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 (루가 1,39-45)

2012. 12. 21. 오전 7:39:33

글자

2012년 12월 21일 대림 제4주간 금요일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말씀의 초대
아가는 하느님을 연인으로 묘사하며, 그 연인이 자신의 창가에서 봄이 왔음을 알려 준다. 이는 주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제1독서). 마리아는 길을 떠나,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엘리사벳의 집으로 간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에 사로잡혀 마리아에게 축복의 말을 전한다(복음).

☆☆☆

아가는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이다. 삭막한 겨울 같은 기간이 지난 다음, 남자는 봄처럼 싱그러운 사랑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면서 사랑하는 연인을 찾아 나선다. 인류를 찾아 나서시는 열정적인 하느님의 사랑이시다(제1독서). 마리아께서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신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칭송하면서, 태 안의 아기도 메시아를 알아보고 즐거워 뛰논다고 외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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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는 어려움이나 고통은 되도록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다른 이에게 드러내는 것은 약한 모습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고통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힘든 일이나 고통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줍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려고 할 때 외로움과 슬픔은 더욱 깊어집니다.
고통이나 슬픔, 병이나 약함은 혼자만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아닙니다. 고통이나 약함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고통이나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 인’(人)이라는 한자를 풀이해 보면, 두 사람이 기대어 있는 모습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기대어 살고,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고독한 섬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사는 존재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유다 산골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십니다. 두 여인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이해하기 힘든 일을 이야기하며 서로 위로하는 가운데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하면서 자신들의 어깨에 지워진 짐의 무게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두 여인은 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촌 간의 우애로운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렇게 두 여인은 유다 산골에서 서로 용기를 주며 구세사의 꿈을 키워 갔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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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기쁨에 넘쳐 찬미합니다. 그 노래는 주님의 어머니와 아드님을 칭송하고 찬미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우리가 묵주 기도를 바칠 때마다 드리는 ‘성모송’은 바로 엘리사벳이 불러 드렸던 찬미의 노래입니다.
‘아가’에서는 연인이 서로 뼈에 사무치는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래는 애절하기도 하고, 환희와 희망이 샘솟기도 합니다. “바위 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예수 성탄 대축일이 가까워질수록 왠지 마음이 자꾸만 설렙니다. 오실 주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사무쳐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럴 때 ‘아가’의 주인공들처럼,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처럼 주님과 그분의 어머니께 아름다운 찬미의 노래 한 자락 불러 드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번 성탄에는 기쁨과 희망에 찬 환희의 노래를 마음 가득히 담아, 그분과 그분의 어머니께 불러 드리는 용기를 가져 봅시다. 우리가 불러 드리는 찬미의 노래는 그분께 드리는 그 어떤 예물보다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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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벳은 즈카르야 사제의 아내입니다. 젊은 나이였을 때는 아이를 주시길 수도 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지 않으셨습니다. 여인들의 임신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끼며 살았을 것입니다. 후배 사제의 아내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는 열등의식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포기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은 벙어리가 되어 돌아옵니다. 아들을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의심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토록 달라고 했을 때는 침묵하시더니, 이제야 주시려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있었기에, 복잡한 마음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가능성이 끝난 뒤에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기적임을 철저하게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젊은 시절에 아이를 주셨더라면 당연하게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기적의 아이라 해도 지금처럼 감동으로 다가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엉뚱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랬더라면 세례자 요한은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열심히 신앙의 길을 가는 이들도 때로는 사람의 능력을 과신합니다. 기적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작은 가능성만 있어도 주님의 힘으로 보지 않으려 합니다.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르야를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방문을 온몸으로 환영합니다. 참으로 기뻤을 것입니다. 두 분의 공통점은 기적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분명히 다릅니다. 자신의 운명이 바뀐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생명을 잉태했으니, 그 삶은 더욱 신비스러웠을 겁니다.
사실 모든 어머니는 기적을 체험한 여인입니다. 아기를 가진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잉태하는 것만큼 위대한 일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임신을 하면 몸의 모든 병이 낫는다고도 합니다. 그만큼 주님께서는 정성으로 대해 주시는 겁니다. 이러한 주님을 모르고 있었다면 이제는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은 생명을 가볍게 보려 합니다. 물질에 너무 큰 기대를 걸기 때문입니다. 모든 질병도 결국은 과학이 극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돈과 재물만 있다면 행복한 노후가 보장될 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은 착각입니다. 건강한 미래는 주님께서 주셔야 가능한 것이지, 인간이 저장했다가 꺼내는 물건이 아닙니다.
엘리사벳은 구세주의 어머니를 한눈에 알아봅니다. 그녀에게는 주님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능력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을 밝게 보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행복한 노년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믿으신 분>(루가 1, 39-45)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대표적인 믿음의 두 여인의 만남을 본다.
두 여인은 만나서 무슨 대화를 하였는가?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통해서 알게 된 주님의 계획을 받아들인 후 급히 서두러 유다 산골에 있는 사촌 언니를 찾아갔다. 그런데 엘리사벳의 집에 들어갔을 때 그녀가 먼저 마리아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아보고 축하의 인사를 하였다.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 통하는 것이 있다.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표정만 보아도 그리고 무슨 말을 한 마디만 하여도 상대방은 즉시 알아본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고 술 술 이야기가 나오고 또 서로 통하니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참으로 기쁘다. 그래서 자주 만나게 되고 만나서 이야기 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리고 꼭 만나지 않아도 멀리 떨어져 살아도 늘 함께 있는 것 같이 느껴지고 그래서 만나면 더욱 더 기뻐진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로 엘리사벳의 이야기만 들을 수 있지만 그 다음에 이어서 이어지는 말씀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듣고 마리아의 답가인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갓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으로 가득 차"서 외치고 있는 영적인 소리이다. 그들이 주고 받은 이야기의 내용들은 모두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주님께서 자기들 안에 이루신 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엘리사벳은 엘리사벳 안에서 주님이 이루신 일들을 그리고 마리아는 마리아 안에서 이루신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한다.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고 오직 자기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사건들 그리고 함께 공감대를 느끼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내용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억지로 만들어 낸 이야기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아닌 오직 자기들만이 느끼고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며 말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이들이 나눈 대화를 영적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이야기는 영적으로 생활하는 사람들끼리만 이해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영적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 기쁨을 나눌 수 없다.

