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9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루카 7,18ㄴ-23)

말씀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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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만드시고, 행복과 불행을 일으키신다. 이슬과 비도 그분의 창조물이다. 만물은 그분 안에서 움직이며 살아간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주님만 믿고 의지해야 한다. 그러면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답변을 기다린다. 메시아로 오신 분의 음성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지난날의 기적을 알려 주신다. 눈먼 이들을 눈 뜨게 하시고, 병든 이들을 낫게 하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일이다. 하늘의 힘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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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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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세례자 요한의 질문입니다.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의 응답을 청한 것입니다. 그분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확신을 주시라는 청원입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기적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듯 우리는 하늘의 힘을 지니신 분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오시어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아픈 곳을 ‘낫게’ 하시며, 가난한 마음을 ‘풍요롭게’ 해 주실 분이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힘을 못 느끼고 있다면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강렬한 원의가 없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애절한 마음이 아니면 ‘대충 바치는’ 기도가 됩니다. 정성을 갖추지 못하면 ‘구경하는 미사’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악한 기운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병약한 영혼을 살려 낼 수 없습니다. 축복은 언제라도 ‘간절한 마음’과 함께합니다. 복음의 세례자 요한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청해야겠습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사건과 만남’을 통해 당신의 답변을 들려주십니다.
임신을 할 수 없는 여인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녀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사실을 남편에게 말하였다. 그녀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삼손이라 하였다(제1독서). 즈카르야는 일생 아이를 바랐지만 늙도록 자식이 없었다.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그가 아들을 얻을 것이니,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명한다(복음).
필리핀의 마닐라 시내 한복판에는 커다란 성(城)이 하나 있습니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지배하던 시절, 스페인 군대는 성벽을 쌓고 그 안에 작은 도시를 만들어 식민지 통치자들과 군대를 거주하게 했습니다. 성안에는 요새가 있는데, 그곳은 스페인 군대의 본부가 있던 곳이자, 필리핀의 국민적 영웅 호세 리잘이 감옥에 갇혔다가 처형된 곳입니다. 독립운동가인 리잘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35세에 처형되고 맙니다. 필리핀에서는 그가 처형된 날을 국경일로 정하여 조국을 사랑한 그의 애국심을 기리고 있습니다.
리잘이 처형되기 전날, 그는 조국을 위해 유서 같은 긴 시를 썼는데, ‘마지막 인사’(Mi ultimo adios)입니다. 다음은 감옥 벽에 적혀 있는 그 시의 일부입니다.
잘 있거라,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여./ 나의 이 슬프고 암울한 인생을/ 기꺼이 너를 위해 바치리니/ 더욱 빛나고, 더욱 신선하고, 더욱 꽃핀 세월이 오도록/ 이 한목숨 바치리다.
저는 이 시가 적힌 벽 앞에서 한참 동안 깊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무릇 한 나라의 지도자란, 조국을 위하여 자신의 최후의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태우는 사람이어야 하는구나!’
오늘은 우리나라의 최고 지도자를 뽑는 날입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지도자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그 기대에 대한 결과는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 루카 1,5-25
구름만 많고 비는 내리지 않는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오늘은 한국의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참정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누구일까를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투표에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투표한 후에는 서로의 갈라진 마음이 오래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 뽑히든 그렇지 않든 결과를 인정하면서 백성을 위한 지도자의 몫을 잘할 수 있도록 기도해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자벳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계명과 규율을 어김없이 지키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어쩌다가 성전에서 봉사할 기회를 갖곤 하였습니다. 마침 즈카르야가 제비에 뽑혀 성전에 들어가 분향을 드리고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제단 오른쪽에 섰습니다.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1,13-14)
그러나 즈카르야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도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받게 될 이름,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천사의 말을 의심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눈에 보이는 표징을 구했습니다. 결국 즈카르야는 이 불신 때문에 천사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벙어리가 되어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된 것이 곧 하느님께서 개입하셨다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즈카리야의 의심, 그리고 유다인들이 표징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구원의 다가옴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불신 따위에 구애 받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조건 없이 그리고 끝없이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말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담지 못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역사에는 인간의 자발적인 협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간은 이미 자유의지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시는 구원이나 멸망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의심함으로써 은총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니 그 자체가 멸망이 되고,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근원이 됩니다.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요한20,29)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어 한 주간의 사제직무를 끝내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꼭 지키시는 분이라는 확실한 표징을 간직한 채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게 되었고 그가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일을 해 주셨구나”(루카1,25).
즈카르야에게 말씀을 꼭 지키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주신 분, 엘리사벳에게 주님께서 굽어보셨다는 믿음과 감사를 고백하게 하신 분, 그분께서 우리에게도 구원을 약속해 주시고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혹 ‘밀운불우’(=하늘에 구름만 빽빽하게 끼어 있을 뿐 비가 되어 내리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여건이 조성되어 징조는 나타나지만 일이 성사되지 않아 답답하고 불만이 폭발할 것 같은 상황을 비유한 말입니다.)일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은총의 비를 기다려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은총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깨어 있는 오늘 이기를 바랍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제게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의 진리 위를 걷게 하시고 저를 가르치소서. 당신께서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니 날마다 당신께 바랍니다.”(시편25,4-5)
사랑합니다.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고목에 핀 꽃 한 송이>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참으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이승을 하직할고령의 나이였기에, 이젠 하느님 앞에서 지난 삶을 정리해야 할 노년기였기에 자식이 생길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포기했어도 벌써 오래전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이 나이에 무슨’ 하며 기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까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신뢰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육신은 세월의 흐름 앞에 어쩔 수 없이 노쇠해졌지만, 그들의 영혼과 신앙은 어린이들처럼 맑고 투명했습니다.
언제나 자녀다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갔습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인생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뜻하시는 바가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 하느님께서는 자신들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실것이라고 열렬히 믿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간절한 바람을 하느님께서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고,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라는 고목에서 새하얀 꽃 한 송이를 피어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이젠 인생이 다 끝났다고 여긴 두 노인을 통해 주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역사의 한 장을 새로이 쓰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