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치유 (마르코 2,1-12)

2013. 1. 18. 오전 6:17:57

글자

2013년 1 18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뜻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25일까지를 ‘일치 주간’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간구하는 공동 기도를 바치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 2,1-12)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에 따르면, 구약에서 하느님의 안식처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먼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최종적으로 가야 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며, 두 번째로는 세상 창조를 완성하신 이렛날이다. 이제 신약의 백성은 충실한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안식처에서 진정한 창조의 완성인 새 하늘과 새 땅을 희망해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신다. 그런데 이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예수님께 힘들여 데려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베푸신 것이다. 또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심으로써 그의 마음까지도 깨끗하게 치유해 주신 것이다(복음).

☆☆☆

히브리서 저자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그들의 잘못으로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전하며 경고한다. 그러나 안식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은 유효하며, 모두가 그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들것으로 지붕을 뚫고 내려보낸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면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환자가 안고 살았던 정신적 고통까지도 해방시켜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데려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사제가 로마 시내에서 어느 한 거지를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 거지는 자신과 같은 날 사제가 된 신학교 동료였는데, 그가 성소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사제가 다음 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하게 되었을 때, 친구 거지의 상황을 전했습니다. 교황은 그 거지와 함께 저녁 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저녁 식사 끝에 교황은 거지와 둘만 있게 해 달라고 하였고, 둘만 남게 되자 교황은 그에게 자신의 고해성사를 청하였습니다. 거지는 환속한 자신은 더 이상 사제가 아니라고 말하자, 교황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로마의 주교입니다. 이제 잃어버린 당신의 사제 권한을 수여합니다.”
그는 교황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이어 그 거지 사제 역시 교황에게 고해성사를 청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에게 그가 구걸했던 거리에서 걸인들을 돌보는 일을 맡겼습니다.
이 사제가 죄를 용서받기까지 스스로 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동료 사제와 교황의 도움만이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주위의 선한 마음을 소중하게 여기시어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갔던 네 사람의 정성스러운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그가 온전하게 되살아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자신이 잘나서 용서받고 의인처럼 살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누군가 우리를 위해 부단한 기도와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

 

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데려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사제가 로마 시내에서 어느 한 거지를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 거지는 자신과 같은 날 사제가 된 신학교 동료였는데, 그가 성소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사제가 다음 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하게 되었을 때, 친구 거지의 상황을 전했습니다. 교황은 그 거지와 함께 저녁 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저녁 식사 끝에 교황은 거지와 둘만 있게 해 달라고 하였고, 둘만 남게 되자 교황은 그에게 자신의 고해성사를 청하였습니다. 거지는 환속한 자신은 더 이상 사제가 아니라고 말하자, 교황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로마의 주교입니다. 이제 잃어버린 당신의 사제 권한을 수여합니다.”
그는 교황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이어 그 거지 사제 역시 교황에게 고해성사를 청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에게 그가 구걸했던 거리에서 걸인들을 돌보는 일을 맡겼습니다.
이 사제가 죄를 용서받기까지 스스로 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동료 사제와 교황의 도움만이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주위의 선한 마음을 소중하게 여기시어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갔던 네 사람의 정성스러운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그가 온전하게 되살아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자신이 잘나서 용서받고 의인처럼 살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누군가 우리를 위해 부단한 기도와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

