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6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 인간과 얼마나 가까운 분이신지는 그분의 강생, 특히 수난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고 보살피시고자 여느 인간들과 같이 피와 살을 취하셨고, 고난을 겪으셨으며, 유혹을 받으셨고, 죽음까지도 겪으셨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 죽음을 이기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의 하루가 그려진다. 회당에서 가르치신 뒤 오후에는 시몬의 집에서 그의 장모를 치유해 주신다. 해가 지고 밤이 되어서는 온갖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일일이 고쳐 주신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는 외딴곳에서 기도하신 뒤 다시 다른 이웃 고을로 떠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고해성사를 주다 보면 많은 사람이 형식적으로 죄를 고백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게 자꾸 반복되다 보면 문득 이런 유혹이 찾아옵니다. ‘어차피 형식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사람이 많으니, 한꺼번에 사죄경을 하면 안 될까?’ 아닌 게 아니라, 성사를 보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그저 “주일 미사 빠졌습니다.”라고 하니, 그러한 사람들만 따로 모아 사죄경을 하면 되겠다는 상상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묵히 제 갈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 군사훈련소, 신입사원 교육관, 견습생 훈련원, 사관학교, 수도자 양성소... 이런 단어 보시면 떠오르는 생각이 어떤 것입니까? 이런 곳이 존재하는 목적은 다름 아닌 인재 양성입니다. 목표나 사명에 부합한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일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눈치가 백단이 됩니다. 눈빛만 봐도 저 친구 오늘 뭔가 힘든 게 있구나, 얼굴 표정들만 봐도 오늘 분위기, 뭔가 심상찮은데, 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즉시 파악하고 대처합니다. 때로 아주 작은 것 하나에 밀고 당기기를 거듭합니다. 그냥 넘어가도 될 만한 것인데도 불호령을 내립니다. 그러다보니 사람이 애들 표현대로 아주 ‘쫀쫀’해집니다. 언젠가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신경전을 벌인 기억이 납니다. 다루기가 아주 힘든 청소년들과 함께 5일간의 여름 신앙학교를 하고 나서의 일입니다. 수사님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합심해서 잘 준비했고, 또 결과도 아주 좋았습니다. 삼복더위 한 가운데 말도 듣지 않는 꼴통들 데리고 다들 정말 수고가 많았습니다. 감사의 표시로 수도원 저녁식사에 자원봉사자들을 초대했습니다. 맛있는 저녁식사를 나누면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다들 만족해했고 저 역시 충분히 감사의 정을 표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혈기왕성한 우리 젊은 수사님들 그걸로 성이 차지 않았던가 봅니다. 한 수사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게 부탁을 한 가지 했었는데,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젊은 자원봉사자들, 다들 아쉬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데리고 가까운 노래방이라도 다녀오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도무지 이해가 안됐습니다. 저 역시 젊은 혈기에 후끈 달아올라, 막 야단을 쳤습니다. “너, 지금 제 정신이냐? 다들 근사한 저녁 잘 먹었는데, 시간도 늦었는데, 빨리들 집에 가시게 해야지 노래방은 무슨 얼어 죽을 노래방이냐? 그리고 그분들 삼복더위에 죽을 고생들 하셔서 오랜만에 하늘에 보화를 많이 쌓았는데, 그걸 다시 다 끌어내릴 셈이냐?” 오늘 복음을 찬찬히 읽어보면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야말로 예수님 공생활의 절정기입니다. 제자들도 덩달아 신명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어서 그분 손만 펼치면 안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죽어가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한 말씀에 벌떡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 치유는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이란 인물은 순식간에 스타중의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얼마나 많이들 몰려왔으면, 완장 하나씩 차고 군중들 헤쳐 모으기, 군중들 줄 세우기, 세치기하는 사람들 적발하기가 제자들의 중요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스케줄은 거의 초특급 연예인 스케줄 저리 가라였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치유와 기적활동을 끝낸 예수님께서 탈진하신 나머지 잠시 휴식 겸 기도하시러 외딴 곳으로 가셨는데, 그 틈을 못 참고 또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댔습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때 저 같았으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 뭐 그렇게까지 은혜를 입었으니 당연하겠지. 뭐 좋은 술이랑 안주거리라도 챙겨왔나? 오늘 다들 수고했는데, 가보자구. 회포도 좀 풀어야지.” 그러나 예수님은 저하고 철저하게 달랐습니다. 조금도 우쭐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군중들의 환호에 연연해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 아버지께서 제시하신 당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참으로 겸손하신 예수님, 오로지 복음 선포 사명,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한 열정으로만 가득 찼던 참 목자 예수님의 본모습에 유난히 돋보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마르코 1,29-39)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모습을 보면 제 상상이 틀린 생각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여기서 ‘데려왔다’는 표현은 신약 성경의 원어에서 미완료 동사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행위를 나타냅니다. 곧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왔다가 한꺼번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밀려오고 나가는 일이 계속되는 것이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한꺼번에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대해 주신 것을 암시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 전체를 한꺼번에 불러 놓고서 일순간에 그들을 치유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만큼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때마다 마치 이 세상 전부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한 사람을 여러 명 가운데 하나로 보신 것이 아니라, 마치 세상에 그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대하시며 치유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바로 자기 앞에 있는 이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연중1주간 수 강론) 힘을 얻으려면
반영억신부
능력에는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가지고 마귀를 좇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 입니다. 토마스 키팅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 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 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는 나의 원의를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려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보십시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5)하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 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하셨기에 당신이 할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 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 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6,6)
우리도 하느님의 힘을 입으려면 고요 속에서 외딴 곳을 찾아 기도 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체 조배를 통해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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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는 누구인가?
