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코 . 6,34-44)

2013. 1. 8. 오전 8:15:31

글자

2013 1 8일 주님 공현 후 화요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르코 . 6,34-44)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은 곧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인간적인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숭고한 사랑을 가리킨다(제1독서).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굶주림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몸소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살펴 주시는 것이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주님께서 군중들의 참목자임을 드러내는[공현] 또 하나의 사건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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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은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온전히 드러났다. 그 사랑을 깨달은 요한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사랑의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할 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제1독서).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예수님을 통하여 체험한 이 충만한 기적은 잊을 수 없는 교회의 기억이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일구어 낸 나눔의 기적은 오늘도 교회의 성체성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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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는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 이러한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사회과의 어느 교수가 학생들에게 빈민가에 사는 청소년 2백 명의 실태를 조사하고 25년 뒤 그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 보고서로 제출하라는 숙제를 냈습니다. 학생들은 빈민가 청소년들이 얼마나 악조건 속에 사는지를 보았고, 그래서 90퍼센트의 청소년들이 감옥살이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25년이 지난 뒤 다른 교수가 이 예측 보고서를 우연히 발견하고서 학생들에게 이 예측 결과가 실제로 얼마나 맞아떨어졌는지 조사하라고 했습니다. 2백 명 가운데 180명의 소재를 파악했으며, 조사 결과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예측과는 달리 네 명뿐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빈민가의 청소년들이 사회적으로 건강하게 살아온 이유를 분석해 보니, 그들의 청소년기에 어느 한 선생님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80명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오르크 선생님’이라는 분을 한결같이 거론한 것입니다. 이에 학생들은 오르크 선생을 찾아보았고, 양로원에 있는 그 선생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은 자신이 그렇게까지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는지 몰랐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아이들을 모두 사랑한 것뿐이라오.”
사랑에는 이러한 힘이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예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 또한 그 사랑의 원천에서 이러한 기적을 열어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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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군중을 바라보는 마음이 서로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분을 따르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군중을 참으로 가엾게 여기십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께서는 허기진 군중을 배불리 먹이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다릅니다. ‘그냥 저들을 돌려보내서 각자가 능력껏 먹을 것을 사 먹도록’ 하자는 것이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군중 가운데에는 빵을 구할 여유가 있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해서 굶어야 할 형편인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처지는 단지 그들의 사정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십니다. 제자들은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볼멘 대답을 합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 나타난 제자들과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세상의 기적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기적은 ‘옹졸하고 고집 센’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적 사건을 마치 하늘에서 빵이 펑펑 쏟아진 마술처럼 이해한다면, 그 기적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옛이야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 기적 사건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체험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놀라운 나눔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빵이 부족해서 지구 저편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처럼 이 핑계 저 핑계로 나눔을 주저하는 우리의 ‘굳게 닫힌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의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차린다면 그 기적은 오늘도 계속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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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 사건은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린이들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화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바구니에 든 빵을 달라는 대로줍니다. 그런데도 빵은 계속 남아 있습니다. 받는 이보다 주는 이들이 더 놀라워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의 음식은 제자들의 마음을 더 많이 흔들었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저희가 그 많은 빵을 마련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 스승님은 기적을 생각하셨지만, 제자들은 불가능을 떠올렸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의 전달자로 제자들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감회가 새로웠을 것입니다
.
빵과 물고기라지만, 먹음직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바짝 마른 간식이었습니다. 배고픈 어른 한 사람이 먹어도 시원찮은분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을 거치니까기적의 음식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혼자만 갖고 있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면 기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시련이든, 축복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분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면, 기적이 되어 우리를 인도합니다.

 

주어라

 반영억 신부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루카6,38)

 누구에게 무엇을 받으려 하기 전에 “주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많은 군중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습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마르6,35-36)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야 된다고 하였지만 주님의 눈에는 그 순간을 최선을 다해 베풀어야할 시간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내 놓기를 바라셨습니다.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적은 것이라도 고마운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고 나누니까 많아졌습니다. 이는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감사하게 나누면 우리 삶의 자리가 기적의 자리가 됩니다. 세계적으로 하루 4만 명씩 굶어서 죽어가는 기아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합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본당은 매월 첫 주일을 자선 주일로 정하고 헌미,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빈첸시오회를 중심으로 50여 가구에 정기적인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 100가구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가구 수를 늘리는 것 보다 욕구에 맞는 도움을 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렇지만 조금 더 큰 나눔을 실천하고자 목표를 세웠습니다. 좋은 결실을 얻을 것으로 확신 합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삶의 자리에서 언제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일상 안에서 계속되기를 희망합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늦은 시간이든, 외딴 곳이든, 다시 말하면 언제, 어떤 장소에 있든 항상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도록 헤쳐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눔으로써 서로 일치시키는 몫을 하라고 일깨워줍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25-27).

물질에 굶주린 사람뿐 아니라 영적인 갈망이 있는 사람, 사랑에 굶주린 사람, 인정받고 싶은 사람,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 마음을 들어줄 상대를 찾는 사람, ......우리가 먹을 것을 주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베푸는 삶, 행동하는 믿음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기적의 원동력, 내 작은 나눔>
-양승국신부-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가장 우세한 특징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풍성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족하거나 모자라고, 궁색하고, 쪼들리고, 그래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세월 고대해왔던 젖과 꿀이 철철 흘러넘치는 곳, 그래서 더 이상 가난도 눈물도, 아쉬움, 불평불만도 없는 그런 곳이 아닐까요?

