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23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
(마르3,1-6)
말씀의 초대
창세기에 나오는 멜키체덱 사제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그의 기원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운 인물로 받아들여져 왔고, 구약에서부터 이미 종말론적 메시아와 관련해서 거론되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멜키체덱이 참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다고 밝힌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다. 예수님의 관심은 한 사람의 구원 여부에 있었지만, 바리사이들은 그보다 법의 준수 여부에만 관심을 둔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질문을 던지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인도에서 원숭이 잡는 법’이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냥꾼이 목이 가는 두꺼운 유리병에 땅콩을 넣고 원숭이들이 노는 숲속에 설치해 둡니다. 그러면 원숭이들이 와서 병에 손을 넣어 그 속에 있는 땅콩을 움켜잡고는 손을 빼지 못합니다. 나중에 사냥꾼들이 다가와도 손을 펴서 도망치면 될 텐데, 땅콩을 움켜잡은 손을 펴지 않으려다 결국 잡히고 맙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마치 우둔한 원숭이의 이야기를 연상케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치유는 그저 오그라든 손 정도를 펴는, 예수님의 기적들 가운데 가장 작은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치 큰 기적이라도 행하시는 것처럼,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회중 한가운데로 불러 내시고, 그것도 안식일에 그의 손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치유의 목적은 다른 데 있어 보입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 스스로를 구속하는 족쇄가 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히 안식일과 관련해서는 39개나 되는 금지 조항이 붙어 있을 정도로, 그들의 종교적 생각과 태도는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들었습니다. 율법이 주는 본디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문자에만 얽매여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그라든 손을 펴시며 여기에 도전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우둔한 원숭이처럼 묶여 있는 ‘너희의 옹졸한 마음과 오그라든 손을 펴라.’는 것입니다. 손을 펴야 하느님의 은총도 받을 수 있습니다. 옹졸한 마음을 버려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작은 기적이지만, 우리에게는 가장 큰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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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나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시큰둥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선한 행동은 깎아내리고, 착한 행동에는 토를 답니다. 칭찬은 하지 않으면서 따지기는 무척 좋아합니다. 부정적 시각이 늘 우세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바리사이들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려 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실제로 고쳐 주실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언제 예수님을 다시 만날지 모릅니다. 그는 애절하고 비장한 눈빛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실눈을 뜨고 있습니다. 고쳐 주시기만 하면 눈을 크게 뜨고 외칠 겁니다. 안식일에 ‘의료 행위’를 했다고 따질 참입니다. 바리사이 역시 신심 깊은 신앙인들입니다. 그런데도 평생을 ‘오그라든 손’으로 살아야 하는 이웃의 아픔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믿음에 사랑이 빠지면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으로 가기 쉽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웃을 해치는 폭력’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삶의 에너지’를 충족시켜 줍니다. 오그라든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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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한 마리가 붙잡혀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사슬을 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는 일입니다. 독수리의 매서운 눈과 날카로운 부리가 부르르 떨었지만 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매일 힘을 써 봤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점차 독수리는 체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흘렀습니다. 독수리도 힘이 떨어졌지만 쇠사슬도 녹이 슬었습니다. 이제 단 한 번 독수리가 안간힘을 쓴다면, 온몸으로 날갯짓을 한다면 사슬은 끊어지겠건만, 독수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체념 때문입니다. 그는 포기와 좌절이라는 또 다른 사슬에 묶인 겁니다. 날기를 포기한 독수리는 동물원에서 죽습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매서운 눈과 날카로운 촉각으로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줄지 지켜보고 있는 겁니다. 그때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반대자들이 보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기적을 여러 번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한 번이라도 기적을 보고 마음을 열었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들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자들에게 질문합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그들은 답이 없습니다. 기적을 보고도 도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갈 곳은 어디입니까? 파멸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강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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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손을 뻗다’는 말씀은 오늘의 복음 외에도 여러 번 나옵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경우 세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나병 환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의 몸에 ‘손을 뻗으시며’ 고쳐 주시는 장면입니다(마태 8,1-4 참조). 여기서 손을 뻗으신다는 것은 다른 이의 고통에 마음을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거센 바람을 보고서 두려워하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예수님께서 손을 뻗으시는’ 장면입니다(마태 14,29-31 참조). 여기서 손을 뻗으신다는 것은 혼란에 빠져 있는 사람을 향한 용기 있는 헌신입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이 회당에서 가르치고 있는 예수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있다고 말할 때의 일입니다(마태 12,46-49 참조).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나는 대신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손을 뻗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여기서 손을 뻗으신다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부르시는 초대의 몸짓입니다.
