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2,13-17)

2013. 1. 19. 오전 7:30:25

글자

2013년 1 19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2,13-17)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온전한 의인은 있을 수 없다. 그분의 말씀이 나약한 우리의 내면을 꿰뚫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시면서 우리가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도록 하셨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세리였던 레위를 제자로 삼으시고 많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나누신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인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당신의 소명이라고 밝히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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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말씀’이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적인 능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그 말씀 앞에 우리는 벌거숭이가 되지만, 우리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아시는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계시기에 그 은총의 어좌로 나아갈 수 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 이 모습을 보고 불평을 하는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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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제자로 삼으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즐기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위대한 인물들이 죄를 전혀 짓지 않은 한없이 의로운 사람들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많은 인물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아내 사라이를 여동생이라고 속여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창세 12,10-20 참조). ‘성왕’이라고 불리는 다윗은 욕정에 이끌려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 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2사무 11,1-10 참조).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며 배반하였고(루카 22,54-62 참조),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갈라 1,13 참조).
죄 많은 이들이 교회가 칭송하는 인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로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회개를 위해 끈기 있게 열성을 다하시는 하느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세리인 레위를 당신의 제자로 삼으시고 많은 죄인과 세리와 함께 음식을 나누신 것은, 그들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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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도, 임금도, 한마디로 이 세상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든 사람도 세리들과 어부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얼마나 큰일을 할 수 있었는지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말씀입니다. 보잘것없는 어부들, 사람들에게 멸시받던 세리들. 이들이 예수님께 부름 받아 거대한 교회 역사의 기초가 되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 우리를 경탄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약함과 죄스러운 상처를 통하여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헨리 나웬 신부님은 그분의 책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특별히 “사목자의 상처는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수용하는 환대의 자리이며, 타인을 위한 치유의 원천”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부름 받은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비천함과 죄스러운 상처들이 어쩌면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을 환대하고 위로하는 자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초기부터 완전하고 올바른 사람들로 시작된 곳이 아닙니다. 병원으로 환자들이 모여들듯, 비천한 죄인들이 모여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사목자도, 봉사자도, 상처와 죄가 없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부와 세리처럼 약하고 죄스러운 자리에서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 상처 난 사람들을 또한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입니다. 외면하고 싶은 우리의 약함과 죄스러움은,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장소이며, 이웃을 환대하고 용서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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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위는 암의 발생률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음식물이 쌓이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기에 늘 움직이며 살아야 합니다. 활동적인 사람이 건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암의 발생률이 적은 곳은 심장이라고 합니다. 계속 움직이며 피를 공급하기에 암세포가 들어붙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베풀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암에 걸리지 않습니다.
영혼의 암에 걸리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트집 잡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와 함께 무엇을 먹든 시비 걸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먹어서
죄 되는 음식은 없습니다. 더구나 어떤 사람과 함께 먹었기에 죄가 되는 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법이 있다면 하느님을 옹졸한 분으로 만드는 법입니다.
암세포는 서서히 자랍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초기에 발견하면 고약한 암이라도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늦게 발견하면 그만큼 힘들고 어렵다는 말이 됩니다. 영혼의 암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한 마음남을 무시하는 행동이 영혼의 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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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반대 세력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부유한 집단이었고,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율법을 저해하는 힘으로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만나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죄인과 어울리면 함께 부정해진다는 율법 때문입니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는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구애받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레위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마태오입니다(마태 9,9-13). 아마도 마태오는 두 이름을 가진 듯합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귀하고 천한 구분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여전합니다. 사람들의 편견 때문입니다. 남을 괴롭히는 일이 아니면 모두가 당당한 직업이 아닐는지요? 예수님께서는 율법 자체에 매이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당시 사람들의 편견을 뛰어넘어 세리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는 자체를 부정한 행위로 간주하던 때였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숫자에 매달리고 자신의 업적과 치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삶의 근본을 망각한다면 어리석은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죄인

 반영억라파엘신부

가능한 1개월에 한번 정도는 고해성사를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늘 성사를 보면서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성사를 보고 나서 그 거룩해진 마음을 잘 지켜야 하는데 작심삼일입니다. 허물을 벗은 기쁨이 큰 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자유를 얻고는 곧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예수님과 깊이 만나지 못하고 그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남들에게는 열심 한 것처럼 위선을 떨면서 여전히 사랑을 받으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마르2,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마태오라는 세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징수를 위임 받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무당국과 계약을 맺어 세금을 징수했는데 정한 액수보다도 더 많이 거둬들여 차액을 착복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들은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따돌림 받았고 직책상 죄인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리직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필 그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당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단지 거기에 함께한 사람들끼리의 친교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결코 죄인들과는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이 하느님과의 친교를 뜻하는 식사에 참여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주 이러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고, 이 행위자체가 그들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신 행위였습니다. 그는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아니어서 행복을 차지했습니다.

