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보아라.” (요한 1,35-42)

2013. 1. 4. 오전 8:06:24

글자

2013년 1월 4일 주님 공현 전 금요일

 

 

그때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요한 1,35-42)

 


 

말씀의 초대

 

선(善)은 악(惡)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이는 죄를 저지르려 하지 않는다. 믿음에 충실하다는 것은 죄와 타협하지 않는 태도이다(제1독서). 요한 세례자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생긴다. 곧이어 시몬 베드로 또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이 역시 동생 안드레아의 증언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체험은 증언을 낳고, 증언은 다른 이를 예수님께 인도하게 한다(복음).

☆☆☆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죄를 멀리하고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일을 실천한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거나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다(제1독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학문이나 지식을 배우러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차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면서도 예수님께서 맡기시는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앞으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게 될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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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우리가 신앙의 맛을 들이려면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야 한다는 점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제자들이 왔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이른바 맛 들이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대개 김치를 잘 먹지 못합니다. 젓갈의 맛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어느새 김치 없이는 음식을 못 먹게 되고, 젓갈을 곁들이면 밥을 더 먹게 됩니다. 김치 맛과 젓갈 맛은 이렇게 점점 친숙해지다가 어느새 그 진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김치가 어떤 맛이고 젓갈이 어떤 맛인지 이론적으로 배웠다고 해서 그 맛을 아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김치라는 음식에 대한 체험이 그 맛을 알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며 초대하시고 그들과 함께 머무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해 아무리 이론적으로 알려 주신다 해도 신앙이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그분을 두고 안드레아처럼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고백할 만큼 그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바란다면 일상 안에서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지 않고 “와서 보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예수님과 함께 묵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어떻게 사시는지 와서 보라고 초대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사시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라는 뜻에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여 예수님께서 사시는 곳을 찾아가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몸으로 배우고 가슴으로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같은 초대를 하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먼저 당신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곧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그분께서 누구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 때 우리는 그분을 따를 수 있고, 그분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지 않고서는 우리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이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가끔 신자 아닌 사람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역시 천주교 신자답군요.” 하는 말을 들으면 제가 천주교 신자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도 별수 없군요.” 하는 말을 들으면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천주교 신자인데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은 마음 안에 진심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2코린 5,17)라고 말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 안에 늘 머물러 있음으로써 스스로 새로워지고, 새로운 사람으로서 이웃에게 축복을 주고 기쁨이 되고 있는지요?

☆☆☆

개는 야생으로 돌아가면 들개가 됩니다. 그러나 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생으로 가라 해도 가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 양을 인간은 애정으로 보살핍니다. 그러기에 사람 손이 닿지 않으면 양은 죽어 버린다고 합니다. 이런 양이기에 목자에게 언제나 복종합니다.
이스라엘은 양이 많은 나라입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양 이야기가 많습니다. 어린 양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어린 양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목자가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이처럼 순한 양을 유다인들은 과월절이 되면 잡습니다.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 때 쓰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바로 그 ‘어린양’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영성체 전에 사제는 빵을 쪼개는 예식을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이신 생명의 빵을 나눈다는 의미이자 인류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의 부서진 몸을 상징하는 행위입니다. 이때 신자들은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하고 외칩니다. 목자에게 철저히 순종하는 어린 양을 예수님께 비유하는 것이지요.
요한은 자기 제자 두 사람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떠나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렇게 순종하며 살라는 암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새 제자들에게 아무런 당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와서 보아라.” 하십니다. 아버지께 순명하며 사는 당신의 모습을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곁에 머물면서

-구요비 신부-

우리나라의 해외 여행자 수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방학 동안 배낭여행을 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로 되었고, 신혼여행도 많은 경우 외국으로 나가고 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국내 자산이 외국으로 유출되기에 우려하는 소리도 높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손실만을 문제삼는 것보다 우리가 외국의 문물과 생활을 대하면서 얻게 되고 배워오는 부과효과도 크다고 보야야 하겠다.
고사성어 중에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종교의 영역에도 해당되니, 무릇 모든 종교의 본질은 인간이 절대자인 신을 만나뵙는 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뒤를 따라오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을 보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당신을 애타게 찾는 갈망을 심어놓으셨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42,2).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여, 당신의 품안에 쉬기까지 내 영혼은 이렇게 불안하나이다!” 하고 기도했다.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향수와 목마름에 대해 예수님은 “와서 보아라” 하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무엇을 보고 어떤 체험을 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인류가 그토록 애타게 찾고 있는 메시아를 만났다는(41절) 제자들의 고백이다!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들>