작년 바로 오늘 새벽 4시에 한 사제가 선종하였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그분은 “꿈에서 돈 보스코 성인을 만났다.”라고 하시며 주변 사람들에게 강복을 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이태석 신부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사제의 영혼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인지, 아니면 젊고 아름다운 사제의 모습을 영원히 세상에 남겨 두시고 싶어서인지, 아프리카 수단에서 보낸 8년의 시간을 마감하시고 48세 나이로 그분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신부님께 물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아프리카로 가야 했습니까?”라고. 그분이 남긴 유일한 저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에서 신부님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맡아서!”라고 대답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일생을 보내신 슈바이처 박사, 고아들을 보살피며 사시던 신부님과 수녀님의 모습, 평생을 희생하며 10남매를 키워 내신 홀어머니,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맡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 참조)이라는 한 구절 말씀을 붙잡고, 의사가 누릴 수 있는 세상의 유혹을 뿌리친 채, 아프리카에서 인술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를 들것에 들고 데려온 사람들, 그들이 그 환자의 친척인지 이웃인지는 모릅니다. 아무튼 지붕을 뚫고라도 그 고통 받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믿음과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아프리카 오지로 떠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이런 작은 향기들은 삶 속에서 내고 살아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환자의 가족들은 극성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앞을 막아 예수님께 갈 수 없게 되자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고는 지붕 한쪽을 벗겨 그 구멍으로 환자를 내려 보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는 우리와 다릅니다. 그곳은 비 오는 계절비 없는 계절로 확연히 구별됩니다. 따라서 비가 없는 철에는 나뭇가지나 거적 같은 것으로 대충 덮어 두었습니다. 그랬기에 환자를 내려 보낼 수 있었던 겁니다. 아무튼 그들의 극성은 기적으로 보답받습니다.
그런데 몇몇은 법을 따집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기에 치료 행위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죄가 되는가, 안 되는가? 법을 어긴 것인가, 아닌 것인가? 그들은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딜 가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까지도 용서하십니다.
환자의 가족들은 믿음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고려했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선하심을 믿었기에 지붕을 뚫고 내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법을 생각하고 주변을 의식합니다. 결과는 따지는 행위였습니다. 주님의 일을
따지고 계산하면 은총은 결코 함께하지 않습니다.

 

☆☆☆

 

 중풍은 무서운 병입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수족을 못 쓰는 병입니다. 본인은 물론 가족들마저 고통으로 몰아넣습니다. 어쩌다 이러한 병이 나타나는지요? 뇌 세포가 죽어 감으로써 그렇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학 상식이 없던 옛날에는 참으로 기이한 병으로 여겼습니다. 펄펄하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더듬고 움직이지 못하니 얼마나 놀라고 기가 찼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늘이 응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누군가 율법을 어겼기에 벌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그러한 생각을 알고 있었기에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용서하니까 죄의 결과인 벌도 없어지고 병도 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곁에 있던 바리사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꾸짖듯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물론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쉽습니다.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한다고 말했지만 용서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들것을 들고 가라는 명령은 즉시 결과가 나타납니다. 스승의 말씀에 중풍 병자는 들것을 가지고 일어섰습니다. 그분께 하느님의 능력이 있음이 입증된 것입니다. 그분께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있습니다. 중풍 병자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인 셈입니다.

  

 



주님은 명의시다

반영억신부

몸에 향수를 뿌리고 얼굴에 화장을 하여도 몸도 얼굴도 변하지 않습니다. 새 옷을 갈아입고 치장을 해도 그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겉모양이 달리 보일 뿐입니다. 마음은 그대로 두고 요란을 떨면 떨수록 본래의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을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당신 앞에 내려놓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마르2,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외적인 중풍병을 고치려고 왔는데 주님께서는 그 원인을 치유시켜 주심으로 사람의 근본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평범한 의사는 상처를 다스리고 명의는 뿌리를 다스린다고 했는데 바로 우리의 주님이 명의이십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뿌리에 생명을 더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이 뒤틀린 사람이 있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탓을 남에게 돌리며 투덜대기 좋아하는 사람, 정말 치유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처지를 다 꿰뚫고 계시니 그분 앞에 서슴없이 나의 모든 것을 열어드려야 하겠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게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만약에 이런 영혼들이 그 커다란 비참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스스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롯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자기한테서 머리를 돌린 탓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영혼의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중풍환자, 즉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장애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환자나 다름없습니다. 기도 안에서 치유받기를 희망합니다.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생각합니다.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사람들의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자 지붕을 벗겨내는 열성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마르2,4).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위해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할 수 있는 마음을 담고 있는가? 또한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줄 이웃이 있는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웃사촌이라 하지만 요즘 세상은 서로를 너무 모르고 지내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웃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길 청하면 주님이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속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사람들이 중풍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두 가지 장벽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군중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가니까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과 소신을 가지고 가야합니다. 나의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요, 군중에 떠밀려가듯이 가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의 선장입니다. 