결국 손을 뻗는다는 것은 다른 이와 온전히 하나가 되고자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서는 헌신이요 열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임에도 몸과 마음이 아파 괴로워하는 이에게 손을 뻗으시어 그를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율법주의에 빠져 고통 받는 이에게도, 예수님께도 손을 뻗지 못하였습니다. 과연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먼저 손을 뻗고 있습니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반영억신부
얼음위에서 놀던 어린이가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구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몸을 던져 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탈출31,14). 유다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법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유해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불평합니다. 이렇게 보면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더 문제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보고 함께 기뻐하기보다 외적인 규정을 어겼다는 사실 하나에 집착해서 예수님을 해칠 궁리를 하는 사람은 바로 시기 질투하는 나의 모습입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는 교만의 죄를 범하고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한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펴주시길 기도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칠 수 없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위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1,5)
사랑합니다.
“손을 뻗어라.”
<‘쿨’하신 예수님과 ‘찌질이’인 바리사이들>
양승국신부
예수님, 그분의 행적 하나하나를 두고 묵상할 때 마다 드는 생각인데, 참으로 멋진 분이십니다. 요즘 아이들 표현대로 ‘쿨’하십니다. 말씀이 어찌 그리 시원시원하신지요? 하는 행동들은 어찌 그리도 거침없으신지요?
말 한 마디를 준비하기 위해 두통까지 앓은 우리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느라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들, 이것 저 것 따지느라 안절부절못하는 우리와는 격이 다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행동은 당시 ‘쫌생이’들이었던 바리사이들, ‘찌질이’였던 율법학자들과는 완벽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를 짜서 예수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관찰했습니다. 작은 건수라도 하나 건지면 호들갑을 떨며 난리들을 쳤습니다.
오래도록 따라다녔지만 별 소득이 없었는데, 오늘 드디어 한건 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중대한 안식일 규정 하나를 어긴 것입니다. 회당에 들어가시던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 하나를 발견하시고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그를 치유시켜주셨습니다.
쫌생이들과 찌질이들은 속으로 희희낙락했습니다. ‘앗싸!’하면서 탄성을 올렸습니다. 드디어 윗선에 보고할 거리가 생긴 것에 대해 크게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호감을 지니고 있었던 당시 백성들도 예수님의 안식일 규정에 대한 도전에 꽤 난감해하고 있었습니다. 걱정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안식일 규정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주류층 인사들은 여기에 목숨까지 걸고 있었습니다.
이런 안식일 규정을 예수님께서는 하나하나 깨트리십니다. 깨트리다 못해 짓밟으십니다. 이러한 안식일 규정의 파기는 어떻게 생각하면 유다 신앙의 본산에 대한 정면 공격이자 도전이었기 때문에 군중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전혀 위축되지 않으십니다. 너무나도 당당하십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본주의’를 복원하십니다. 그간 자질구레한 율법조항에 짓눌려 잔뜩 실추되었던 인간 본래의 존엄성과 가치, 우위성을 다시 한 번 재생시키십니다.
너무나도 평범하고도 당연한 말씀을 통해 극단의 율법주의에 휩쓸려 중심을 잃었던 유다사회에 일침을 가하시며 쇄신을 촉구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어서 손이 오그라든 환자를 회당 한 가운데로 나오게 하십니다. 이 환자는 오그라든 손 때문에 평생 삶의 변방에서 살았습니다. 불구로 인해 잔뜩 위축되어 언제나 주변인으로 살아왔습니다. 늘 주변 사람들 시선이 부담스러웠기에 사람들 뒤에 숨었습니다.
