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1일 월요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 1,1-18)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거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적들’이라고 한다. 우리는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분께 속하지 않는 자들이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말씀은 사람들을 비추어 주는 빛이다. 하느님께서는 참빛이신 아드님을 보내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맞아들이지도, 알아보지도 못하였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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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적’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진리이신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제1독서). 요한복음의 서두는 말씀이신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구원의 역사를 요약하고 완성시킨다. 곧 역사의 예수님과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은 태초부터 함께 계셨던 분으로 하느님과 동일하신 분이심을 증언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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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프랑스의 알퐁소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단편 소설이 생각납니다. 주인공 프란츠는 그날도 아침 늦게까지 학교에 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국어 문법 공부를 소홀히 해서 선생님에게 혼날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프란츠는 생각을 바꾸어 뒤늦게 교실에 들어갑니다. 프란츠는 이 수업이 프랑스 말로 하는 마지막 수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프란츠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습니다. “프란츠야, 난 너를 탓하지 않아. 넌 충분히 뉘우치고 있을 테니까.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시간은 많으니까 내일 하지 뭐.’ 하고 미루길 좋아하지. 하지만 너만의 잘못은 아니야. 우리 모두 잘못한 것이 많으니까.”
우리는 시간이 지나가 버린 뒤에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과 맡겨 주신 일들에 성실하게 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한 해의 끝자락에 와서 깨닫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만난 사람들 모두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불성실과 게으름으로 잃어버린 시간은 주님께서 다시 숙제로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상처에 새살이 돋듯이 부끄러운 지난 삶 위에 하느님께서는 새롭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하느님의 손길이 아니 닿은 곳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내 등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탈출 33,2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해 동안 지나온 많은 날을 생각해 봅니다. 힘들고 지친 나머지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원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께서 지나가셨을 때 뒷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듯이, 지나 보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 점을 깨우치도록 하느님께서는 오늘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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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원로 조각가 최종태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켈란젤로 작품에 미완성이 많은 게 이해가 돼요. 예술 작품에 완성이란 없는 겁니다. 다만 어느 시점에서 작업을 멈출 따름이지요.” “더는 손댈 수 없다고 느껴지는 시점이 있어요. 영감이기도 하고 욕심을 버리는 때이기도 하지요. 그런 점에서 보면 미완성이 곧 완성이지요.”
원로 조각가의 표현처럼 예술이라는 것이 완성이 없는 미완성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미완성은 아직 못 다한 말이 있고, 못 다한 표현이 있어, 들리지 않는 언어와 보이지 않는 형상을 더 채워야 할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는 뜻입니다. 작가가 더 채워야 하지만 더 채울 수 없고, 더 표현해야 하지만 더 표현할 수 없는 그 자리는 어쩌면 인간의 한계를 넘는 신의 영역으로 남아 있기에 미완성은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누군가 우리 인생도 예술이라고 했지요. 예술가가 미완성의 작품을 두고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합니다.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해지고 싶지만 늘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마지막 날까지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이 모양으로 주님께 갈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생을 예술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미완성의 삶을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살고 싶지만 살지 못하고, 이루고 싶지만 이루지 못한 우리 인생의 미완성의 자리는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자리입니다. 약함과 결점, 결핍, 한계를 가진 가장 불완전한 우리를 ‘가장 완전하신 분’께서 채워 주십니다. 못나고 죄스러운 삶을 살아도 여전히 우리 인생이 예술이고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한 처음 ‘흙의 먼지’로 우리를 만드신 말씀이신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어 창조 때 그 본래의 완성된 모습으로 채워 주십니다. 우리의 미완성은 그분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완성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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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대로, 주님의 허락 없이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이 말씀은 더욱 실감납니다. 많은 사건을 겪었습니다. 위험한 순간도 많았고, 어려운 고비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를 가만히 돌아보면 ‘분명 은총이었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지나고 나면 쉽게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한 해를 보내는 길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빛에 비유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영성체를 하면서 그때마다 빛이신 그분을 모셨습니다. 올 한 해 얼마만큼 빛의 생활을 했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어둠을 없애는 것은 빛뿐입니다. 삶이 어둡다면 빛의 생활을 하면 됩니다. 생활 속의 어두움은 빛이 들어오면 저절로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빛의 생활은 밝은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그러니 긍정적인 생각과 따듯한 말로 먼저 가족과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사랑은 가까운 데서 시작해도 금방 큰 힘으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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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모님께서는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아 사흘이나 헤매고 다니셨습니다.
