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2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코 2,23-28)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당신 약속에 충실하시다. 아브라함 또한 믿음과 인내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얻었다. 신앙인은,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신앙의 선조들을 본받아 약속을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해 희망해야 한다(제1독서). 제자들이 배가 고픈 나머지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었다. 바리사이들은 이를 추수 행위로 여기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비판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기본 정신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선포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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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처럼 믿음과 인내는 결국 하느님께 상속받은 것을 얻게 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하느님의 절대적 약속 실현과 인내를 부각시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도록 격려한다(제1독서). 율법이 사람을 위해 마련된 것이지,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안식일마저 사람을 위해 있다면, 하느님의 모든 창조 행위는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법의 준수 여부 못지않게 법의 정신을 제대로 알고 지키는지를 헤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법의 정신을 헤아리지 않고서 법을 지키는 데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미카서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합니까? 번제물을 가지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까? 수천 마리 숫양이면, 만 개의 기름 강이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죄를 벗으려면 내 맏아들을, 내 죄악을 갚으려면 이 몸의 소생을 내놓아야 합니까?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6,6-8)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겉보다도 속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법에서도 내면의 정신을 헤아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은 우리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우리가 한층 더 자유롭고 기쁘게 당신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도록 이끄시는 그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그 법은 단지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이 그러했듯이, 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향한 비난의 도구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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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밀밭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배가 출출하던 제자들 몇몇이 밀 이삭을 뜯어 비벼 먹었습니다. 예전에 우리 역시 그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그 행동을 추수 행위로 간주합니다. 추수는 안식일에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밀 이삭 몇을 뜯어 먹은 것이 과연 추수 행위에 해당될까요? 법조문을 따지는 사람에게는 해당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억지 주장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하느님이 아니시면 이러한 말씀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부분에서 잣대가 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안식일 법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희생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보다 사람이 더 귀하다고 하십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백번 옳지만, 당시 지도자들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위험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신앙은 도약입니다. 건너뛰는 행동입니다. 때로는 과감한 생략이고, 때로는 과감한 투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범을 보이신 겁니다. 장애물이 없는 길은 없습니다. 고통이 없는 인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장애물이라 느껴진다면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청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우리의 구원은 다른데서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실천을 똑같이 따르는데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온 우주를 6일에 걸쳐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6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성 안에 있는 시간일 것입니다. 또한, 성경 속 창조 이야기가 창조의 과학적 근거와 법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과학은 우주의 기원을 ‘빅뱅(Big Bang)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우주는 약 150억 년 전 대폭발이 있었고, 이후 진화 - 생성 - 발전을 거치면서 은하계가 생겼고, 우리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밝힌 은하만 해도 천억 개가 넘고, 또 은하마다 별이 2천억 개나 된다고 하니, 우주는 실로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광대한 우주 속의 헤아릴 수 없는 별들 가운데, 푸르고 초록 빛깔을 띤 아름다운 별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지구입니다. 최근 지구 환경과 거의 비슷한 별이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인간 존재가 사는 지구는 여전히 유일합니다. 설령, 과학이 우주에 대하여 어떤 발견을 더 한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우주의 창조 목적은 이 작은 지구 하나를 탄생시키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 존재를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 이론이 아무리 우주를 설명해도, 자기 의식을 할 수 없는 우주는 그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달과 별, 깊은 밤의 은하수, 이 광대한 아름다운 우주가 바로 우리 인간이 없다면, 죽어 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창조의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바로 ‘나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무한한 우주의 한 중심에서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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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물러진 법
반영억라파엘신부
놀 때 놀고 일할 때 일하며, 쉬고 싶을 때 마음껏 쉬고 싶습니다. 주일 미사참례의 의무는 주님의 기도33번으로 가름하고 휴일을 즐기고 싶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어서 성당을 찾았는데 미사참례의 계명이 오히려 자유를 옭아매는 느낌이 들어 싫습니다.
