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여라. ( 마태오4,12-17.23-25)

2013. 1. 7. 오전 8:33:43

글자


2013년 1월 7일 주님 공현 후 월요일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 마태오4,12-17.23-25) 

 

말씀의 초대
요한은 공동체 안에 침투한 거짓 예언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도록 이끄는 것을 경계하라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세상보다 하느님에게 속하도록 노력하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요한 세례자의 활동이 끝나자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로 불리는 곳에서 복음 선포를 하심으로써 ‘이방인의 빛으로 계시된 분’[공현]의 역할을 다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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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하느님께 속한 영’과 이의 반대편에 있는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영’으로 구분된다. 하느님께 속한 이들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안에 머무르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온갖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치유하시며, 하느님 나라의 능력을 드러내신다. 이 기쁜 소식은 소외된 이들의 땅,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에서부터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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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갈릴래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갈릴래아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갈릴래아는 식량 자원이 풍부했음에도 그 모든 것을 빼앗기며 살아왔습니다. 로마 제국에 빼앗겼고, 예루살렘에 빼앗겼습니다.
그러면서 갈릴래아는 정치적으로 소외되었고, 종교적으로는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라며 무시당했습니다. 그래서 민초들의 분노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폭동도 많았습니다. 요컨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에도, 도무지 그곳이 ‘약속의 땅’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곳이 바로 갈릴래아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자연 속에 가득하였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를 개시(開始)하십니다. 말로써만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를 통해 물질적인 빈곤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더 큰 자비를 알려 주십니다. 약속의 땅으로 다가오지 않던 갈릴래아를 약속의 땅으로 느껴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활동 무대인 갈릴래아는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낮은 곳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선택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의 근원지가 예수님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소외와 무시, 빈곤에 허덕이는 갈릴래아와 비슷하다면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찾아오실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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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자가 어느 이른 아침, 초췌한 모습으로 저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사업은 망했고, 빚보증마저 잘못 서서 이젠 살 집까지 날아갈 형편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볼 면목도 없습니다.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차를 몰고 전속력으로 무작정 도로를 달렸습니다. 죽는 것만이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제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가난한 신혼부부처럼 새로 시작해 보십시오. 지금까지는 가진 것과 누리는 것으로 행복을 찾았지만, 이제부터는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가족의 온기 안에서 행복을 만나 보십시오. 그때는 주님도 지금까지 만난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수년 뒤 그 가족이 찾아왔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지난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 삶을 이끌어 주시는 주님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달라져 보입니다. 그저 하루하루가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 삶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은 대부분 자신이 붙잡고 사는 세상의 온갖 우상 때문입니다. 회개는 세속에 오염된 우리의 눈을 돌려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물으며 용기 있게 삶에서 가치의 우선순위를 새롭게 짜는 것이 회개입니다. 세속의 힘과 재물에 의탁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힘을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회개한 사람에게는 그때부터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탁하면서 늘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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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알리시는 일입니다. 그분께서는 먼저 아픈 이들을 고쳐 주십니다. 치유를 통해 ‘주님의 힘’을 드러내시려는 의도입니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주님’을 우선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아픔을 없애 주시는 모습입니다. 육체적 질병만이 아닙니다. 내면 세계의 어둠도 없애시고, ‘나쁜 습관’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악습을 고치는 것이 ‘회개의 본모습’이기도 하다는 가르침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느님의 힘과 능력이 ‘바로 곁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바꾸어야 합니다. ‘정말 주님의 힘이 내 곁에 있을까?’ 이런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기운’을 작게나마 느끼게 됩니다. 그분의 힘이 함께하시면, 우리 곁을 어정거리던 ‘악한 기운’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성체를 많이 모셨으면서도 우리가 바뀌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힘을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힘이 삶에 영향을 미치게 해야 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것이지요. 그분처럼 사랑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봐 주시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삶의 태도가 바뀌면 하늘의 힘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분의 외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회개와 하늘 나라가 그분 외침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회개하면 하늘 나라는 가까이 옵니다. 삶의 자세를 바꾸면 하느님의 힘은 곧바로 함께합니다.
야고보 씨는 작은 식당을 운영합니다. 아내와 함께 시장 어귀에서 몇 년 째 국밥을 팔고 있습니다. 종업원도 없이 부부가 함께 일합니다. 사람 좋은 야고보 씨는 손님들이 행패를 부려도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과가 끝나면 꼭 술을 마십니다. 많이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 마시다 보니 뒤치다꺼리는 늘 아내의 몫입니다. 두 사람은 그것 때문에 자주 티격태격합니다. 착한 야고보 씨는 술을 끊으려 몇 번을 시도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
“신부님, 어떡하면 술을 끊을 수 있나요?” 어느 날 야고보 씨는 절실하게 물어 왔습니다.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무어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술을 끊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안 마시는 습관을 들여 보시지요. 완전히 끊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일과가 끝난 뒤에는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해 보세요. 그리고 성모님께 도와 달라고 간청해 보세요.”