청주교구 사제 부제서품식이 있었습니다. 2명의 사제와 5명의 부제가 탄생되었습니다. 장봉훈 가브리엘 주교님께서는 사제탄생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사제는 누구인가? 사제 직무는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한 사제의 탄생은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선택과 자기 자신의 뜻이나 결심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품성사를 받을 권리는 아무에게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성품성사를 받고 사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1장 4-5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예레미아 예언자를 부르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리셨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마찬가지로 사제로 서품되는 사람은 어머니의 모태에서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께서 사제로 선택하여 내세운 사람입니다. 영예로운 사제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도권에 의해 부르심을 받아서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계획과 뜻이 있어 부르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결심과 뜻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1.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람입니다. 사제는 성품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직무를 행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행자입니다. 교황 비오12세는 “사제가 참으로 대신 하는 것은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합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제는 첫째로 말씀의 교역자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내가 갈 때까지 성경봉독과 권고와 가르침에 열중하십시오.”(1티모4,13) 이 직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1티모4,16) 믿는 바를 권고하고 가르침으로써 하느님 말씀의 교역자, 복음 선포자의 직무를 잘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예언자의 직무에 충실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계속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열매를 맺기를 기원합니다.
2.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성화직무를 수행합니다. 사제는 미사와 성사를 집전함으로써 홀로 거룩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의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람을 성화시키는 일을 하게 됩니다. 사람과 하느님사이의 은총의 전달자입니다. 사제는 크리스마성유로 손을 축성하여 사제의 손은 인간을 거룩하게 하는 손이 됩니다. 사제는 성사를 집전하는 직무를 통해 사람들을 거룩하게 성화시킵니다. 사제는 미사의 집전자로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는 직무를 맡았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님을 통해 죄의 용서를 받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사제는 그 역할을 미사 안에서 오늘 재현하게 됩니다. 죄인을 거룩하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 하느님 앞에 서는 날까지 미사와 성사를 정성껏 거행하고 직무에 충실하기를 바랍니다. 매일 하느님의 제단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사제생활의 가장 큰 행복이요, 기쁨이 되길 바랍니다.
3. 사제는 주님의 자녀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착한 목자 되시기 바랍니다. 누가 착한 목자인가?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1). 양떼를 얼마나 잘 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10,14). 하셨습니다. 신자들의 영육간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사제가 되길 바랍니다.
2). 사제의 마음 한가운데 무엇이 들어있나? 입니다. 사제는 자신은 없어지고 마음 안에 오직 양떼에 대한 걱정과 양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들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제가 되십시오.
3).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제가 되십시오. 예수님께서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놓는다”(요한10,11). 고 하셨습니다. 신자를 위해 한 생을 바치는 착한목자 되길 바랍니다.
신자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성품성사를 통해, 나약한 인간이 참 하느님이시고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품위로까지 올려 졌습니다. 하느님백성 안에서 예언직, 왕직, 사제직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직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질그릇 같이 연약한 인간이지만 하느님께서 직무를 맡겨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직무를 죽는 날까지 성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주교님 강론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연중 제1주간 수요일 강론
인천교구 성소국 : 조명연 신부
꽃뱀, 제비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이성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 이성에게 무엇을 뜯어낼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요. 그들은 남자에게 또 여자에게 잘해주는 척 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면 상대방이 좋아할까요? ‘나에게 뭔가를 뜯어 먹기 위해서 지금 내 곁에 있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 남녀가 사귀는데 상대의 존재를 사랑하기보다 상대가 주는 선물에만 관심이 많다면 누가 상대방에게 선물을 주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꽃뱀, 제비족을 예를 들었지만, 이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똑같이 적용됩니다. 나에게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서 가식적인 행동만을 일삼는다면 기분 좋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를 이용하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을 내 뱉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더 이상 좋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큰 실망과 함께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관계를 떠올리면서 문득 주님과 우리들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께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해 주셔야 하는 것처럼 온갖 감언이설을 던지고 있지요. 그 모습이 혹시 이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꽃뱀과 제비족의 모습은 아니었는지요? 즉, 자신의 진실한 모습으로 사랑하고 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 그리고 나의 이득만을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과연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주님은 어떠하실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우리들의 가식적인 행동과 형식적인 감언이설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해 주실까요?
이제까지 보여주신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잘 알기에, 우리들의 잘못된 모습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주님에게 무엇인가를 뜯어낼까 고민하기보다, 무엇인가를 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내가 되어야 한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큰 사랑을 역시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 한 군데에 머무르시지 않습니다.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사람들의 온갖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물론,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하시지요. 그렇게 피곤한 상태에서도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사랑을 멈추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지금도 받고 있으면서 우리는 과연 주님께 어떤 사랑을 보여드렸을까요? 주고받아야 사랑의 관계가 유지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받는 데에만 익숙하고 주는 데에는 너무나도 인색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님께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정작 우리들이 해야 할 온갖 의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주종의 관계입니다. 즉, 주님을 종으로 생각하면서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존재로만 여기는 것이지요.
주종의 관계가 아닌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주님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받는 것에 익숙하기보다 주는 것에 더 익숙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 안에서만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