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0일 주님 공현 후 목요일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루카 4,14-22ㄱ)
말씀의 초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표지가 된다. 또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역시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이사야의 예언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신다. 일종의 출사표를 던진 것과 같다.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주님의 은혜로운 때가 찼다.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심이 드러난[공현]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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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실현된다. 또한 형제를 사랑하면 하느님 사랑을 깨닫게 된다. 요한이 전한,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은 형제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자라신 나자렛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펴시고 사람들에게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묶인 이들에 대한 해방’의 약속이, ‘오늘 이 성경 말씀이 회중이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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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오리는 자신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한가롭게 물 위를 떠다닙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오리가 지니고 있는 기름 때문이라고 합니다. 꼬리 부분에서 나온 기름이 털 사이를 메워서 물의 침투를 막아 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오리가 물속이 아닌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는 것이 기름 때문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으면서도 세상 속에 빠진 것(세속화)이 아니라, 세상 위에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위에 사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계속해서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세상 위에 산다는 것은, 세상 속에 빠져 있지 않으면서 철저히 세상을 향해 봉사하고, 주님의 은총을 전해 주는 전달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받은이’를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 또한 기름부음 받으신 예수님을 본받아 축성 성유의 도유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눈먼 이들에게 빛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에게 기름이 부어진 그 본질적인 이유가 세상을 향해 봉사하고 은총을 전달해 주는 직무에 있음을 생각합시다.
말씀의 ‘선포’를 ‘선동’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선포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뜻하는 바가 이미 이루어져서 ‘현실’이 된 것을 말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처럼, 듣는 이에게 이미 현실이 된 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선포하신 말씀은 가난한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들에게 미래에 언젠가 주어질 해방의 소식이 아니라, 복음을 듣는 이들의 구체적인 현실이 예수님 안에서 기쁨과 해방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선동이란, 자신의 회심과는 관계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조장하여 자신이 목적한 바대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안에는 추상적인 해방의 소리만이 난무할 뿐이지, 복음이 현실 속의 생생한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지, ‘복음으로 선동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회심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복음의 ‘선동자’들은 많지만, 복음적 가치를 사는 진정한 복음 ‘선포자’들은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지 정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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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기쁨으로 ‘한 해’를 지내라는 선언입니다. 눈먼 이들은 다시 보고, 가난한 이들은 기쁜 소식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들으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지 않고, 듣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그분과 가까운 사람들도 그분을 외면할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사람들은 가난을 두려워합니다. 평생 가난을 벗지 못할까 봐 조바심합니다. 물질의 가난만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도 늘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기쁘게 살 수 없는 ‘함정’을 스스로 파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희년이며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도 확신이 없습니다. 이끄심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놓아야 합니다. 모든 두려움의 원인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두려움을 벗는 첫 번째 행위입니다. 그런 뒤에는 다시 ‘안아야’ 합니다. 억울하게 생각하며 ‘잡으면’ 안 됩니다. 그분께서 주신 것이기에 ‘끌어안아야’ 합니다. 두려움의 끈은 서서히 약해질 것입니다.
매일매일이 희년의 시작입니다. 매번 성체를 모실 때마다 희년의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자신이 바뀌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바뀌기 마련입니다. 정성으로 성체를 모시면, 희년은 내 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반영억신부
‘출세와 돈을 우선시하는 교육과 사회분위기가 청소년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에서 수도권 초중고생 6,000명을 대상으로 윤리의식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10억 원이 생긴다면 잘못을 하고 1년 정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고 응답한 초등학생이 12%, 중학생은 28%, 고등학생은 44%로 나타났습니다. 남의 물건은 주워서 내가 가진다고 응답한 초등학생은 36%, 중학생은 51%, 고등학생은 62%랍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윤리의식이 낮았습니다. 성장할수록 올바른 인성을 지니고 확고한 신념을 지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우리가 삶의 모범과 표양이 되지 못하였음을 인정하며 성령의 비추임을 희망합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향기가 아니라 냄새가 나면 다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한 향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자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습니다. 사실 갈릴래아지역은 유다인들이 지독히 멸시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빛나는 존재,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느헤미야와 에즈라 예언자의 가르침대로 일대 종교 부흥을 일으키며 율법의 왕국을 건설하였고, 모든 종교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적어도 일 년에 세 번 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활동의 중심은 경신례를 바치던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의 중심은 작은 마을까지 퍼져있던 회당이었습니다. 회당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말씀의 전례를 위한 집회가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전통대로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가시어 성경을 읽으시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당신의 사명을 이사야예언자의 말씀을 빌어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예언자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사명을 받은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구세주는 말씀과 행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성취합니다. 그는 구원자이며 승리를 알리는 사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오실 때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 구절을 읽으신 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유다인들의 거룩한 관습과 약속을 담은 성경말씀이 당신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고, 구세주가 나타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구원의 메시지는 믿음을 요구하고 이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믿음은 말씀의 요구에 대한 응답입니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보다 날카롭습니다.”(히브4,12) 그러므로 “듣는 가운데에서”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오늘 여기”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영원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계시다”(1베드1,24-25).