성모님께서 마침내 예수님을 찾으셨을 때, 자식을 무사히 찾아 안도하시면서도
예수님의 행동을 나무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에 성모님의 마음은 편치 않으셨을 것이며,
성모님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게 될 것이라는 시메온의 예언(루카 2,34-35)이 점점 실현되고 있음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순간부터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의 아들의 주검을 부둥켜안고 통곡
하실 때까지 주님을 위해 자신의 온 생애를 칼에 꿰찔리는 아픔으로 봉헌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생명, 그리고 빛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한 해의 끝자락에 왔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큰 은총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기쁘면 기쁜 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내 감정의 기복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지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며 당신의 품에 머물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좋아서 호들갑 떨 것도, 좋지 않아서 실망할 것도 없는 주님의 품을 내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대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 싶게 속이 보이도록 웃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좀 더 진중하게 주님의 마음을 읽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한 해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감사하고 내일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쁨에 목말라 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사가는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3-5) 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빛인 생명이 주어졌지만 어둠에 가리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느님의 계명을 사는 것이 생명이건만 그 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요한1,10-11). 그러나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요한1,12).
따라서 빛을 받아들이는 눈,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그 생명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야 영적인 그분의 생명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은 이 세상의 삶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허락된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서 보내는 몇 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성 세실리아).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생명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이, 하느님의 법칙이, 하느님의 뜻이 삶 안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생명은 곧 빛입니다. 생명의 빛이 우리 모두를 비추도록 은총을 갈구하는 오늘이기를 빕니다. 한 해를 감사하고 새해를 주님의 이름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福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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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일도 많고, 탈도 많았던〔多事多難〕 2010년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오늘 각 성당에서는 송년 미사를 봉헌할 것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는 한 해, 마지막, 송년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분께는 언제나 ‘오늘, 지금 그리고 여기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이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설정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그분의 말씀, 생명,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고, 그분께 속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분께 감사드릴 수 있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과 생명과 빛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진리에 속한 사람, 그분께 속한 사람이 됩니다.
한 해를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또 얼마나 자주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리 자신을 내세웠는지요? 세상의 권력이나 명예, 금전 따위에 대한 욕심은 주님을 등지고 우상 숭배에 빠졌다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그 어리석은 욕심으로 생명을 경시하고, 환경을 파괴하며, 권력자들과 부자들에게 빌붙어서 얼마나 많이, 또 얼마나 자주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는지 모릅니다.
이제 한 해를 보내면서 다시는 그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진리, 정의, 평화, 사랑, 생명, 구원이신 분의 뜻에 따라 살기를 결심해야 합니다. 지금 이 땅은 날이 갈수록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혼탁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주님의 참된 자녀로서 마땅히 선포해야 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새로운 용기와 지혜를 주십사고 청원드립시다. 올 한 해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합시다.
새해에도 형제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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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벤허’는 1959년 작품으로 예수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벤허는 예루살렘의 부호입니다. 새 총독과 로마 주둔군 사령관이 행군하는 날, 묘하게도 벤허의 집에서 기와 한 장이 떨어져 나가 총독의 머리를 맞힙니다. 이 돌발 사건으로 벤허 일가는 반역죄로 몰리고, 벤허는 노예선의 노예로 끌려갑니다.
그런데 주둔군 사령관 ‘멧살라’는 벤허가 어렸을 때의 친구입니다. 그는 벤허 일가의 억울함을 알았지만, 권력에 취해 모른 척합니다. 하지만 운명은 벤허를 도와줍니다. 노예선이 해적과 싸울 때, 벤허는 선장의 도움으로 전투에 참가합니다. 이후 선장을 구해 주었고, 그 인연으로 그의 양자가 되어 자유를 되찾습니다.
영화의 후반부는 벤허의 복수입니다. 전차 경주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됩니다. 하지만 당당하던 멧살라의 몰락을 보면서, 벤허는 인생의 짙은 허무를 느낍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진정으로 이기는 길은 ‘용서와 사랑’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올해에도 우리에게는 억울한 일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모두 내려놓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해야겠습니다. 그것이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분을 따르면 모르는 새에 ‘밝은 기운’이 찾아듭니다. ‘감사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리하여 거침없이 ‘빛의 길’을 걸어가게 합니다. 전능하신 주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