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마르코 1,21ㄴ-28)

2013. 1. 15. 오전 7:28:18

글자

2013년 1 15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마르코 1,21ㄴ-28)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어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시편 8편 5절부터 6절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곧 인간이 만물을 다스릴 통치권을 진정으로 얻게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셔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셨기 때문이다(제1독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두 번 놀란다. 첫 번째로는 그분의 가르침이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더러운 영들조차 그분께 복종할 만큼 예수님의 명령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복음).

☆☆☆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 8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비천함을 취하셨지만,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시고 다시금 구원의 영도자가 되셨음을 고백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카파르나움으로 가셔서 그곳 회당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보여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는 ‘권위’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대개 권위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권위는 좋은 의미입니다. ‘예수님께 권위가 있었다.’는 표현이 곧잘 나옵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권위’는 좋으나, ‘권위적’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권위가 있었지만, 그분께서 권위적이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겸손하셨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철부지 어린이처럼 기도하시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언행일치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훈계하시되 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늘날은 ‘권위적인’ 사람이 많아서 문제이기도 하지만, 가지고 있는 권위가 실추되어서도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권위적이지 않으면서 권위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버지의 권위, 어머니의 권위, 교사의 권위, 어른의 권위, 신앙인의 권위 등 말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학자의 권위는 어디에서 옵니까? 논리적이면서 근거 있는 지식에서 옵니다. 건축가의 권위는 어디에서 옵니까? 풍부한 경험과 능력 있는 기술에서 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거룩한 순종에서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은 권위가 제대로 살아나려면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권위를 존중하고, 이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

불투명한 미래가 두렵습니다. 하는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삶이 혼란스럽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럴 때 받는 유혹이 족집게 점쟁이를 찾는 일입니다. 미래를 예측해 주고 자신의 가려운 데를 긁어 주리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갖 잡다한 영을 통하여 우리 운명을 점쳐 보고, 지푸라기라도 잡듯 그곳에라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잡다한 영들에게 의지하면 할수록, 결국은 사람들의 삶을 더 혼란스럽게 하고 불안으로 몰아넣습니다.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 세속적 욕심과 우상 숭배는 더러운 영들의 좋은 은신처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위와 능력을 드러내시며 이런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보고 아우성을 치는 이유도, 세상에서 그들의 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하시고 참되게 하시는 분은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삶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그분께 둔 신뢰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더 자주 미사 참례를 하고, 성체 조배를 하며, 고해성사를 통하여 자신을 더욱 깨끗이 정화해서 주님의 능력을 내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래를 몰라서 삶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지 않아서 불안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이지 않는 미래를 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새롭게 창조해 가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미래는 설렘과 기다림의 세계로 다가옵니다.

☆☆☆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풀어 주십니다. 옛 표현을 빌리면, ‘마귀 들린 사람’을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역사 이래 무수히 많았습니다. 대부분 원인을 몰랐습니다. 기이한 말과 행동을 했고, 어떤 경우에는 앞날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라 독특한 방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한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몰랐지만,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꾸짖疸시며 그에게서 나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권능’이 드러났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기에 ‘사람의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어떤 ‘마귀’도 예수님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멀쩡한 정신으로 점을 보러 ‘사탄의 힘’ 앞에 앉습니다. 그들의 힘을 이용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앞날을 묻고 있습니다. 호기심으로 간다 해도 ‘악의 세력’ 앞에 조아리는 결과가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선한 기운’을 움츠리게 하는 행위입니다.
믿음의 중심은 언제라도 성체성사입니다. 그리고 성체 안에는 역사 안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풀어 주셨던 그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권위 있는 가르침

반영억 신부

오늘은 청주교구 부제, 사제 서품식이 있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소명에 감사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온전히 봉헌하는 삶이 항구하게 지켜지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하느님의 권위가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마르1,21-22) 권위를 나타내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는 ‘아우제레’(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 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 ‘커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권위를 높이는데 있지 않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예수님은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은총을 주시는 분으로 기대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앓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의 가르침은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은총은 그분이 가르치는 바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잘 알아듣고 그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배우려는 노력도,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적이나 체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을 신비로운 현상이나 꿈, 장미향을 느끼는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성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그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그게 다가 아니며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체험은 말씀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테살2,13)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깊은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체험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그 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3,16)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 신심단체에 이름을 걸어놓고 위로를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지 않고는 영적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지니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한 마디로 소통하기를 거부합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것이 악령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악령 들린 사람처럼 한 입으로 두 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을 이용하고 이웃을 힘들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면서 거룩해 보이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거부하며 내 뜻을 이루려 안달하는 악령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권위 있는 가르침에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불쌍한 빙어들>