-양승국신부-

잘 나가던 전성기 시절, 세례자 요한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를 통해 요한은 범국민적인 쇄신운동, 회개 운동을 전개했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요한이 주도한 자정운동에 기꺼이 동참했습니다. 후에는 예수님조차도 요한을 찾아오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드디어 예수님의 때가 도래합니다. 예수님께서 서서히 구원사 무대의 전면으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간 세례자 요한에게 집중되었던 사람들의 이목은 이제 예수님께로 쏠리기 시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조금씩 쇠락해가는 스승의 기운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은근히 심기가 불편해졌습니다.

사람들이 이제 다들 예수님께로 몰려가고 있는 반면, 그 동안 스승 요한을 향해 구름처럼 몰려오던 사람들의 수효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끓어오르는 질투심과 시기심을 잠재울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스승 요한은 미동도 꼼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오늘 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나마 남아있던 요한의 두 핵심 제자마저 자신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단에 편입됩니다.

제자들이 떠났다기보다 오히려 요한이 제자들을 떠나보냅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그분을 따라가게 놔둡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동안 잘 양성시킨 제자들, 떠나보내자니 아쉬움도 컸겠습니다. 섭섭함도 많았겠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얼마나 배포가 큰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그릇이 큰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이 언제까지나 자신에게 종속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스승인 자신을 뛰어넘도록, 스승인 자신을 딛고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배려합니다. 자신보다 더 큰 스승이 나타나자 제자들을 향해 저분을 따라가라고 지시합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참 스승, 큰 스승의 면모를 봅니다.


한 명 한 명 떠나가는 제자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 순간에 등을 돌리고 마는 군중들, 급격히 쇠락하는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던 세례자 요한의 심정은 꽤 쓸쓸하고 허전했겠습니다.

한때 잘 나가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세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핵심제자들마저 속속 예수님의 제자단으로 편입됩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존재 의의가 급격히 쇠락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속수무책인 스승의 태도를 보고 크게 실망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을 향해 따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분에게 몰려가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냥 보고만 계실 것입니까?”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그간 자신이 주인공이었지만 이제 자신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무대가 열렸다. 새로운 무대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 나날이 성장하도록 매일 저는 죽어갑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라면, 이 내 한 몸 어떻게 되어도 좋습니다.”




와서 보아라(요한1,35-42)

