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4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나를 따라오너라."
(마르 1,14-20)
Come after me,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는 장엄한 선포로 서간의 서두를 연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던 예전과 달리 마지막 때에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 아드님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분이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다. 이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물로 사람 낚는 어부로 바뀔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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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바오로 사도의 편지 형식과는 달리, 처음부터 장엄한 강론 형식을 띠고 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을 이제는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역할을 제시해 주심으로써, 구원의 역사에 그분께서 자리하고 계심을 드러내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며 본격적으로 당신의 구원 사업을 시작하시려고 제자들을 부르신다. 예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즉시 그분을 따라나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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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말이 있습니다. 두 번이나 나오는 ‘곧바로’라는 낱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실 때 그들은 ‘곧바로’ 응답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에도 이 둘 역시 ‘곧바로’ 그물을 버립니다. 사실 다른 복음과 달리 마르코 복음에서 이 낱말을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철수는 무슨 일에서나 뒤로 미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족제비가 울타리 구멍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닭장을 노려보았습니다. 철수는 눈을 부릅뜨고 족제비를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이놈, 우리 집에 들어오기만 해 봐!”
족제비는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울타리 구멍을 통과해 닭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철수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했습니다. “족제비 이놈, 닭장에 들어가기만 해 봐라.”
족제비가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닭장 안에 들어가자, 철수는 몹시 화내며 말했습니다. “저런 겁 없는 놈을 봤나? 닭을 물고 가기만 해 봐라.”
그러나 족제비는 닭을 낚아채 울타리 구멍을 유유히 빠져나갔습니다. 족제비가 멀리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철수는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렀답니다. “저런 나쁜 놈 같으니! 다시 나타나기만 하면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철수처럼 ‘다음에 하자’, ‘내일 하자’, ‘여건이 되면 하자’ 하며 미루는 일이 많지 않은지요? 예수님께서는 순간순간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하지 못한 채 미적거리는 동안, 그 부르심에 담긴 소중한 선물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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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한 명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사람이 대학에 교수직을 찾고 있었습니다. 적당한 대학의 교수로 살아도 좋을 것 같은데, 그는 꼭 일류 대학의 교수직을 고집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인 명예도 있겠지만, 유능한 제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좋은 연구 성과를 내려면 능력 있는 제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스승이라면 누구나 유능한 제자를 두기를 바랄 것입니다. 자신의 사상이든 기술이든, 능력 있는 제자가 물려받아 계승해 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은 다르셨습니다. 제자를 부르실 때 그들의 능력도, 배경도 묻지 않으십니다. 그저 ‘보시고’ 당신의 제자로 삼으십니다. 그분께는 어부든 세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우리의 능력 때문에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한발 더 나아가, 교회의 봉사자나 사제나 수도자로 부름 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자신이 가진 재능과 배경들을 오히려 쓰레기로 여겼습니다(필리 3,8 참조). 우리가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내세울 때’는 자기 자신의 일을 하지만, 오히려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의 약함을 자랑할 때’(2코린 11,30 참조)는 주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봉사자로 일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 저는 부족한 죄인일 뿐이지만,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하는 겸손한 응답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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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갑니다. 정말 그렇게 했을까요?
만남은 신비입니다.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던 사람이 어느 날 혼인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평범한 모임에서 ‘눈이 확 돌아가는’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행복한 부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연은 부르심입니다. 모든 인연을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여긴다면 소홀히 대할 수가 없습니다. 불교에서도 ‘옷깃만 스쳐도 인연’으로 여기라 했습니다. 그만큼 만남을 소중히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하찮은 만남도 정성으로 대하면 은혜로운 만남을 반드시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를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평소 사람들과의 만남에 적극적이었을 겁니다. 이웃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선택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르심에 즉시 답합니다. 변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복음사가가 표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부르심에는 “예!” 하고 답해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새로운 삶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누구라도 ‘주어진 인연’에 최선을 다하면 그만큼 새로운 삶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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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 선포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지내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하셨고 광야 생활을 마친 다음 세상으로 나가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시기는 요한이 잡힌 뒤입니다. 요한이 체포된 다음에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을 전하는 힘찬 목소리가 위압에 의해 사라져 버린 암울한 시기에 그분이 등장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어둠을 비추는 등불이 희미해지자 그 자리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나타난 것입니다(손희송).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례를 받으신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권위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법에 따라 다스려 지는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걸어 다니는‘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한정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건설되는 나라입니다. 먼 미래에 올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나라요, 죽은 다음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현재 우리 안에 현존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후회와는 다릅니다.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이요, 후회는 두고두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이 회개 하였다는 것은 도둑질을 그만 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삶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자기이해 능력과 사고방식의 세계가 아닌 그 이상의 세계로 넘어 간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인생을 이성의 잣대나 사고방식, 또는 지적인 능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로, 즉 복음적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유광수) 회개는 영적 여정의 첫 출발이며 복음을 알아듣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자신이며 그분이 선포하신 말씀, 보여주신 활동 모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선포를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 믿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분명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 애지중지하던 것마저 아낌없이 버리게 하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낚였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그 삶은 ‘회개하라’는 주님의 선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가족과 재물을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께 낚인 것이 아니라 먼저 낚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먼저 선택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낚여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얻기 위해 일상 안에서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읽고 묵상은 하지 못해도 드라마를 보고 운동을 하고, 쇼핑을 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13,44)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려야 됩니다. 버림으로써 얻게 됩니다. 사랑합니다.
“무엇을 얻는 데에는 크게 두 방법이 있습니다.
구해서 얻는 것과 버림으로써 얻는 방법입니다.