-양승국신부-

참으로 오랜만에 함께 일하는 형제들과 소풍을 나왔습니다. 집에 남아있는 후배 회원들이나 직원들에게는 미안한 나머지 그럴듯한 핑계로 "평의원 연수"라고 이야기하고 공동체 게시판에도 그렇게 썼습니다.

처음 출발할때는 "시커먼 사람들끼리 소풍가봐야 무슨 재미가 있겠나?"하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나오니 이렇게 한번 같이 나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하루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형제들과 함께 봉고차를 타고 오면서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나누었지요. 불쌍한 빙어들을 안주 삼아 걸쭉한 좁쌀동동주를 들이키면서 나누는 형제애는 참으로 돈독한 것이었습니다. 함께 사우나에 들어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새삼 느꼈습니다. 아무리 경관이 좋은 곳이라 한들 혼자 온다면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술이라 할지라도 혼자서 마신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에수님께서는 한 사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악령을 몰아내십니다. 악령을 몰아내심을 통해 한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십니다.

오늘 악령을 몰아내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이 시대 악령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이 시대 악령은 더 이상 거품을 문 소름끼치는 악령,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으시시한 악령이 아닐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악령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이 시대 가장 더러운 악령은 나만 혹은 내 가족만, 우리 공동체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마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최고라는 생각, 나만이 이 일의 적임자라는 생각, 내가 아니면 절대로 안된다는 꽉 막힌 생각이말로 이 시대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할 악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할 때, 물론 일의 진척이 더디고 답답하겠지만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 시대는 대화와 타협의 시대입니다. 좀 느리고 속상할지라도 이웃과 보조를 맞추어 함께 걸어가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물론 함께 일할 때, 함께 나아갈 때 의견이 분분하고, 일의 진척이 신속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지만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참아주는 그 모습이 얼마나 복음적인지 모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의 이기심이나 욕심, 지나친 성취욕구를 가라앉히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대신 이웃들과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인내하고 희생하는 오늘 하루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오손도손 한데 모여 사는 것"




해방과 자유로 초대하시는 분

-구요비 신부-

신학생 시절, 방학을 마치고 신학교에 들어오면 동창생들이 함께 모여 방학생활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한 번은 시골 본당 출신 친구가 겨울방학 동안에 마귀 들린 여자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본당에 마귀 들린 여자가 있어서 많은 교우들이 기도해 주려고 갔는데 이 여인이 메가톤급 신자들의 비리를 폭로해 모두를 혼비백산시키고 본당은 초상집과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마침 그 시기에 동창생이 방학을 지내러 내려가니 신자들은 크게 반기며 “우리 학사님이야 순결한 분이시니 마귀 들린 여자를 대적할 수 있겠지!” 하더란다. 다음날 신자들과 함께 그 여인의 집을 방문했다. 신자들이 여인에게 신학생이라고 소개한 후 함께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동안 내내 이 마귀 들린 여인이 뚫어지게 자신의 눈을 쳐다보며 무슨 비리를 찾는 것 같아 두려운 나머지 시선을 피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기억에도 희미한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어쩌면 그 여인이 마귀에 사로잡힌 부마자였다기보다는 인간적인 상처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던 가련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세상 안에는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는 하느님의 빛과 은총이 역사하시는 반면에 이에 저항하는 어둠과 악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고쳐주신다.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26절). 예수님 가르침의 권위는(22절), 그분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심을 단지 말로만 선포하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곧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악의 세력과 싸우기까지 하심에서 나온다. 예수님은 단지 인간의 신체적 병만을 치료해 주시지 않고 인간의 근원적 병인 죄까지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사로잡고 있는 악령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도록 우리를 초대해 주시는 구마자이시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