-유 광수신부-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랍비,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번역하며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 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두 제자를 보시고"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셨다.
인생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고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찾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에게 찾는 것이 없다면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죽은 인간만이 찾지 않는다. 찾는다는 것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찾고 배고픈 사람은 먹을 것을 찾고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은 사랑해줄 사람을 찾는다. 인간은 찾고, 찾은 것을 얻고, 기뻐하고 또 싫증을 느끼고 그래서 또 다른 사람을 다른 것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고 있다. 언제 인간의 이 방황이 멈추게 되는가? 인간의 영원한 욕망을 채워줄 하느님을 만날 때까지이다. 왜 그렇게 하느님을 찾는가? 하느님을 찾았을 때 비로소 인간이 안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인간은 하느님을 찾는가? 인간은 하느님한테 왔기 때문이다. 마치 연어가 죽을 때에는 자기가 태어났던 곳을 다시 찾아가듯이 하느님한테서 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이것을 귀소본능이라고 한다. 하느님을 찾고 있는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기까지 걸어가야할 여정이 영성생활이다. 일단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더 이상 찾아 나서지 않고 안식과 기쁨 충만함을 느끼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즉 찾아 헤메는 방황이 멈추어지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라고 한 것처럼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럼, 어디에서 찾아야 이런 기쁨과 충만함을 누리며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의 불행은 그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하는지를 모르고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는 데에서 절망과 방황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을 찾아 나선 이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와서 보아라"고. 즉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하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우리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예수님은 "와서 즉 당신에게로 오라"고 초대하신다. 우리가 찾아야할 곳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오늘 우리에게서 예수님은 말씀이다. 즉 우리가 찾아야할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에서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이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라고 말한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말씀"에서 행복을 찾으려하지 않고, 하느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찾고자 하는 해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여기 저기 다니고 무엇을 보라 가고, 누구를 만나려 가고, 이리 저리 찾아 헤맨다.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해답을 찾느냐고 얼마나 많은 시간, 돈, 정력 등을 소모하는가? 그래서 지치고 피곤하고 시간에 쫓기고 늘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사람은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찾아지는 것도 달라진다. 늘 돈을 찾는 사람은 결국 돈은 찾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차지 못한다. 권력을 찾는 사람은 마침내 어떻게 해서라도 권력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얻지 못한다. 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그럼 신앙인은 이 세상의 것을 전혀 찾지 말라는 말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것들도 필요하다. 다만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데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또는 하느님을 찾는데 하나의 수단이지 목표는 아니다. 수단과 목표를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것을 찾기 위해서 하느님을 포기해서도 안되고 하느님을 찾아 나선다고 해서 이 세상의 것을 전혀 도외시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도 있고 하느님을 위해서 일할 수도 있다. 다만 하느님을 찾는 것을 소홀히 하면서 오로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영원한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고 거기에만 매달리거나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영성생활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더 나은 것을 지향해야하고 더 나은 것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하위 것을 얻기 위해 상위 것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100원을 벌기 위해서 1000원을 버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듯이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해 영원한 행복을 주는 하느님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또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을 찾으려면 "와서 보아라"고 하셨듯이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로 가서 보아야 한다. 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로 가야 한다. 예수님께로 간다는 것은 말씀에로 간다는 것이요, "와서 보아라"는 것은 그 말씀을 통하여 보여 주는 세계를 보라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 "보다"라는 말은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가면 영화관만 보고 오는 것이 아니라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는 것이요, 감상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를 보고 느낀 것이 있고, 깨달은 것이 있고, 감동이 전달된다. 이처럼 "보다"는 말은 말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는 것이요 그 안에서 하느님이 펼쳐보여 주시는 세계를, 가치를 보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하여 두 제자가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 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라고 예수님과 함께 묵으면서 느꼈던 감동의 순간을 "오후 네 시쯤"이라고 기억하였듯이 우리도 보고 느끼고 감동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이 "보다"는 것은 그사람의 마음 속까지를 들여다 보고 그 사람의 마음상태까지를 아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다"라는 것은 단순히 겉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무한한 세계를 보는 것이요,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요, 복음을 통해서 보고 깨닫고 느낀 그런 눈으로 보고, 그런 느낌으로 느끼고, 그런 가치관으로 살아가면서 다시 나를 보고 이웃을 보고 이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본다"는 것은 똑같은 사건이나 세상과 사람을 보더라도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눈으로 보고 다른 가치관으로 보고 다른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매 순간은 똑같은 순간이 아니라 늘 새로운 순간이며 새 하늘 새 땅으로 다가 올 곳이다. 그래서 더 이상 행복을 찾아 헤매지 않고 하느님이 펼쳐 보여 주시는 새로운 세계를 감상하고 즐기며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 것이다.



 
와서 보아라

 반영억신부

한국의 정치상황을 보면 잘 난 사람은 많은데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없고 스스로 스승을 자처하는 이들이 넘쳐 나서 문제입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삶은 없고 입술만 살아 움직이니 앞날이 밝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야당에서는 이해관계가 얽혀 계파싸움이 치열한 것 같습니다. 쇄신을 부르짖으면서도 밥그릇 싸움이 여전한 것을 보면 희망이 절벽입니다. 새 정부에서는 약속을 잘 지키고, 백성을 진심으로 위하여 모두가 행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교구내 사회복지기관 시무식이 있었습니다. 총대리 신부께서는 기관에서 일하는 모든 이에게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2013년에도 감사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더 나은 한 해를 만들기 위한 희망을 간직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 희망은 도덕적으로 어긋나지 않고 현실과도 동떨어지지 않은 희망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원대한 희망을 간직한다고 해도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면 정당성을 잃게 됩니다. 또한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면 허황되고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감사의 삶을 사는 사람은 문제해결의 방법을 찾게 되고, 감사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핑계거리를 찾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현실에 감사하며 큰 희망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생각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고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뒤에 오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었는데 마침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37)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라삐(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고 그날 그들과 함께 묵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본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 발버둥치는 세상이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소위 자기 줄을 고집하지 않고 기꺼이 더 크신 분에게 제자들을 떠나보내는 태도가 돋보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최고라고 부르짖는데 요한은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하였고 결국 그분에게 스승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드렸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는 것이 요한의 진심이었습니다. 요한은 자기의 몫, 자기의 자리를 확실히 알고 행동했습니다. 요한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와서 보아라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준비된 삶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와서 보아라 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저의 삶이 이러니 여러분도 제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십시오.’하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피2,15)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 믿음은 허상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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