언제부터인가 야고보 씨는 술을 끊었습니다. 삶의 태도를 바꾸었기에 은총이 함께했던 것이지요. 주님께서 돌봐 주시면 되지 않을 일이 없습니다. 회개하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옵니다. 삶의 태도를 바꾸면 은총이 곧바로 함께합니다. 


 

이 시대에 회개는?

- 이영선 신부-

 회개 하나. 훌륭해 지려고 애쓰지 마라!
이미 하느님 품에 안기신 권정생 선생께서 이천년대를 시작하는 해의 정월에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너보다 더 훌륭해 지려고 애쓰지 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로 더 훌륭해 지려고 하다 보니 이리 강퍅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는 말씀을 듣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회개하여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느낌을 지금 이 시대에는 권정생 선생의 '훌륭해지려고 애쓰지 마라.'는 말로 알아듣고 싶습니다.

회개 둘. 함께 기뻐하고 싶습니다.
밤새 울고 아침에 누가 죽었는지 묻는답니다. 그런데 사돈이 논 사면 배 아프답니다. 함께 슬퍼하는 일은 쉬이 하는데 함께 기뻐하는 일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저는 함께 기뻐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여기에 우리 회개의 또 다른 내용이 있다고 여깁니다.

회개 셋. 나는 너와 다릅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다 다릅니다.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비슷할 뿐 다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같아요? 달라요?"라고 여쭈면 "틀려요."라는 대답을 듣습니다. 창의성이 뛰어나긴 하지만 세상에 틀린 존재는 없습니다, 서로 다를 뿐. 세상을 사는 방법도 틀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을 뿐. 틀리는 때는 시험 답안지에만 있습니다.
아, 나는 너와 다르구나. 이 사실을 인정하면 너를 대하는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얼마나 많이 달라질까 상상해 봅니다. 최고만을 인정하고 원하는 이 시대에 회개를 사는 또 하나의 삶이 여기에 있다고 여깁니다.

<삶의 빛이 바랠 때 마다>

-양승국신부-

수도자들이 일년 내내 눈 빠지게 기다리는 시간이 있습니다. ‘연피정’입니다. 수도회마다 기간은 다른데, 대개 일주일, 혹은 열흘 정도의 재충전시간이 주어집니다. 이때만큼은 평소에 해오던 일상적인 업무나 사도직, 직책 등에서 벗어나 자유롭습니다. 강의를 듣고, 묵상을 하고, 또 평소보다 잘 먹으면서 일 년 동안 살아갈 영적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시간입니다.

이번에 저는 틈만 나면 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리고 돌이켜봤습니다. 내 인생의 별이 되어준 분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나를 구세주 하느님께로 인도한 별빛이 되어주신 분들을 기억하면서 그분들께, 그리고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성공한 인생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남들은 자다 깨어나도 못 오를 최정상에 서는 것일까? 꿈에 그리던 백만장자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평생을 동경했던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일까? 많은 실적을 쌓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일까?

사실 이런 것들 대부분 지나가는 것들이더군요. 마치 물을 손으로 움켜쥔 것 같습니다. 잡았다 했는데 순식간에 사라져버립니다.

결국 진정한 성공은 하느님께로 다가서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을 통해서 인간에게로 나아가는 일이 아닐까요? 내가, 내 인생이, 내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그 누군가에게 별빛이 되어 주는 일이 아닐까요?

그 누군가가 캄캄한 암흑 속을 헤매다가 나를 통해, 내 삶을 통해, 내 존재를 통해 다시금 힘을 얻고 열심히 제 갈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면 내 인생은 분명 성공한 인생이리라 확신합니다.

오늘날도 상황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멍하니 앉아있습니다.

