 봅니다.

     그런가 하면 가뭄에 콩 나듯이 협조적인 사람들이 계시지요. 가끔씩 공감이 가는 말에는 고개도 끄덕이고, 의미 있는 내용이다 싶으면 필기까지 하는 정성을 보입니다.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온정신을 집중시켜서 듣는 분도 계십니다. 이런 때는 정말 신명이 나지요. 강론할 맛이 나지요.    그래서 요즘 시대, 경청과 공감, 환대와 지지를 큰 미덕으로 삼는가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도래 앞에서 뭔가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동족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계십니다. 
     “이 시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공동체에 가장 해를 끼치는 암적인 행동 역시 형제에 대한 무관심, 냉랭함, 의도적인 무시, 내려 까는 눈길, 애써 외면함 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반면 상냥함, 환대, 마음으로부터의 반가운 인사, 이웃의 일상에 대한 진지한 관심, 조용한 경청, 공감, 따뜻한 격려와 지지는 얼마나 공동체를 살리는 요소들인지 모릅니다.

     요즘 현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스타일의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편안하게 남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한 고위성직자에 대한 말씀을 자주 듣습니다. 그분을 단 한번이라도 만난 사람은 하나같이 그분의 골수팬이 되고 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분 말씀이 좋아서? 그분이 멋있게 생겨서? 그분이 경제적 능력이 뛰어나서? 유명하고 덕망 높은 분이어서?      다들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분이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마치 남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보인답니다. 사람이 찾아오면 지위고하,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상대방을 극진히 환대합니다. 따뜻한 차를 대접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고, 적당히 물어봐 주고, 맞장구쳐주고 그러신답니다. 
     일단 편안한 분이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털어놓는 동시에 치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위안을 받고 기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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