구해서 얻는 것은 그 얻음이 아무리 커도
다음에 더 큰 목표가 생기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버려서 얻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덤으로 얻는 기분이기 때문에 만족과 기쁨이 큽니다.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버려서 얻는 방법을 택합니다.”(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가득 찬 은을 버려야 하고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서는 또 어렵게 얻은 그 금마저 버려야 한다.
버리면 얻는다. 그러나 버리면 얻는다는 것을 안다 해도 버리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쉬운 일이 아니다. 버리고 나서 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 봐. 그 미지의 공허가 무서워서 우리는 하찮은 오늘에 집착하기도 한다.“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중에서
그리스도 가르침의 시작 - 회개
-서경돈 신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하느님의 대변자가 가장 많 이 외친 주제는 무엇이겠는가? 하느님의 백성이 예언자들 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주제는 무엇이겠는가? 예수께서 공 생활을 시작하시며 세상을 향해 맨 처음 외치신 첫 일성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하고 말씀하신다. 인류가 하느님께 죄를 지은 이래 끊임없이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회개"이다. 회개라는 주제는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들어 식상할 정도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만큼 회개를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회개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회개는 삶의 중심, 생활의 기준 문제이다. 인간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데 있어 그 중심과 기준을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둔다. 그래서 오해하고, 미워하고, 탓하고, 불평하고, 고통 받고, 거짓말하고, 싸우고, 하느님을 잊는다. 이래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기쁜 소식으로 와 닿을 수 없다.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중심과 기준을 내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 두는 것이 회개 하는 것이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인간인 우리에게 이것은 한시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보라, 주님께서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미사에까지 와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나의 사람관계, 어려운 일, 돈 문제 등을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미사시간에 왜 그렇게 얼굴들을 펴지 못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지 못하시는 것이겠는가? 회개가 필요한 모습들이다.
주님께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주님을 맛들이고 받아들여야 한다. 내 생각의 중심을 주님께 두어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앞날의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데 열중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살아갈 힘도, 용기도, 강복도 주신다. 믿음을 가지고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는 회개를 종말 때까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해야 할 것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또 다시 첫 아침에>
-양승국신부-
한 달 반가량의 대림․성탄 시기가 어제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행복했던 나날들이었습니다. 마치도 잔잔한 은혜의 강가를 주님과 함께 거닐던 꿈결 같던 순간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님과 함께 걸어온 은총의 오솔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출발선상에 서 있습니다. 교회 전례력 안의 여러 전례 시기들 가운데 가장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연중시기를 시작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사순․부활 시기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대림․성탄시기가 더욱 풍요롭습니다. 이처럼 연중시기는 다른 전례시기의 배경이자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한 시절을 매듭지을 때 마다, 그리고 새로운 절기를 맞아들일 때 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와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것은 엄청난 고통일 것입니다. 한번 만개한 꽃이 시들지 않고 계속해서 피어있는 것도 무척 어색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네 사랑에 이별이 있고, 인생에 기승전결이 있다는 것, 시절의 끝자락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인생에도 저무는 황혼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황혼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착해지기 때문입니다.
한 절기의 끝자락에 매달려 우여곡절의 지난 순간들을 뒤돌아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온 나날들은 주님의 자비 안에 행복했던 날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큰 부족함을 끝까지 참아주셨으니 말입니다.
감사하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숱한 죄와 과오, 부끄러움을 끝까지 인내하셨으니 말입니다.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아직 이렇게 살아서 두 발로 서있으니 말입니다.
돌아보니 정녕 우리는 모두 지난 대림․성탄 시기 동안 하느님으로부터 충만한 은총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결국 새롭게 맞이한 연중시기 첫 아침에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감사뿐입니다. 오늘은 정녕 은총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묵은 것이 새것과 화해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절망이 희망과 다시금 손을 잡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고통이 축복으로 변화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시절에 대한 결론은 항상 감사입니다.
은총의 주님께서는 은혜와 축복으로 충만했던 우리의 지난날들을 봉헌물로 받으시는군요. 그리고 은혜롭게도 우리 앞에 또 다시 빈 들판 같은 희망만으로 가득 찬 새로운 연중시기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감사하면서, 찬미하면서, 다시 한 번 힘차게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는 삶이 눈물겹게 소중한 축복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부족했던 우리의 지난날들, 이제 하느님께서 모두 거두어가셨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다시 새로운 연중시기란 과분한 은총 앞에 서있습니다. 정녕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의 아침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가장 큰 표시인 은총의 아침입니다.
이 연중시기의 첫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처럼 기쁜 마음으로,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다시 한 번 주님과 함께 힘찬 항해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 복음에서 들은 이 말씀의 실현을 위하여 스승은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첫 번째 그룹으로 베드로 형제와 야고보 형제가 선택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따라갑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 곁에 섭니다.
더구나 야고보와 요한은 함께 일하던 아버지를 그대로 남겨 둔 채 떠나갑니다. 삯꾼들이 빤히 보고 있는데도 홀연히 떠나갑니다. 아버지와 원수진 것도 아닐 터인데 정말 그렇게 서둘러 떠나갔을까요? 삯꾼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니, 저럴 수 있나? 아버지를 놓아두고 저렇게 가다니.’ 했을 겁니다. 오늘의 우리도 이 모습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식으로 제자를 뽑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스승의 부르심에 제자들은 곧바로 따릅니다. 그 과정은 짧습니다. 단순합니다.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부르면 따라야 한다.’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제자들이라고 왜 고뇌가 없고 망설임이 없었겠습니까? 그들도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수도 없이 망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생략되어 있습니다. 모든 과정이 생략된 채 스승을 따르는 결과만 나옵니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회개 역시 그렇습니다. 변명이나 망설임 없이 곧바로 실천할 때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