구원의 말씀은 듣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듣고 행하는 가운데 구원을 이루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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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필요한 사람>
-양승국신부-
언젠가 한 고위관료가 소년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전체 아이들이 모두 강당에 모였습니다. 오신 김에 마이크를 잡고 아이들에게 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들,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사람, 둘째,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셋째,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 여러분들께 당부 드립니다. 여러분들,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십시오.”
정말 황당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씀을 드러내놓고 하실 수 있는지요. 저희 사부이신 돈보스코 성인과는 마인드가 어찌 그리도 다른지요. 돈보스코 성인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여러분들,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꼭 필요한 사람, 둘째, 반드시 필요한 사람, 셋째, 정말 필요한 사람.”
아무리 못돼먹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구제불능의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막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가치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들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냥 무턱대고 보내지는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소중한 이유는 그 누구라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숨 쉬고 있는 한 우리는 하느님께 돌아설 희망이 있습니다.
생명이 아직 붙어있다는 것, 이것 보통 일이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다는 표시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이것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도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 두 발로 서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중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함부로 대합니다. 단 한번 뿐인 소중한 인생을 물 쓰듯이 탕진합니다. 금쪽같은 순간들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가장 쓸쓸한 얼굴로, 가장 우울한 모습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 사이에 파견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전력투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또 다른 예수님이 됩니다. 제2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분께서 하셨던 일을 우리도 따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보여주셨던 모범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님에게 하셨던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세상 속으로 파견하십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야겠습니다. 길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과 노숙인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소년원과 교도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시각장애우들의 도우미가 되어드려야겠습니다. 환우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도록 만들어드려야겠습니다.
`이미`와 `아직`
-주영길 신부-
어느 주일 저녁 옆 본당 동창 신부에게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성당 앞에 막 다다랐는데 맞은편 교회에서 나오는 한 무리의 자매님들과 마주쳤다. 모른 척하고 지나치려는데 나를 불러 세웠다. “아저씨, 성당 다니면 구원 못 받아요. 우리는 저녁 예배 보고 오는 길인데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우리 목사님 말씀은 은혜가 넘치고 우리는 구원받고 오는 길이랍니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이미’와 ‘아직’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우리는 복음서 전체에 깔린 ‘이미’와 ‘아직’의 긴장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이미’ 시작된 심판을 상기시켜 주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3,9) 반면 예수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을 예고하신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21,27)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지나친 공포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거나, 반대로 ‘싸구려 구원’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당신의 사명을 밝히고 계신다. 너무도 당당하고 거침없는 선포다. 바로 이사야의 예언대로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바람이 채워지는 ‘기적’만을 요구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다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다(4,42-44 참조). 그들에게 ‘이미’와 ‘아직’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가끔 ‘신부’인 나에게 너무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신자들이나 어려워 말도 못 붙이는 이들을 보면 낯이 더 뜨거워진다. 내 모습은 그게 아닌데 신자들은 너무 ‘완벽한 신부’로 바라봐 주는 것은 아닌가! 태어나면서부터 ‘성직자’는 없다. 성소의 씨앗을 잘 가꾸고 또 사제로서 열심히 살려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사제는 수품을 통해 ‘이미’ 되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사제로 남아야 하기 때문에 ‘아직’ 완성된 존재는 아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는 모든 인생도 그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