교회법에서는 “미사참례 계명은 주일이나 의무축일 당일이나 그 전날 저녁에 어디서든지 가톨릭예식으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이행된다.”(교회법1248조1항)고 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사가 없는 공소에서는 공소예절(말씀의 전례)에 참례하여야 하고 공소예절도 참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개인이나 가족끼리 합당한 시간동안 기도에 몰두하도록 권장합니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 예수님께서 33살까지 사셨으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33번을 바치라는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옛날에 우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한글도 모르고, 성경도 라틴어로 된 책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대신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성당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주님의 기도33번으로 주일 미사참례의무를 대신하려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8)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쉬어야 함을 내용으로 합니다. 이는 인간이 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규정은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안식일 규정을 강화하는 가운데 본래의 의미를 잊고 자구에 매인 나머지 단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집착하여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규정들을 세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선과 생명에 보탬이 되기보다 되레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굴레와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고 하셨습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이 고해성사를 보시면서 “안식에 해서는 안 될 일,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였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규정을 생각하기보다 그 의미, 알맹이를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고 말씀 드렸더니 “요즘 법은 왜 그리 물러졌어요?” 하셨습니다.
안식을 취해야 할 주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영혼의 안식을 취하는 날로 보내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단순히 미사참례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취하고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날로 지내야 합니다.
이 날은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시며 성체성사의 양식으로 배 불리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이어야 합니다. 주일은 분명,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면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해방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확대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짐을 지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철저히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원의와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을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곧 인간을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가르치는 전권을 가진 자로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이영헌).
그러므로 보다 적극적인 마음으로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미사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안식일의 이유
-구경국 신부-
십자고상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상기시켜 그리스도의 죽음을 좀 더 쉽게 묵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고상 자체를 미신적으로 숭배하는 위험이 생길 수 있는데, 상징에 지나지 않는 십자고상이 차츰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어 결국에는 십자고상과 그리스도를 혼동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혼동은 비단 십자고상과 같은 성상뿐만 아니라 계명을 해석하는 데에서도 생겨납니다.
안식일 계명의 의미는 하루를 쉼으로써 우리들의 노동력을 회복시키거나 다음번의 노동을 위하여 몸의 상태를 조절하기 위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노동의 고역이 아니라 영원한 휴식의 기쁨을 인간의 목적으로 설정하신 하느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역사의 주인이며 세상의 창조주,
그리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연결되는 날이며 하느님의 손안에 창조된 인간이 머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은 인간의 구원과 직결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거룩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안식일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느님과 함께 머물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드릴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는 하느님의 거룩한 손길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른 날보다 더 많이 이웃을 사랑으로 배려하면서 지내야 할 것입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바리사이들, 연구해보니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안식일 규정에 대한 그들의 집착, 애정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안식일, 과연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안식일 규정, 최초의 의도는 참으로 좋은 것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안식일 날 사람들은 푹 쉬었습니다. 동시에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분께 감사드리는 표현으로 제사를 올렸고, 기도를 바쳤습니다.
이날은 힘든 노동으로 고생이 많은 노예나 가축들도 배려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이날만큼은 푹 쉬도록 여유를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안식일을 신성시하기까지 했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 여겼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런 흔적들이 잘 남아있습니다. 적들과 전쟁을 치루는 기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의 안식일 규정을 잘 알고 있었던 적들은 야비하게도 안식일 날 진군해옵니다. 적군에 맞서는 것 역시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대응하지 않습니다. 목숨까지 걸면서 안식일 규정을 지킨 것입니다.
안식일, 근본정신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확대된 안식일 규정은 사람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점차 희석되었고 점점 변질되어 갔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도록 옭아매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하신 분이리라 저는 믿습니다. 그저 자나 깨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그저 우리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내기만을 바라시는 분,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며 평화롭게 지내기를 학수고대하시는 분...
그 아들 예수님 역시 단순하셨습니다. 어렵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늘 쉽고 간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질질 끌거나 이렇게 저렇게 돌려서 말씀하지 않으시고 늘 핵심만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행동은 매사에 진실했고 생각과 말이 일치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 역시 너무나 간단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시려고 아들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분의 언행, 그분의 사고방식, 그분의 노선, 모든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