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코 2,18-22)

2013. 1. 21. 오전 6:34:31

글자





2013년 1월 21일 월요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아녜스 성녀는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반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열세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순교하였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보여 준 그녀의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하였다.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념하고 있다. 성녀는 한 마리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되고 있다.
         

김예정 서용미아녜스(010-8992-0880)축일 축하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마르코 2,18-22

말씀의 초대
대사제는 일정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첫 번째로는 하느님의 부르심이고, 다음으로는 사람들의 처지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하느님께 간구해야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대사제가 되셨고, 몸소 여느 인간처럼 살아가시며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 순종하시며 그분을 섬기셨다(제1독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활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의 생활과는 너무나 달랐다. 이 차이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단식이 아니라 혼인 잔치의 때임을 선포하신다.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새로운 백성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심을 암시하신 것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유학 시절에는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데에는 반드시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익혀야 했습니다. 예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서 낯설고 불편한,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새로움이란 대개 이렇게 낯설고 불편합니다. 그러니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으려면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가능합니다. 그러나 흔히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 삶의 테두리에서 배제해 버리기가 쉽습니다.
예컨대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나에게 불편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을 내 삶에서 배제한다면, 그것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새롭게 살려는 노력이 있으면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새로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처음으로 대하게 되는 이였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예수님에게서 당혹감과 불편함을 느꼈고, 시기와 미움이 솟아났습니다. 그들이 느낀 불편함을 이겨 내고 자신들을 새롭게 했다면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새로운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

반영억신부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어떤 못된 습관을 관행이라고 합리화시키는 고집을 피워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갇혀 있는 만큼 새로운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단식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을 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하는 행위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생각해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
(마태9,13)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마태6,17-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신 주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굶는 것을 단식이라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에로, 그리고 이웃사랑에로 초대하십니다. 구체적 이웃사랑 실천이 없는 단식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진 단식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의미 있는 단식, 알맹이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사랑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유다인들에게 있어 단식은 전통적이고 아주 의미 있는 종교 행위였습니다. 레위기 16장 29절에 따르면 유다인들은 일 년에 한번 속죄의 날, 즉 일곱째 달 10일을 의무단식일로 규정했습니다. 그 외에도 기근이나 전쟁, 가뭄과도 같은 큰 재난이 다가왔을 때 동참과 속죄의 표시로 단식일을 선포하곤 했습니다.

    당대 율법의 준수에 있어 모범적이었던 바리사이들은 루카 복음 18장 12절에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바리사이들에게 있어 단식은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신심행위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극단적인 청빈생활로 유명한 예언자였던 만큼 단식을 밥 먹듯이 했었기에 그의 제자들 역시 스승의 영향을 받아 자주 단식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단식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4장 2절에 보면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 들어가셔서 40일 동안이나 단식을 하시며 기도에 전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식을 반대하지 않으셨으나 바리사이들처럼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단식, 의미 없는 단식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철저한 단식 행위 그 자체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점점 왜곡되어만 갔습니다. 왜 단식을 하는지, 무엇을 위해 단식을 하는지가 아니라, 누가 더 단식을 철저하게 잘 지키는지, 누가 혹시라도 숨어서 뭔가를 먹지는 않는지, 보다 바람직한 단식 방법은 어떤 것인지에 온통 마음이 쏠렸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이 단식을 실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느님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지은 죄에 대한 속죄의 표시로 단식을 했습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더 잘 식별하기 위해 명료한 의식을 지니려는 표시로서 단식을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육체적 결핍을 체험함을 통해 맑고 깨어있는 영혼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단식했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개입, 하느님의 도래,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보다 간절히 기다리는 표시로서 단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토록 고대했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눈앞에 등장하셨습니다. 잔치의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까지 주인공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성대한 잔칫상 앞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예수님께서 등장한 이상 더 이상 기다림은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잔치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입니다. 그분의 오심을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고 차려진 만찬을 최대한 만끽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였습니다. 더 이상 단식이나 고행이 아니라 환희와 기쁨, 만찬을 즐기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의무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아직도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고 불평불만 가득한 얼굴로 따지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정말이지 너무나 얼토당토않은 말입니다. 자신들이 실천하는 단식행위를 통한 경배의 대상이신 예수님께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출현으로 이제 낡은 세상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죄와 죽음은 사라지고 해방과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은혜롭게도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그 크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매일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식탁에 참여하는 우리에게 더 이상 고행과 단식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크신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입니다. 큰 죄인에게 끝없는 인내를 베푸시는 하느님 자비에 대한 찬양이요 기쁨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 단식하리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단식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8절) 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9-20절)라고 말씀하셨다.

식사를 거르는 것만 단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된 단식은 우리의 악습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밥이나 음식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진짜 죽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루카 4,4)고 하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19절) 이스라엘 성조들에게 구세주가 처음 약속된 때부터 성도들은 눈물과 비탄으로 그분을 기다렸다.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뒤로도 신자들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영으로 사랑했던 분이 육으로도 곁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신랑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우리는 단식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21절) 헌 옷과 헌 가죽부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계속 세속의 것,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길을 고집하며 헛된 것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말을 들으면 자기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놀라 화내며 선포된 말씀을 멀리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2절) 포도주는 내적으로 새롭게 해 주고, 옷은 외적으로 감싸준다. 둘 다 영성과 관련된 말이다. 옷은 세상을 비추기 위하여 실천하는 선행을 가리키고, 새 포도주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열정을 뜻한다. 이 두 가지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내적인 영적 쇄신을 이루게 된다.