두 번째의 장벽은 지붕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들것에 매달아 내려 보냈습니다. 막히면 뚫고 걷어내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들 것에 누워있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혹 누워있다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제게 눈이 있어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어 보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게 코가 있어 숨쉬는 것이 아니라 산소가 있어 숨쉬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게 귀가 있어 듣는 것이 아니라 공기가 있어 들리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게 입이 있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가르쳐 주셨음을 깨닫게 하소서.
지구가 중심이 아니고 태양이 중심이듯 나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새롭게 하소서.
아멘” 
-유광수바오로신부-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양승국신부-


<약자를 배려하는 공동체>


오랜 세월 치매로 고생하시는 아버님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하기로 소문난 한 효자가 한적한 바닷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 온 종일 맥없이 자리에 누워만 계시는 아버님을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없겠는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최근 한 가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즉각 실행에 옮겼습니다.


아버님은 젊은 시절 어부셨기에 바다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다는 것이 기억났습니다. 태풍이 불어 고깃배가 뜨지 못하는 날조차 방파제로 나가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계셨던 모습도 기억났습니다.


아들은 우선 아버지와 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담을 허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담이 있던 자리에 예쁜 꽃들을 줄줄이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님은 담 허무는 공사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셨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힘겹게 마루로 나오셨습니다. 고개를 바다로 향했습니다. 굳게 잠겨 침울했던 그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가던 마을 사람들도 마루로 나와 앉은 아버님을 향해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고, 아버님께서는 예전보다 훨씬 행복해보였습니다.


노부모님을 모시고 계시는 자녀분들 계실 텐데, 특히 거동이 불편하신 부모님들, 병고에 시달리고 계신 부모님들 모시느라 정말 고생들이 많으시겠지요.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노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은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앙인에 앞서 인간으로서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우리 부모님들, 그간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과 기쁨을 안겨주셨습니까? 그분들이 우리에게 주셨던 그 행복을 이제는 우리가 돌려드려야 할 때입니다.


몰론 점점 연로해져만 가시는 부모님들 바라보는 시선이 꼭 곱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한때 그렇게 위풍당당하셨던 분, 태산 같은 분이셨는데, 이제 완전히 노쇠해지시고, 저리 쫀쫀해지시고, 저리 구차스러워지시고, 마음으로부터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미워하는 마음도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십시오. 노화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약화는 어쩔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어쩔 수 없는 우리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육체는 시들고 영혼도 시듭니다. 그저 부족하고 안쓰러운 한 존재, 측은한 한 인간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래서 이제 건강할뿐더러, 인생의 황금기를 구사하고 있는 자녀들께서는 부모님과의 관계 설정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위치가 바뀐 것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들, 이제는 우리가 보호해드리고, 동반해드리고, 기도해드리고, 감싸 안아드려야 할 연약하고 측은한 존재인 것입니다. 가족 구성원 안에서 더 많은 사랑과 위로가 필요한 약자인 것입니다.


노화와 더불어 즉시 다가오는 감정이 서운함입니다. 허전함입니다. 무대 뒤로 물러나야 하는데서 오는 쓸쓸함입니다. 이런 부모님들에게 자녀들은 위로자요, 치유자, 동반자요 격려자로 존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 가족들의 지극정성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들이 오늘 보여준 행동은 상식을 크게 벗어난 행동이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행동이었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다급하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어야지요. 아무리 절박하다 하더라도 이게 뭡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갑자기 지붕이 열리고, 열린 지붕 사이로 끈에 매달린 중풍병자가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족들의 병자를 향한 각별한 애정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간병해왔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뎌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족들의 그 적극성, 능동성 앞에 탄복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이 가장 약한 사람을 가장 많이 배려하길 바랍니다. 구성원 가운데 가장 약자를 공동체의 중심이 놓길 바랍니다. 끝까지 약한 사람을 포기하지 말길 바랍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마르2,1-12)

 -유 광수신부-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 때에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그분께 데리고 왔다.

 

오늘 복음을 보면 다섯 부류의 사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
둘째는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
셋째는 네 사람에 의해 예수님께 온 중풍병자,
넷째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네 사람이다.
다섯째는 예수님을 말씀을 듣기보다는 듣고 판단하고 있는 율법학자의 모습이다.
 
나는 이 다섯 부류의 모습에서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내가 이 다섯 부류 중에 어느 한 부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중풍병자면 중풍병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복음을 전하고 있으면 복음을 전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는 네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늘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고 율법학자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이나 잡고 판단하고 있으면 늘 남을 판단하고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어떤 사명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가? 그런 일을 하라고 불리움을 받은 사람인가? 그런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복음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당신 주위에 모여드는가?

