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5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요한 1,43-51)
말씀의 초대
살아간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사랑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다. 사랑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필수 조건이다. 요한은 생명과 사랑의 이러한 관계를 신앙 안에서 설명한다(제1독서).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특별한 인물이 나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서 진실함을 보았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다. 요한 복음 15장 16절의 말씀처럼, 사실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이미 선택하셨던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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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며 일시적인 감상도 아니다. 사랑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구체적인 것이며,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지방으로 들어가시는 중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네 번째 제자가 될 필립보를 만나시자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하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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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스라엘’은 본래 이사악의 아들 ‘야곱’의 새 이름입니다. 야곱은 ‘속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형 에사우를 두 번이나 크게 속였고, 그로 말미암아 고향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을 때는 세월이 지나 가족과 함께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였는데, 바로 형 에사우를 만나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 떨다가 신비로운 존재와 씨름하게 됩니다. 이 씨름이 새벽까지 끝나지 않자, 신비로운 존재는 야곱에게 그만 싸우자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복을 받기 전까지는 손을 놓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에 그 신비로운 존재는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창세 32,29) 하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비로운 존재는 누구일까요? 누구보다도 먼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과도 겨루었다고 하니, 야곱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형 에사우와 싸운 것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과 싸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거짓된’ 모습이 아니라 가장 정직한 모습으로 자신과, 자신의 형제와, 하느님과 대면하여 씨름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거짓된 ‘야곱’의 삶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 놓고 자신과 주위와 하느님과 대면할 줄 아는 진실한 삶으로 변화된 것을 가리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 말은 나타나엘이 다른 이스라엘 사람과 달리, 또한 야곱과 달리, 철저하게 자신과 주위와 하느님과 정직하게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러한 나타나엘을 예수님께서 알아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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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필립보는 『성경』에 관한 지식이 밝은 사람이었던 만큼 이치를 꼼꼼히 따지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한 성격의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친구인 나타나엘을 만나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나타나엘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명인 바르톨로메오와 같은 인물입니다. 소중한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 친구 사이라고 하는데 필립보와 나타나엘은 우정이 깊은 사이였나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보시자,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한 후 나타나엘 또한 예수님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이렇듯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필립보와 나타나엘은 예수님의 참모습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곧바로 따랐고,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뵙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것은 평소 그들이 『성경』의 참뜻을 탐구하고 묵상하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신앙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맹목적으로 흐르지 않으려면 평소 『성경』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열심히 『성경』을 탐구하고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더욱더 깊이 알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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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승복합니다. 자신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걸 보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셨다는 말에 그렇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지난날을 이야기하셨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표현은 나타나엘의 ‘과거를 이야기하셨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시골에서 무슨 걸출한 인물이 나오겠느냐는 말입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문화 시설이 전무했던 나자렛에서 뛰어난 인물이 나올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로마 문화가 판을 치던 시대에 예루살렘 말고는 그 어디에서도 훌륭한 인물이 나올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어쩌면 나타나엘은 위대한 스승을 찾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읽으셨고, 그의 소년 시절과 앞으로의 꿈을 이야기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는 표현입니다. 그러자 나타나엘은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언어였습니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꿈을 이루어 주실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꿈을 이루어 주실 분이십니다. 그분의 제자로서 제대로 살아가면 우리가 바라는 많은 것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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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나엘의 확신에 찬 신앙고백
-김재호 신부-
찬미예수님!
오늘 하루도 이렇게 하루를 허락해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신학생 시절 학교에서 새벽 일찍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베네디까무스 도미노!! 데오 그라시아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때는 이른 새벽이었고 일어나기가 싫었는데도 그 외침소리에 잠을 깨야 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뭐가 그렇게 감사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품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는 것과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것과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 등....많은 일들이 감사해야 할 것들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학생 시절, ‘하늘이 참 맑고 아름다구나, 꽃들이 너무 아름답구나, 비가 내리는 모습이 아름답구나..’라고 하시는 수녀님을 보고 ‘뭐가 그렇게 아름답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경상도 남자라서 그런지 작은 일 하나하나에 감탄하시는 수녀님의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작은 일 하나에 감격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작은 일 하나를 보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나타나엘”입니다.