복음서 여러 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맛’을 살짝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탕자가 귀환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태도를 기억해보십시오. 그 마음이 너무나 넉넉합니다. 그야말로 대자대비하십니다. 하인들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암소도 한 마리 잡습니다. 풍성한 잔치가 벌어집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주린 배를 가득 채웁니다.

예수님께서 첫 기적을 행하셨던 가나의 혼인잔치를 생각해보십시오. 잔치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바로 잔치가 망했다, 파장이 되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궁핍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어서시니 즉시 상황은 반전됩니다. 여섯 개의 큰 돌 항아리에 가득 채워졌던 물이 순식간에 격조 높은 포도주로 변화됩니다. 그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600리터의 포도주입니다. 언젠가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잘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 군중들은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했습니다. 하루만 굶어보십시오. 눈이 핑핑 돌면서 오로지 머릿속은 먹을 것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흘을 굶어보십시오. 아무리 고상한 사람, 박학다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짐승으로 돌변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좋은 말씀이 선포된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다니던 백성들의 구체적인 현실, 쓰라린 뱃속을 외면한 채 말씀만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의 필요성, 그들의 눈물, 그들의 슬픔,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하려는 동질감, 합일감, 일체감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귀여겨들어야 할 메시지의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기적의 첫 출발점은 바로 우리 인간들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풍성함은 바로 우리 인간 측의 미약하고 작은 노력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군중 가운데 있던 한 사람의 작은 나눔(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어떻게 보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 나눔을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시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나눔이 빵의 기적의 원동력이자 구심점, 출발점이자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사랑의 큰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내가 내어놓을 수 있는 작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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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눔의 실천

-류충희 신부-

 

구약 성경에도 오천 명을 먹인 이적사화와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었다는 이적사화(1열왕 17,8-16)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이적사화(2열왕 4,42-44)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 담긴 뜻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엘리야나, 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인 엘리사 예언자도 위대하지만 예수님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는 성만찬례, 곧 미사의 풍요함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41) 말씀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하신 말씀(마르 14,22)과 흡사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되새기며 성만찬례를 지내던 초대교회 교우들은
오천 명을 먹이신 말씀을 대할 때마다 틀림없이 성만찬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할 사람은 바로 교회이며 우리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나눔을 실천할 때 우리 주변에 고통 받는 이들이 없을 것이고 복음 말씀처럼 항상 먹고 남은 것도 열두 광주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이건복 신부-

 

본당신부로 사목할 때, 병자를 방문하러 가다가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울면서 무엇인가를 외치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학생들은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기 당신을 모르고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들도 당신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이들도 천국의 영원한 삶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이들에게도 구원을 주십시오. 이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남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로만칼라를 하고 학생들 옆에 서 있는 저를 사람들이 쳐다보았습니다. 순간 저는 부끄러운 생각에 발길을 돌렸습니다. 저는 길을 걸으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사제로서 쉬고 있는 신자들을 위해, 그리고 예수님을 모르는 비신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또한 큰길가에 서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당신들을 사랑하신다고 소리쳐 본 적이 있는가
?’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방법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에 앞서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사랑을 눈물로 전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저를 사랑하시어 사제로 뽑아 세워 주셨고, 평생을 갚아도 못다 갚을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께 어떠한 삶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고통을 나누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다짐해 봅니다.



지금 배부르십니까?

-주영길 신부-


많은 사람들이 늦은 시간 또 외딴 곳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따라왔다.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제자들의 생각은 현실적이다. 각자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해결하고 오는 방법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어리둥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은 나눔의 실천을 가르쳐 주려고 하신 것이다. 풍족한 가운데 나눔이 아니라 부족한 가운데 나눔의 실천이다.
비만·당뇨·고혈압 등 현대의 많은 질병은 먹지 못해 생긴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이 먹어 탈이 난 것이다. 영양은 포화상태인데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풍족한 먹을거리에도 더 좋은 것을 먹기 위한 웰빙 열풍까지 불고 있다. 그리고 날씬한 몸매를 가꾸기 위한 다이어트 열풍도 한몫 거들고 있다.
언젠가 필리핀에 선교 체험을 다녀온 후배 신부의 말이 생각난다. “오늘날 가난의 문제는 부자가 나누지 않는데 있는 것만이 아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엄격히 차단되어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한 필리핀에서 절실히 느낀 것이라 한다. 부자 동네는 가난한 동네와 엄격히 구별되어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부자 동네는 경비가 철저할 뿐 아니라 울타리까지 쳐 있고 그 안에서 쇼핑과 교육, 여가 생활 모두가 가능했다. 가난이 무엇이고 배고픈 처지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 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종교는 ‘단식’을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교회도 일 년에 두 번,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에 한 끼 단식을 의무화하고 있다. 가장 엄격한 종교는 이슬람교인데, ‘라마단’ 기간에는 낮 동안 물조차 먹지 않는다. 이러한 단식행위는 극기와 보속의 의미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배고픈 이들과의 연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배고픔을 알지 못하는 풍요 속에서 살지만 배고픈 이들의 고통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단식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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