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7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안토니오 성인은 3세기 중엽 이집트의 중부 지방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상속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다. 많은 사람이 안토니오를 따르자 그는 수도원을 세우고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이어 갔다. 성인은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릴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4세기 중엽 사막에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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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그는 곧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마르1,40-45)
말씀의 초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갖가지 시련을 견디지 못해 하느님을 불신하고 배반하였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우리 신앙인은 옛 백성이 보였던 그러한 불신의 마음을 경계하고 늘 그분의 목소리에 성실히 응답하여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그를 깨끗하게 치유해 주신다. 그분께서는 그가 나병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외톨이로 버림받으셨다는 것을 잘 아셨기에, 사제에게 가서 깨끗하게 되었음을 선언받도록 그를 이끄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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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이제 부정한 사람이 깨끗한 사람으로, 부족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으로, 상처투성이로 다른 이들까지도 부정하게 만드는 사람이 상처가 나아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나병은 이미 극복된 병입니다. 그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날에도 자신을 ‘부정한 사람’으로, ‘부족한 사람’으로, 너무나 상처투성이로 여겨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 상처를 전달해 버리는 ‘죄인 덩어리’로 비하시키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상처에 얽매여 스스로를 소외시켜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자신의 상처를 자꾸 다른 사람에게 공격적으로 전이시키는 바람에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손을 내미시어 나병 환자에게 대신 것처럼 그들에게 손을 내밉시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따스함을 전합시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손을 내민다고, 그의 상처에 손을 댄다고 그 상처가 무조건 낫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역시 그 상처에 감염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그 사랑과 인내, 애틋함으로 손을 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감염되지 않고 그 사람의 상처가 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누구나 한 번쯤은 감상했을 영화 ‘벤허’(Ben-Hur)의 한 장면이 기억납니다. 나병에 걸린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 환자들과 함께 어느 동굴에서 마치 짐승처럼 모여 사는 처참한 모습을 담은 장면입니다. 그 모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아들을, 그리고 사랑하는 오빠를 만났지만, 얼굴을 마주하지도, 반갑게 포옹도 해 보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숨어야 하는 기구한 모습이 영화에서 잊지 못할 한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나병 환자들은 이렇게 소외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고통을 안고 살며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거부당하는 나병 환자들에게, 예수님만은 그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다가가 손을 대시며 치유해 주십니다. 나병은 당연히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받는 천벌이라고 여겼던 당시 유다 사회의 통념을 무너뜨리고, 예수님만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보여 준 ‘하느님 사랑 얼굴’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본 자비와 사랑의 예수님 모습을 믿고 희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우리는 이런 하느님 사랑 속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그분의 모습을 우리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사랑의 의무’를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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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나병 환자는 병이 사라진 ‘그 순간의 기억’을 평생 간직했을 것입니다. 어떤 체험인데 잊을 수 있을는지요? 그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자기 몸에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았으니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감동과 격정이 지나간 뒤의 평온한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은 정신까지 바뀌게 했습니다. 더할 수 없는 기쁨과 자신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달라진 그는 ‘새로워진 운명’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 뒤 그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평생 주님과의 만남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적은 ‘기억하고 있어야’ 은총이 됩니다. 그때의 감격을 찾아낼수록 그만큼 그분의 힘을 가까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적은 ‘한순간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나를 이끌어 가는 은총입니다. 끊임없이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축복의 샘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기도가 어찌 그 환자 한 사람만의 기도이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기도입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라도 사랑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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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들을 낫게 하시던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 환자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립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기도했으며 누가 그를 위해 희생했는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는 우연히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그렇게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모호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예의를 갖춘 말입니다. ‘저는 낫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제 뜻보다 스승님의 뜻이 더 중요합니다.’ 이러한 뜻의 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마음에 호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낫게 하십니다. 숱한 병자들을 치유하셨기에 그 사람의 치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나병은 보통 병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나을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하늘이 내린 병이었기에 하늘의 뜻이 담겨야 나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병을 예수님께서 낫게 하신 겁니다. 그가 얼마나 감동하였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침묵하라 했지만 그는 외치고 맙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 주위에도 몹쓸 병에 걸린 이들이 많습니다. 현대 의학으로도 어찌할 방도가 없는 병에 걸린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능력이 닿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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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벌 (天罰) 과 끝없는 부모님 사랑
<독서 : 히브 3, 7 – 14 / 복음 : 마르 1, 40 – 45>
고대에 나병은 불치병으로 하늘이 내린 벌, 곧 천형 (天刑) 으로 간주되었고, 하느님만이 고칠 수 있는 병으로 여겼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천형 (天刑) 에 대해 다른 말로는 천벌 (天罰)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몇 년 전 범행을 부인하는 뺑소니 사건을 맡아 처리한 사건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뺑소니 교통사고를 낸 피고인은 뺑소니 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명백한 증거가 나오자 자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피고인의 노모께서 지병 악화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피고인은 잠시 석방되어 장례를 치렀습니다. 다시 구치소에 들어가야 할 때 피고인은 두려워했습니다. 제가 “당신이 믿는 하느님을 믿고 들어가라.” 고 했습니다.