 

 만일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중풍병자일지도 모른다. 또 당신은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사람 중에 한 사람인가? 예수님 주위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당신은 많은 은혜를 받고 중풍병자가 중풍병에서 치유되었듯이 당신이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받고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다고 예수님 주위에 모여 있었고 매 주일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쁨이 없고 받은 은혜도 없다면 당신의 신앙 생활에는 반드시 문제가 있다.
즉 복음을 듣고 복음에 의한 복음을 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병이나 치유받으려는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중풍병자의 모습일 것이다.
신앙 생활을 하고 성당에 다니고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하더라도 본인 자신이 아무런 느낌도 없고 기쁨도 없고 받은 은혜도 없이 무감각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듣고 있다면 그것이 중풍병자 아니고 무엇인가?
중풍병자의 특징은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다. 누워있으면 있는 대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 혼자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죽은 이의 모습이다.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의 모습이요, 죽으면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주는 시체의 모습이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모습이 당신의 모습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이요, 정말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고 봉사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중풍병자를 보시고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중풍병자를 당신께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하는 일은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요, 사람을 살리는 봉사이다.
나의 믿음은 나만을 위한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 나도 구원받고 다른 사람들도 살리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이란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다 살려줄 수 있고 고쳐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
나를 살리고 다른 이를 살리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살릴 수 있다는 믿음뿐만 아니라 중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하고 희생을 치루워야 하고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보라. 오늘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가를. 그들이 중풍병자를 설득해서 들것에 들고 예수님께 데려 오는 것도 힘든 일이고 또 예수님께 데려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뚫는 일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벗기고 구명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들 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오기까지 이 네 사람이 겪어야했던 어려움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었으며 힘든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고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갖고 노력하였고 인내하였으며 희생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드디어 중풍병자가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들이 사도이다. 하느님의 사람이요, 신앙인의 삶이고 자세이다. 

 

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오기까지는 하였지만 그 다음은 중풍병자에게 달렸다. 항상 결정적인 치유는 본인 자신에게 달려있다.
다른 이들은 도와줄 수는 있어도 대신할 수는 없다. 목마른 이를 우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대신 마셔 줄 수가 없듯이 네 사람의 역할과 중풍병자의 몫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것까지는 네 사람이 할 수 있었지만 중풍병자가 치유받고 못받는 것은 전적으로 중풍병자에게 달려 있다. 
만일 중풍병자가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려고 하더라도 그가 원치 않았으면 강제로 데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하셨을 때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들것에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랫동안 중풍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 동안 중풍병자가 치유받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고치지 못했는데 낮선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려고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어떤 특별한 진찰도 하지 않고 다만 보시고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한 마디 말씀만을 듣고 일어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믿음이다. 또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다.
결국 중풍병자가 치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네 사람의 믿음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 들 것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간 중풍병자의 믿음과 치유의 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의 합작품이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은혜를 받은 사람은 믿음을 복음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만이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쉽게 어떤 기적만을 기대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의 고정관념과 얕은 지식으로 판단만 하는 율법학자들은 아무 은혜를 받지 못했다.

 

그럼 중풍병자가 중풍병을 앓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의 죄였다. 죄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만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고정관념으로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로 말미암아 중풍병을 앓고 들것에 누워지내는 병자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해야하고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일을 해야한다. 그것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하는 신앙인이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의 의무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복음적인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사도라고 한다.
사도는 자기 영혼 안에 지니고 있는 하느님을 자기 주위에 발산하는 사람이다.
사도는 보화를 축적하고, 그 축적한 보화를 인류에게 전해주는 성인이다.
사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게 대한 사랑으로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절제할 수도 차단시킬 수도 없는 사람이다.
사도는 갈증을 해소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로 달려가 넘치도록 채워주는 선택된 그릇이다.
사도는 자신 안에서 최고도로 활동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성전이다.
한 저술가의 말을 빌리자면, 사도는 자신의 몸 전체에서-공사를 막론하고 자기의 말, 일, 기도, 몸짓, 태도를 통해서- 그의 전존재로부터 하느님을 발산시키는 사람이다.
하느님에 의거해서 살라! 그리고 하느님을 주라!  

-알베리오네 신부님의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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