 

오늘 날 우리들에게는 이런 영적 이야기를 나눌 사람들이 필요하다. 만났다 하면 남을 흉보는 이야기나 세상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생활 안에서 체험된 주님에 관한 이야기들 즉 영적으로 일어난 일들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상대자가 필요하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런 영적 대화를 나눌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아니 영적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비웃고 알아듣지 못한다. 왜 그럴까? 영적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하신 일들이 많이 있으면서도 믿음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이라는 의식이 없다. 모든 것을 내가 했고 내가 잘 나서 한 것이지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신 일들이 하나도 없다. 전혀 영적인 체험이 없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기쁘지도 않고 신앙에 대해 할 말도 없다.

 

영적인 대화에도 다양한 수준이 있다.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에 따라서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내용과 질이 다양할 것이다. 자기 수준에 맞는 영적 대화자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이 세상에 진실한 친구가 한 두 사람이라도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다. 이 말은 친구는 많아도 자기의 속 마음까지 다 털어 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는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하물며 자기 수준에 맞는 영적인 파트너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만일 그런 영적 대화자를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영적 체험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생활해야 한다. 믿음의 이야기인데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말씀에 대한 체험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영적 체험을 하려면 무엇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워지리라는" 말씀이 있어야 한다.

 

내 안에서 이루워 지리라고 믿고 있는 말씀이 무엇인가?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보라. 이제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었고, 엘리사벳은 천사가 즈가리야를 통해서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는 말씀을 믿었다.

 

영적인 대화는 어떤 신비스런 체험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이해 못하고 상대방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나누어야할 영적인 이야기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내가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지, 말씀대로 생활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을 묵상하고 생활하면서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등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 안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난 일들을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고 믿고 있는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주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믿는 말씀을 통하여 내 안에서 주님께서 역사하고 계신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도 아니고 외부에서 오는 기쁨도 아니다. 오직 믿음을 통하여 내 안에서 느껴지고 보게 되고 듣게 되는 주님의 역사 하심에서 오는 기쁨이다. 이런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 주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은 우리에게 주님의 역사 하심을 체험하게 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행복하십니까?