저는 형선고를 앞둔 시점에 ‘피고인은 어머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불효자식이다. 동방예의지국에서 부모님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것은 자식의 도리를 못한 것으로, 하늘에서도 이미 천벌 (天罰) 을 내렸다. 천벌을 받은 피고인에게 굳이 사람인 재판장이 더 벌을 줄 필요가 없다. 피고인을 집으로 돌려보내 부모님께 지은 죗값을 사회에 갚을 방법을 찾으면서 살도록 해달라.’ 는 취지의 고민 어린 변론요지서를 제출했습니다. 그 내용이 재판장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되어 찾아온 피고인에게 저는 “당신은 구원하시는 하느님과 돌아가시면서까지 당신을 위해 사랑의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신 어머님의 은공을 잊어서는 안 된다.” 라고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오묘한 섭리로 우리의 어려움과 마음의 병을 깨끗하게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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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은지심(惻隱之心)
-박기호 신부-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제아무리 영성의 대가요 말씀의 탈렌트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의 사람됨이 부족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강론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데 그와 함께 생활하거나 일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흔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선적이고 괴팍하고 손님에겐 친절하지만 가족에겐 짜증내고….
그런 류의 사람은 참 힘듭니다. 인격이 ‘덜된 사람’입니다. 리가 좋아서 ‘난 사람’은 되었지만 ‘인간됨’은 멀었다는 뜻입니다.
예수살이가 ‘예수의 인간성 닮기’를 수덕생활의 방법론으로 삼는 것은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이 되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됨에 완전한 분이십니다. 더 이상 좋은 품성을 찾을 수 없기에 하느님이 아니고선 그런 인간성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인간이면서 하느님’이십니다.
유학 사상에서는 ‘사람 됨’이 교육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의염치를 아는 인의예지의 인간을 만드는 것이 교육입니다. 인의예지의 품성은 인간의 네 가지 본성,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에서 나온다고 보았는데 그의 자양을 강조했습니다. 그중 품성론의 으뜸되는 것이 측은지심입니다.
타인의 불행한 처지를 자기 처지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의 힘은 바로 이 측은히 여기며 손을 내미는 데서 온 것입니다. 인간의 좋은 품성은 하늘이 알아주는 덕이고, 긍휼한 마음은 기적을 이끌어내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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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용서와 헌신의 삶
-이기양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한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병 증세가 깨끗이 사라졌지요. 예수님께서는 치유된 나병환자를 보내시며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1,44)
그러나 나병환자는 이 놀라운 치유 기적을 온 동네에게 퍼뜨렸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오늘 복음을 대하면서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나병환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대목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엄하게 이르셨을까요? 우리는 나병환자가 한 것처럼 온 동네에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 오히려 더 예수님을 잘 알리는 일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나 말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장면이 수시로 나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30)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지요. 그 이유를 알면 마르코 복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천 년 동안 메시아를 고대하였습니다.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켰던 모세처럼 로마의 지배 하에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지요.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여 부유하고 강한 일등 국가로 만들어줄 메시아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연약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마땅히 거처할 곳도 없이 이 세상의 삶을 마구간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 받은 사람들과 일생을 함께 하셨지요. 싸워서 이기기보다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으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당신의 몸과 피를 아낌없이 내어 주시며 성체성사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낮은 이러한 모습을 당신의 삶으로 직접 보이시면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를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3-45)
예수님께서는 부와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권력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권력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 그리고 아낌없이 주는 삶이 세상을 구원하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가 권력과 부의 메시아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와 아낌없이 내어주는 메시아임을 드러내신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메시아관이 전달되는 것을 막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 참된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마르코 복음 사가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함구령의 이유이고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메시아관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모시고 따르는 우리는 세상의 논리대로 힘과 권력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용서와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평화를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마치 우리 몸의 혈액이 하는 역할과도 비슷합니다.
우리 몸의 혈액에는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혈장이라는 성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백혈구는 우리 몸에 어떤 이상한 침입자, 병균이 들어오면 얼른 그 침입자를 처리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백혈구가 어떤 방법으로 침입자를 처치하는지 아십니까? 얼핏 생각하면 아주 강력한 방법을 쓸 것 같지요. 그런데 과학자들에 의하면 백혈구는 침입자를 향해 절대 무리한 힘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백혈구는 그저 그 침입자를 품에 꼭 껴안아 버린다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백혈구에게 안긴 그 침입자는 그냥 녹아버리고 말지요. 백혈구에는 보기 싫든 지저분하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껴안아서 친구로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골수에서 태어나 폐에 가서 산소를 받아들여 자기 몸에 지니는 적혈구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산소를 얻어야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우리 몸의 모든 기관에 있어서 산소는 생명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적혈구는 언제나 이런 생명의 산소를 풍성하게 얻어서 가지고 다니다가 혈액 속에서 산소가 필요한 곳이 있으면 아낌없이 다 전해 줍니다. 단 0%도 남기지 않고 100% 다 넘겨주지요. 그리고는 4일쯤 살아 있다가 비장에 가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고 합니다.
우리 몸의 모든 것들은 세포 하나까지도, 자신을 위해 사는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백혈구는 모든 것을 감싸주는 반면, 적혈구는 모든 것을 나누어 줍니다. 그런 혈액이 바로 우리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고 있지요. 내가 남을 위해 100%로 봉사하듯이 남도 나에게 100% 봉사한다는 원리가 우리 몸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은 세상 사람들처럼 힘과 미움과 보복의 논리가 아니라 비록 고통이 따르더라도 그 모든 것을 포용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
예수님의 이 말씀이 바로 부활의 길이요 영생의 길임을 깨닫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어라
반영억신부
저는 한때 허리가 많이 아팠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낫지 않았습니다. 한의사에게 침을 맞기도 했고 통증을 완화시켜 주는 약을 먹기도 했습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매일 같이 ‘주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살려주세요.’ 하고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아프고 나서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더 알게 되었습니다.
편찮으신 분이 많습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여전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수 있으시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 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써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