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간 목요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대사제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직무를 맡으시고 몸소 제물이 되시어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시다(제1독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들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사방에서 몰려온 것이다. 그들은 병고에서, 더러운 영에서 벗어나고 싶어 예수님이 필요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보아 주긴 하셨지만, 아직 당신의 존재가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으신다(복음).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까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러 갈릴래아 호숫가에 모입니다. 당시에는 자동차도 없었으니,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과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오늘날의 사업가와 같으셨다면, 그 정도의 정성을 들인 이들에게 “나에 대해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라.” 하시며 널리 알리기를 종용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반대로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왜 그러신 것일까요?
마태오 복음 7장 24절부터 27절까지를 보면, 두 개의 집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모래 위의 집과 반석 위의 집입니다. 둘 다 평상시에는 멀쩡하겠지만,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치게 되면, 모래 위의 집은 무너지고, 반석 위의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비유를 오늘 복음에 대조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당장의 필요에 따라 예수님께 몰려든 이 많은 군중의 믿음은 마치 모래 위의 집과도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의 필요에 따라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호소하고 그 어려움이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겪게 될 어려움이나 고통이 있다면 썰물처럼 사라질 사람들인 것입니다(요한 6장 참조).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고 싶었던 것은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어려움까지도 감수할 수 있는 반석 위의 집과 같은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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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갈릴래아에서뿐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옵니다. 몰려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 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지요?
예수님을 찾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 다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인생이라는 척박한 ‘광야’에서 느끼는 목마름 때문일 것입니다. 영적이든 육적이든, 그들이 안고 사는 온갖 삶의 갈증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서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갈망하는 그 자체가 이미 기도였고, 그분과 만남은 곧 구원과 해방의 체험이었습니다.
기도는 예수님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분을 갈망하며 그분 앞에 머무는 것입니다. 오늘날 생활이 아무리 풍요해지고, 과학과 의술이 발달했어도,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두렵고 황폐한 광야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외로운 광야의 삶을 달래려고 세상의 거짓 기쁨과 위로 속으로 몸을 숨깁니다. 현대판 더러운 영은 거짓이 진짜가 되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그분 안에서 영적 힘을 얻지 못하면 금방 이 더러운 영에 오염되고 맙니다. 거짓을 진짜로 믿고 살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직장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혼자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커다란 호숫가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드문드문 자리 잡고 앉아있던 ‘꾼’들이 그날따라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 서둘러 낚싯대를 두 대 드리웠습니다. 수시로 떡밥을 갈아주며 ‘대어’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때마침 호수 건너편으로 붉은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로 새떼들이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산들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훈훈한 봄바람에는 그윽한 야생화 향기가 묻어있었습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홀로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그림 같은’ 오후였습니다.
호수, 생각만 해도 마음이 잔잔해집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강이나 바다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호수 특유의 맛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갈릴래아 호수 역시 그랬습니다. 언젠가 직접 제 눈으로 확인했던 갈릴래아 호수,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랜 여독이 눈 녹듯이 풀릴 정도로 황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도시나 광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푸른 초원이며, 가슴이 탁 트이는 바다 같은 호수며, 여러 종류의 야생화며, 대추야자 나무...마음속이 다 환해졌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태와도 같은 장소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첫 제자단을 부르신 장소도 갈릴래아 호숫가였습니다. 십자가 죽음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재회했던 만남의 장소도 갈릴래아 지방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래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의 주요 교통수단은 당연히 거룻배였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고 갈릴래아 이 지방 저 지방을 두루 다니시면서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호숫가에 묶여있던 배에 올라 밀물처럼 밀려드는 군중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셨습니다.
때로 너무나 많은 인파에 피곤해지셨던 예수님은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피해가셨습니다.
언젠가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 위를 걷는 시범도 보여주셨습니다.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골란 고원으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과 헤르몬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찬 바람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만나면 심한 기류의 이동으로 금방이라도 잡아 삼킬 듯한 큰 파도가 생성되기도 하는데, 그로 인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큰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제자들을 위해 풍랑을 잠재우는 기적을 행하셨지요.
오늘 마음으로나마 예수님과 함께 갈릴래아 호숫가로 여행을 떠나보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지금 갈릴래아 호숫가, 푸른 풀밭 위에 앉아있습니다. 화창한 봄날 오전입니다. 내 주변에는 키 작은 꽃들이 지천입니다. 때마침 호수로부터 미풍이 불어옵니다. 멀리 배 위에는 예수님께서 서계십니다. 산들 바람을 따라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사랑한다. 내 아들아. 사랑한다. 내 딸들아.”
“너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사랑, 내 귀염둥이들이란다.”
“안심하거라. 평안하거라. 너희는 구원 받았단다”
“이제 그만 내려놓거라. 이제 그만 떠나 보내거라.”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반영억신부
소문은 발 없이 천리를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문은 퍼지는 과정에서 불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배불리 먹게 하고 병을 낫게 하는 것에 매력을 느낀 탓이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예수님의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받았고, 당시 유다의 지도자층에 속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헤로데 사람들에게는 완강히 거부되었습니다. 결국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모의하였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골치덩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의 속을 꿰뚫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제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체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악령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 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욕심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통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 본래의 모습은 어디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밑바닥에 떨어져 모든 것을 잃고 후회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2)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악령들은 아부하느라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들먹였지만 그 속을 알기에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결과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덩어리 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을 할 때입니다. 기도하며 갈망하다 보면 은혜를 넘치도록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받기 위해 매달리게 되면 참 주님을 만나는 것이 그만큼 어렵게 됩니다. 기도의 즉각적인 응답이 없어도 그 안에 주님의 뜻이 담겨 있고, 나와 거리를 두시는 것 같을지라도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어떠한 경우에도 실망하지 말고 늘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