-허영엽 신부-


거리에서 일을 하는 청소부가 있었다. 그 사람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마치 자기 집 마당을 치우듯 거리에서 열심히 일했다. 궂은일을 성실하게 하는 그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다. “일하시는 게 참 행복해 보이십니다. 이렇게 어렵고 궂은일에 만족하십니까?” 그러자 청소부가 말했다. “전에는 제 일에 대해서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늘 불만이었지요. 그러나 저는 큰 병을 앓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면서 세상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삶은 그대로이지만 저의 생각과 마음이 완전하게 바뀌었습니다. 제가 하는 청소일이 더러운 지구의 한구석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 일에 큰 보람과 행복을 느낍니다. 저의 마음을 이렇게 바꿔주신 분은 하느님이라고 확신합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는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행복했을까? 아니 그와 반대였을 것이다. 아기를 잉태한 처녀 마리아의 운명은 끔찍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은 어린 처녀 마리아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것이었다. 그때 마리아는 사촌 엘리사벳이 생각났다. 마리아는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된 엘리사벳을 찾아갔다.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마리아는 엘리사벳만이 자신의 고통을 공감해 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만나자 성령에 가득 차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행복하다니? 마리아는 처음에 엘리사벳의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점점 하느님의 손안에 자신을 맡겼다. 바로 이것이 신앙행위다. 그래서 성령께서 마리아의 마음을 차지하시고 그의 마음은 하느님의 뜻대로 변화되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 되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저희의 약한 마음도 성령의 은혜로 견고하게 해주시고 늘 우리 곁에 계셔주세요. 아멘.’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 1,39-45

행복하십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제18대 대선에서 64년 헌정사상 첫 여성대통령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당선자는 국민대통합을 이루는 대통령,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 국민행복을 이루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꼭 이루기를 희망하고 기도합니다.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마냥 행복할까요? 지금은 큰 행복을 누릴 수도 있겠지만 행복은 권력을 차지했다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 누린다 해도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추구하는 방법과 구체적으로 느끼는 형태가 다양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만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유하는 것에서, 어떤 이는 지배하는 것에서, 어떤 사람은 베푸는 사랑에서 만족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11장 27-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결국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세상에서 행복을 찾지만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행복이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실행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재물도 명예도 얻었고 좋은 집에 좋은 차를 가지고 있으며 귀한 자녀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학생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해도 거기에서 행복이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어도,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고 할지라도 때가되면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인생 여정에 있어서 예기치 않는 많은 일들을 접하게 되고 그 안에서 이유도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또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성공과 실패 안에서도 그분이 역사하시고 섭리해 주심을 알기에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알맞은 종류의 행복을 주십니다. 시련과 고난을 겪기 전이나 겪는 중이나 혹은 겪고 난 뒤에 반드시 주십니다.(성 알로이시오 슈월츠)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의 것을 추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행복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가슴 설레는 여행길>

 

 

    반가운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이 저녁에 잡혀있다면 오후부터 마음이 설렐 것입니다. 혹시나 늦지나 않을까 서둘러 길을 나설 것입니다.

 

    미치도록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하러 갈 때 조금이라도 빨리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왜 이리 길이 막히나, 왜 이리 시간이 더디 가는가, 하는 조바심이 나기도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의 발걸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리아 입장에서 이 위대한 사건을 조금이라도 빨리 지혜롭고 경륜이 풍부한 사촌 엘리사벳에게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징표를 엘리사벳을 통해 확인하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서둘러’ 길을 떠났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진의를 파악하고, 그분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일에 있어 게을러도 미적미적 마지못해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까지의 여행은 아직 앳된 청소년이었던 마리아에게 보통 어려운 여행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할 상황이었기에 사흘이나 되는 여행길을 홀로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려는 열망으로 가득했던 마리아였기에 용감히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조금은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때로 막막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조금이라도 빨리 그분의 뜻을 확인하고 싶었던 마리아였기에 기쁘고 관대한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윽고 엘리사벳의 집에 도착한 마리아가 인사를 하니 그 인사말을 들은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가 뛰놀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이 외침은 오늘날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차례, 수백 차례씩 암송하고 있는 성모송의 둘째 부분입니다.

 

    성모송의 첫째 부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는 하느님의 천사가 마리아를 향해 외친 말입니다.

 

    그리고 성모송의 둘째 부분은 이스라엘, 더 나아가 인류 전체를 대신한 엘리사벳이 놀라 경탄한 말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그리고 성모송의 마지막 부분은 죄인인 인간들의 필요에 따라 교회가 첨가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렇게 성모송은 아주 짧고 간단한 기도문이지만 구약을 상징하는 엘리사벳이 신약을 상징하는 마리아와 연결되는 매우 아름답고 심오한 기도입니다. 신약과 구약은 이 성모송 안에서 수렴되고 조화를 이룹니다.

 

    마침내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확신에 찬 믿음을 칭송하는 말로 환영의 인사를 마무리 짓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놀라운 하느님의 업적,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 앞에 우리 인간들의 의혹과 불신은 컸지만 마리아의 믿음은 찬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구원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하느님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인간 측의 진심어린 동의와 기여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인간 측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인간 측의 협력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번 해보지요.’ 라며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위가 뒤따라야 합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전인적(全人的)인 동의와 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루가 1,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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