육체적 불구는 단순히 육체적 불편과 고통만 수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따르는 정신적, 심리적 고통은 훨씬 깊이가 더합니다. 사회적 소외, 인간관계의 단절을 수반하기에 그리도 잔인하고 끔찍한 것입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이제 당당하게 어깨를 펴라는 권고이십니다. 남의 시선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부탁입니다.
이윽고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어라.”
결국 예수님은 치유를 통해 새 삶을 되찾아주시는 희망의 하느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치유를 통해 구원의 날개를 달아주시는 해방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참된 해방자이십니다. 모든 인간적인 억압과 굴종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해방자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과제 한 가지를 안겨주십니다.
이겨낼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악, 죄, 질병, 가난, 고통, 전쟁, 기아, 위선, 좌절, 이기심...과는 철저히 맞서서 싸우는 노력입니다. 아울러 극복할 수 없는 한계 앞에서는 하느님께 철저히 의탁하고 봉헌하는 노력입니다.
연중 2주간 수요일 - 죽이는 것이 옳으냐?
~전삼용 (요셉) 신부 ~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다보니 두 가지 씁쓸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재판을 받던 한 고등학생이 합의금과 신변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경찰조사결과 이 학생은 2007년 인터넷 리니지 게임을 하던 중 상대 게이머인 서울의 김모 변호사에게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서울중앙지법에서 재판을 받다 천만원 정도의 합의금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경찰은 학생이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민하다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망 원인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용산 철거민 강제진압 중 6명이 사망하고 경찰과 철거민 20여명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소식입니다. 경찰은 철거민들이 화염병 등을 만들기 위해 건물 안에 두었던 시너에 불이 붙으면서 경찰과 철거민들이 화상을 입었다고 밝혔습니다. 경찰은 그 전날 이미 옥상에 시너통 70여병을 보관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어 그 전날부터 대형 참사가 일어날 것이 예견되어 있으면서도 진압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cyworld 뉴스)
누구나 이런 뉴스들을 접하면서 마음이 아파오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변호사가 더 잘못했다, 혹은 공권력이 더 잘못했다고만은 하지 않습니다. 학생도 어른에게 욕을 했으니 잘못이 있고 무력시위를 한 시민들도 작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욕을 하는 것도 잘못이고 무력으로 시위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러나 더 큰 잘못은 변호사에게 욕을 했다는 것과 공권력에 저항했다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바위이고 약한 자들은 계란에 불과합니다.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어리석은 행위를 한 것이 더 큰 잘못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나라의 법과 권력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로마 13,1-2) 아마 이들은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기에 그런 심판을 받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악법도 법이다.’ 하며 스스로 독극물을 마신 소크라테스가 그래서 더 위대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춘기 학생이 욕을 한 번 한 것이 법적으로 따져 천만원에 해당한다면 그것 때문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아픔은 과연 얼마나 되고 누가 보상해 주어야 할까요? 그것이 과연 평생 법을 공부한 사람의 정의일까요? 또 당장 집을 잃고 살길이 막막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화염병을 준비했던 것이 목숨을 빼앗을 정도로 큰 죄였을까요? 누가 경찰 특공대에게 부모님과 같은 분들을 강제진압하게 만들고 또 그들이 던지는 벽돌에 상처를 입도록 만들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예수님은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그 분이 병을 고쳐주시는지 안 고쳐주시는지, 즉 안식일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따라서 좋은 일을 하든, 남을 해치는 일을 하든, 목숨을 구하든, 죽이든 관심도 없고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지키는 것보다는, 그래서 세상에서 살아남기 보다는 그 법을 어기면서도 사람을 살리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을 택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음의 길로 가시게 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사실 예수님은 참 사랑의 정신을 잃은 법을 바로잡으려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법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완전할 수 없습니다. 법이 참 의미를 잃고 특권층만을 보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면 그 특권을 누리는 이들은 참 정신보다는 법을 더 중요시하게 되어 위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이 때 사람을 살리고 법대로 처리되어 죽는 쪽을 택해야 할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