오늘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부르십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써 오십니다. 따라서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듯이 오늘 내가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면 행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 주었고 모든 것을 보장해 주던 익숙한 자리를 버리고 따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의 인생 도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세12,1) 고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는 그대로 행하였고 오늘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를 부르시고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고,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를 부르셔서 인생을 새롭게 하였듯이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 이십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밥상 친교

-박영대-

 

딸들이 커가니 모든 식구가 함께 밥 먹는 일도 점점 어려워진다. 아침. 등교와 출근 준비로 바빠 한 밥상에 앉아도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허겁지겁 밥만 먹고 일어선다. 점심. 각자 학교 식당과 직장 근처 식당에서 먹고 집에서는 부모님만 드신다. 늦둥이 막내 혜빈이도 유치원에서 먹는다. 저녁. 고등학교 1학년 큰딸 혜진이는 학교에서 먹고(야간 자율 학습을 그만둔 지금은 집에서 먹는다), 나는 술자리에서 저녁을 때우고, 집에서는 나머지 식구만 먹는다. 쉬는 날도 늦잠 자느라, 각자 약속 때문에 한자리에 앉아 밥 먹는 일이 드물다. 모든 식구와 친척들이 모여 얘기도 나누며 제대로 밥 먹는 경우는 생일잔치처럼 특별한 날뿐이다.
함께 밥 먹는 일은 중요하다. 밥만 먹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밥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웃는다. 밥 먹으면서 울거나 화낼 순 없다. 어릴 때 반찬투정을 하다가 야단맞고 울면서 밥 먹을 순 있지만, 울면서 밥 먹는 건 정상이 아니다. 또 화가 나 숟가락을 내던지고 나가버릴 수는 있어도 줄곧 화내면서 밥 먹을 순 없다. 이렇게 먹었다가는 십중팔구 체한다. 그래서 밥 먹는 자리는 친교와 화합의 자리다.
가정 해체는 밥상에서 시작된다. 따로 먹거나 어쩌다 모여 먹어도 밥만 먹는 ‘식사(밥 먹는 일)’가 가정 해체를 불러온다. 그 회복도 밥상에서 시작된다. 가정 해체의 아픔을 겪는 한 선배는 형수가 집을 나간 뒤 아침저녁으로 밥을 해서 두 아들과 함께 먹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웃음도 살아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함께 밥 먹는 건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식구끼리 가끔은 다른 식구들과 함께 밥 먹는 일을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마음뿐이다. 게을러서다.



<침착하고, 밝고, 굳세게, 집주인처럼>


-양승국신부-


 

지난 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분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글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그는 독일이 낳은 대표적인 행동주의 신학자입니다. 그는 히틀러 정권이란 부당한 현실 앞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는 반 나치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히틀러의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1943년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었고, 1945년 4월 9일 히틀러 정권이 무너지기 직전 39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는 당시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 ‘침착하고, 밝고, 굳세게, 집주인처럼’ 의연하게 지낸 특별한 수인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1943년 4월, 체포된 순간부터 1945년 4월 9일 처형되기까지 약 2년간 각처의 강제수용소를 전전하면서 옥중생활을 하는 동안에 옥중에서 가족과 그의 친구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썼었는데, 이것을 편집해서 출판한 것이 ‘반항과 복종’이라는 부제목의 ‘옥중서간’입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당시의 독일의 상황을 다음과 같은 시각으로 바라봤었고, 그래서 적극적 반 나치, 반 히틀러 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나 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달려가는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으로부터 차의 핸들을 빼앗아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목사님은 지독한 어둠의 때를 살았던 분이셨습니다. 1943년 말 그는 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독방생활은 대림절에 대해 많은 것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또 희망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합니다. 굳게 닫힌 문은 오직 바깥에서만 열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문은 바깥에서만 열수 있다는 목사님의 말은 우리의 선택을 분명히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 갇힌 수많은 이들을 위해 문을 열어야 합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감방 안 어둠 속에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문을 열라’는 하느님의 희망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영혼의 깊고 깊은 방안에 갇혀 있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알패오의 아들 세리 레위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직업 그 자체의 죄의 근원임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절대 문을 열고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절치부심의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드디어 그 누군가가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누구도 열지 못하던 문, 그리도 육중하던 문이었는데, 단 한 마디 그분의 말씀에 문은 너무나도 쉽게 열렸습니다.

“나를 따라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개방적이신 분, 얼마나 화끈하신 분, 얼마나 자유로운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 하면 다들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다들 멀리 피해갔습니다. 다들 소금을 뿌렸습니다. 그만큼 세리들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세리들 역시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또, 한 번 발을 들여놓은 이상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바닥이 그 바닥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빨리 이 바닥을 벗어나보고자 각고의 노력을 다해봤지만, 그것 역시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미지근한 시궁창 물에 온 몸이 잠긴 채로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레위였습니다.

결국 그도 엄청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련한 사람이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예수님 구원의 첫 번째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세리 레위에게 다가가신 예수님, 다가가실뿐만 아니라 당신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 그를 통해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완성하시는 예수님, 부족한 우리 죄인들에게 이토록 큰 위로와 희망을 주시니 감사드릴 뿐입니다. 찬미드릴 뿐입니다.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 아무 쓸데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의 산 사귐에서 쫒아내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추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 회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한 형제의 모습으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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