또 새것(새 천 조각, 새 포도주)과 낡은 것(낡은 옷, 낡은 가죽부대)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혁신적이고도 위력적이어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에 맞갖은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항상 기쁘고 주님으로 충만한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자.

 


 

 오늘 저녁에 우리가 나눌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의 복음은 새술과 새 가죽부대의 비유가 되겠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포도주를 보관하는 방법은 가죽의 가장 자리를 기워 방수가 되게 한 가죽부대라고 불리는 자루에 보관하였습니다.
새 술은 아직 발효가 되지 않았으므로 계속해서 발효가 이루어지게 되고 그러면 포도주가 팽창하기 때문에 팽팽해 집니다. 그런데 헌가죽부대는 이미 여러번 사용했기 때문에 늘어날 대로 늘어나서 더 이상 늘어날 신축성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게 되면 그 헌 가죽부대는 신축성이 없어서 터지고 맙니다. 가죽부대가 터지면 담아놓은 포도주는 쏱아져서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했습니다. 부득이 하게 헌 가죽부대를 사용하려면 이미 발효가 다 끝난 오래된 낡은 포도주를 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지나간 것을 유지하고 붙잡아 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과거지향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새로운 것을 향하여 도전하거나 창조적인 일은 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뒷북이나 치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뒷북치고 다니면 좋을게 없습니다. 늘 손해만 보게 됩니다. 뒷북치는 사람들은 앞북친 사람들이 휩쓸고 지나가면 나중에서야 뛰어들어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낡은 부대와 같은 사람입니다.

원래 터지기 직전의 신발이 가장 편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편하다고 터지기 직전의 신발을 신고 길을 가게 되면 도중에 신발이 터져서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세계 최초로 카메라 필름을 개발한 아그파는 1867년에 설립돼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굴지의 유럽회사였습니다. 이 회사의 매출액과 이익은 2001년 최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2000년 즈음부터 디지탈카메라의 등장으로 급격히 쇠락하다 2005년 파산되고 말았습니다. 최절정기에서 파산까지는 불과 4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뒤늦은 응전이 쇠략의 원인이었습니다.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은 어떻습니까?
특히 GM같은 회사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크고 무거운 차만을 고집하다가 결국 날렵하고 가벼운 차를 앞세운 아세아와 유럽차에 의해서 파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제때에 깨어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옛것을 유지하고 지나간 것의 끝을 붙잡아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창조적인 일과 새 시작의 앞자리에 서서 일처리를 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을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 새 부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대가 나빠서 새 술을 담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릅니니다. 적응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옛것을 무조건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익숙해서 편하기 때문입니다. 습관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 하던대로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굳어지고 심해지면 옛것에 매인 보수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과거에 매여서 새것을 무조건 배타하고 무조건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옳은가 그른가는 둘째 문제입니다. 우리의 전통을 버릴 수가 있느냐하면서 잘못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말씀 다음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 6:39). 묵은 것, 낡은 것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은 그것만이 좋다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유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 시대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들의 유전과 전통을 더 소중히 여기면서 그것을 위해서라고 하면 생명을 바치면서 고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낡은 가죽부대를 지키려다가 새 술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도록 하는 하나님 대적을 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무엇을 하나 바꾸려고 하면 참으로 힘이 듭니다.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어럽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야 하는데 도리어 교인들이 더 보수적이고 교인들이 더 회귀적이고 교인들이 더 과거에 얽메여 살아갑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새술을 원하면 낡은 가죽부대를 버려야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뒷전으로 물러나 있지만 삼성 이건희회장은 삼성의 글러벌 기업화를 위해서는 "마누라 외에는 모든 것을 다 바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일본의 모든 가전 제품을 만드는 회사를 다 합친 것보다 삼성의 수익이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은 일제 소니같은 가전 제품이 좋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삼성보다 더 싼 제품이기 때문에 삽니다. 그런시대가 되었습니다.

삼성을 무조건 싫어하고 이건희 회장 같은 이를 무조건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가 대한민국은 몰라도 삼성은 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과감하게 새것을 향한 도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는 믿기를 원하면서도 세상 것은 버리기 싫고 예수의 은혜를 받기를 원하면서 자신의 고집은 버리기 싫어하며 이것도 섬기고 저것도 섬기는 두 주인을 섬기는 종과 같으며 두 남편을 섬기는 여인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에는 원수처럼 여기고 물고 뜯던 싸우며 미워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형제처럼 지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옛날에 매여서 언제 무슨 일로 네가 나한테 이렇게 했지 하고 앙심을 품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그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는 과거로 버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과거 때문에 현재와 미래와 영원한 천국을 잃어버리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민족은 55년 동안 옳다고 여긴 것을 이제 버려야 합니다. 이제는 남북을 형제로 받아들여야 하고 용서를 해야 하고 전쟁없이 공존과 공생과 공영을 하는 가운데 상처없이 평화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삼천리 금수강산 어느 곳 하나를 파손하면 결국 그것은 우리 모두의 것을 잃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남과 북은 언젠가는 하나가 되어야 할 한 민족이고 하나의 땅인 것입니다. 이런 일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면 내가 일생동안 옳다고 여기며 살아온 것도 단숨에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어야 그것이 온전힌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수십년 동안 혹은 일생동안 옳다고 여긴 그것만을 고집하고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고 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에 역부족인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은 새 술과 같습니다. 이 새술을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일생동안 생명처럼 고수해 온 것들도 벗어던져 버리고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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