나타나엘은 그의 친구 필립보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심지어는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고 하면서 필립보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직접 찾아뵙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단번에 알아보십니다. 이에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작은 체험으로 인해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았던 나타나엘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까지 고백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 있어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예수님께 대한 작은 체험을 통해 신앙을 고백하고 목숨까지도 바치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나타나엘보다 신앙의 선조들보다 더 큰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내 몸 안에 모시는 큰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나오는 나타나엘처럼 기쁨으로 가득차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지 각자 자신에게 물어봐야하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면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늘 불평만을 늘어놓으며 살아가고 있는건 아닌지 한번 반성해보면 좋겠습니다. 올 한해는 정말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만을 의지하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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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나를 아시는 분
-주영길 신부-
창세기가 전하는 창조 이야기 가운데 으뜸은 ‘인간 창조’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창조를 마치시고 마지막으로 당신 모상을 따라 흙으로 사람을 빚어 코에 당신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다(창세 1,26; 2,7 참조).
그래서 고대인들은 인간의 들숨날숨이 하느님과의 보이지 않는 끈이라고 생각했으리라. 하느님과 연결된 우리의 숨결은 불가분의 관계성을 의미한다. 숨이 붙어 있는 한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알고 계시며 이끌어 주신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첫 만남을 전하고 있다. 처음에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증언을 듣고 비아냥거린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1,46) 곧 나자렛 출신 예수가 메시아일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그의 됨됨이를 알고 계셨다. 복음사가는 나타나엘에 대한 선견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시사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잘 알듯이 제자들에 대해서도 잘 아신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신다(2,25 참조).
예수님은 이미 나를 알고 계신다. 그분이 나를 알고 계심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동의어다. 한때 유행가처럼 번지던 복음성가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가 있다. 모 방송에서 지체장애를 가진 이들이 그 노래를 합창하는데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어떤 형태의 삶이나 인생도 주님은 한결같이 아끼고 사랑하신다. 하느님 앞에 무의미한 인생, 쓸모없는 생명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어렵게 세례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자매님이 있었다. 자식을 못 낳아 소박을 맞은 이후 외롭게 살아온 분이었다. 세례식이 끝난 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한 그분의 말씀이 가슴 뭉클했다.
늦게야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고백이리라. 우리도 ‘주님이 나를 알고 내가 주님을 알기에 세상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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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 중에는 본받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 시켜 주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래오래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은 벳사이다인데 필립보도 벳사이다 출신입니다.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 요르단강 하구에 위치하며, 그 지명의 뜻은 ‘어부의 집’, 혹은 ‘고기의 집’입니다. 지명을 미루어 생각하면 그들이 어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만났고 안드레아가 형 시몬에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나타나엘에게 전하였습니다. 나타나엘은 히브리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사실 성경에 의하면 메시아의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미가5,1). 많은 유다인들은 그리스도는 갈릴래아에서 나올 수 없고 베들레헴에서 나야 하며 다윗 후손이어야 한다(요한7,41-42).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 결국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 입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권고에 의해 발길을 옮기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고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이 말씀은 그대가 공부하는 랍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율사들은 올리브나무나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아서 율법서를 공부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타나엘이 율법서를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려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 놀라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요한 1,49). 하고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에 바탕을 두고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창세기 28장12절 이하의 ‘야곱의 꿈 이야기’와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베텔에 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하나의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된다는 것을 약속 하신 것입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계시가 충만하게 나타난 곳이며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쿤등한 반응을 보인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끝까지 인도하는 필립보의 모습을, 또 ‘와서 보시오’ 하고 확신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는 믿음을! 그는 귀한 분을 만났으니 이웃에게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텔의 꿈을 상기해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한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28,16-17)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그곳에 세워 석상으로 삼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는 그곳을 베텔이라고 불렀습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곳에, 하느님의 뜻을 사는 곳에 있습니다.
묵시록 21장 2절 이하를 보면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아름답고 그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밖에서 찾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집으로 알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고달프고 힘든 이 집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