외관상으로는 분명히 살아있지만 사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들의 인생에는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고 없습니다. 신앙도 없습니다. 하느님도 없습니다. 결국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기만 해도 예수님을 떠오르게 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어둠 속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던져주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삶이 빛을 잃을 때 마다, 그들 인생의 그림이 퇴색될 때 마다, 다시 꺼내보고 싶은 한권의 책처럼 그렇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살인 미소>

-양승국신부-


오늘 오후 오랜만에 TV 앞에 앉았습니다. 집중력이 부족한 탓인지 아니면 TV 알레르기 증세인지 몰라도 저는 5분을 견디기가 힘듭니다. 아무리 흥미진진한 드라마, 아무리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라 할지라도 제게는 상관이 없지요. 5분내에 그냥 잠이 들어버립니다.


오늘도 5분을 넘기지 못하고 정신없이 졸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으면서 슬쩍 바라다본 TV 화면에는 한 장애인의 삶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완전히 잠이 달아날 정도로 감명 깊은 내용이었습니다.

두 팔이 완전히 없는 장애인 청년이었는데, 중증 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얼마나 맑고 천진난만하고 건강한 얼굴인지 깜짝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그 청년의 미소가 얼마나 찬란하던지 사람들은 "살인미소"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청년의 의지력이었습니다. 두 팔이 없는 자신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두 발뿐이란 것을 알아차린 청년은 그 순간부터 처절하고도 지루한 "발과의 전쟁"을 시작합니다. 두 발에 모든 것을 겁니다. 두 발을 마지막 희망으로 여기고 두발에 목숨을 겁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장래 희망인 청년은 셀 수도 없이 컴퓨터 분해조립연습을 되풀이했습니다. 순전히 발로 말입니다. 수 만 번에 걸친 연습 끝에 이젠 분해 조립하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웠습니다. 한쪽 발로 나사를 잡고 다른 한쪽 발로 드라이버를 돌리는 동작이 마치 손으로 하는 것처럼 능숙했습니다.

식구들과 함께 밥상 앞에 앉은 청년의 모습이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해 보였지만, 이젠 아주 능숙하게 밥숟가락을 사용하며, 멀리 있는 반찬까지도 별 어려움 없이 집어오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웠습니다.


청년의 삶이 세상에 소개되면서 꿈에 그리던 소망이 이루어졌습니다. 취직이 된 것입니다. 컴퓨터 디자이너로 말입니다. 자신이 멋있게 디자인한 학교 팜프렛을 자랑스럽게 펼쳐 보이는 청년의 모습이 너무도 행복해 보였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 서두에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외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후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흘러넘치도록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의 몇 백 배 몇 천 배의 것을 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지난 삶을 조금만 돌아보면 즉시 알 수 있지요.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얼마나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결국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없는 것,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불평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다보니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재능이라도 최대한 발휘되도록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마치 오늘 소개해드린 두 발로 모든 것을 다 이루어낸 청년처럼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 실현 불가능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신뢰한다면, 그분의 자비를 믿는다면, 그리고 거기에 우리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느님 앞에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청하는 것이 이웃의 선익을 위한 것이라면, 세상의 평화와 정의를 위한 것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

 반영억라파엘신부

예수님께서 공적인 일을 시작하신 곳은 갈릴래아, 사람들이 육지 속의 섬이라 부르는 변두리, 소외된 땅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물이 풍부하여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살기 좋은 지역이었으나 가장 착취를 받던 곳이 또 갈릴래아 지방입니다. 대부분의 땅은 부유한 사람들의 소유였고 많은 사람들은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과 억압을 강요 당해야했습니다. 고통스럽게 착취 받는 땅이 갈릴래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지역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첫 말씀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착취한 부자들에게 하신 말씀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주변에는 부자들은 멀리 사라지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몰려왔습니다. 뒷전으로 밀려나 하느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육기관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병원을 운영하고 사회복지시설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부유한 사람, 힘 있는 사람, 잘나가는 사람, 멋진 사람, 편안한 사람에게 더 쏠립니다. 이러한 우리의 태도에 주님께서는 무어라 하실까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질하는 사람이 회개했다면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든 어렵고 힘든 사람은 항상 있습니다. 힘겨워 지친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들게 마련입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것은 그분에게 넘치는 사랑이 있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다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할 소명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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