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5일 금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바오로 사도는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교육받은 철저한 유다인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그였으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극적으로 회심한 뒤 그리스도의 바오로 사도로 변신하였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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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마르코 16,15-18)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동족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를 밝힌다.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데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는 그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제1독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마지막 당부는 장엄한 선포였다. 그것은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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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던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던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하늘에서 큰 빛이 비추는 것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으며, 그 사건을 통해 회심하였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복음을 만방에 전하게 된다(제1독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신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하실 것이며, 그들은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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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 한 마리가 어디론가 가던 중 쉬고 있었습니다. 산비둘기가 묻습니다. “어디로 가는 중인가요?” “이곳이 싫어 동쪽으로 가고 있답니다.” 올빼미는 힘이 없습니다. 산비둘기가 그 이유를 묻자, 올빼미는 목쉰 소리로 답합니다. “사람들이 내 울음소리를 싫어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러자 산비둘기가 달랬습니다. “동쪽으로 간들, 그곳 사람들 역시 당신의 울음소리를 싫어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울음소리를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살다 보면 ‘사는 곳’을 옮기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 싫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옮겨도 ‘좋지 않은 모습’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사람도 자꾸 만나다 보면 단점을 보게 됩니다. 싫은 사람도 자주 만나면 그 나름대로의 장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을 바꾸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전교 역시 잘하려면 끊임없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기존 방법만을 고집한다면 사람들은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싫어하는데도 성당 가자고 조르는 것은 전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울음소리를 들어 주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올빼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많은 경우, 인생의 축복은 ‘하찮은 일’이 계기가 됩니다. 모르기에 하찮은 일이지, 사실은 주님의 개입입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이 많이 생깁니다. 전교는 그것을 전하는 일입니다. 작은 일을 통해 우리를 도와주시는 주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오늘의 묵상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참새에게도, 매미에게도, 늑대에게도 설교를 하라는 말씀일까요? 어느 수사님이 자신과 함께 사는 노사제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그 노사제는 불행하게도 치매에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수도원 안에서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늘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공동 기도를 바치고 미사를 봉헌합니다. 아침 먹고 오전에 잠깐 쉬면 당신이 미사를 드렸다는 것을 깜빡하고 점심시간 전에 혼자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저녁에는 오전에 바쁜 사람들끼리 모여서 미사를 드리는데, 그때에도 당신이 그날 미사를 드렸다는 사실을 잊고서 또다시 미사를 봉헌하였답니다.
치매를 겪으면서도 기도 생활과 미사 봉헌에 꾸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수님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찬 사람은 하루 종일 만나는 모든 것마다 돈과 관련한 생각을 하고 말을 합니다. 골프에 재미를 붙인 사람은 골프 얘기에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악기 연주에 맛을 들인 사람은 앉으나 서나 음악에 정신이 팔립니다.
예수님으로 온 마음이 무장된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 인연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즐기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거우면, 자연스레 여기저기서 복음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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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잘난 사람이며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잘남을 잊어버리고 갖춘 것을 포기하며 삶을 완전히 달리 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던 방식은 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과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무능력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얻고자 했던 것은 지혜였건만 바오로 사도가 전한 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인 십자가였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와는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 신앙은 하느님의 능력,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에 기초한 것이어야지, 인간적 지혜나 능력에 기초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세상사를 바라볼 때나,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할 때에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지혜를 잊게 되면, 하느님께서는 신앙생활의 중심에서 밀려나시게 되고 인간의 욕심에 오염된 세상의 지혜가 중심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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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짧은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물론 문맥상으로는 이것은 인간을 염두에 둔 표현이겠지만, 훨씬 더 깊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복음이 우리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창조에까지 소급되는 모든 피조물의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복음 선포는 창세기 본디의 아름다운 창조성의 회복을 말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파괴된 인간성이 복음으로 회복될 때, 곧 우리 자신이 복음적인 올바른 눈과 가치관을 가질 때, 비로소 창조의 실상(實像)을 바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의 아름다운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은 더 이상 지배나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피조성을 나누는 친구임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으로 우리가 사랑의 본성을 회복하면, 나무 한 그루와도 친구가 되어 말을 건넬 수 있고,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서도 하느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하셨던 것처럼, 해와 달을 형님과 누님으로 부르며, 들의 짐승들과 대화를 나누는 신화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나라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는”(이사 11,6), 서로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나라를 실현해 가라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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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정말 그럴 수 있을는지요? 그렇다고 실험해 볼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랬다가는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했다가 정말 뱀에게 물리거나 독을 마셔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예수님께 배상 청구를 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이 말씀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뱀처럼 악하고 간교한 사람을 만나도 주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독에 해당될 만큼 위험한 사건을 만나도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아무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당부입니다.
하느님의 보호는 완벽합니다. 어느 누구도 해치지 못합니다. 선교사들이 오지와 벽지에서 그토록 꾸준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은 주님의 이러한 보살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이 주님을 전하고 舡??삶이라면,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의 보호를 강요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보호받을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 가운데에는 하찮은 일이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나고 보니까 하찮은 것이었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그 하찮은 것이 주님의 배려요 도움입니다. 인생에는 그런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모를 뿐이지 그런 일은 수없이 많습니다. 전교는 그것을 전하는 일입니다. 하찮은 일을 통하여 우리를 살려 주신 하느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회심은 방향전환
반영억라파엘 신부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박해를 하였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아마도 지난 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며 죄를 짓게 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나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합니다. 혹 바른 길을 걷고 있지 못하다면 서둘러 방향을 바꾸기를 바랍니다.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 이므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입니다. 따라서 헛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향을 가려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바쁘게 서두르다가 그만 목적지와는 다른 방향의 차를 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기차를 갈아 탈 생각은 하지 않고 기차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청소를 하고, 노약자를 도와주고, 배고픈 이에게 음식을 사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기차 안의 승객들은 그의 선행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종착역은 그가 목적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기차 안에서 선행을 베풀 것이 아니라 기차를 갈아탔어야 했습니다.
회심은 바로 방향전환입니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실한 삶의 방향을 바꾸었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눈에 들도록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하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소명을 확신한다면 몸을 희생하더라도 또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교에 마음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합니다.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였다(1코린 9,23)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와 함께 복음 선포의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1코린 9,23-22). 그야말로 눈높이에 맞추어 접근 하였습니다. 우리도 2013년 본당 세례자 목표 달성을 위해서 바오로 사도의 방법으로 더 분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심오한 삶의 이동>
양승국신부-
오늘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맞아 회심이란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회심이란 움직임, 즉 이동을 수반합니다. 다시 말해서 회심이란 몸과 마음의 총체적인 이동, 결국 심오한 삶의 이동이 아닐까요?
미성숙에서 성숙에로의 이동, 미완성에서 완성에로의 이동,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삶에서 기적과도 같은 이타적인 삶에로의 이동, 억압과 죄의 사슬에서 해방에로의 이동,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나라에로의 이동, 분열에서 통합과 일치에로의 이동, 어둠에서 광명에로의 이동, 무지에서 깨달음에로의 이동...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은 아마도 좀 더 크고 진실한 회심에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저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끄럽게도 깊은 어둠의 그늘 아래 앉아있습니다. 일어설 줄을 모릅니다. 그 어둠을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회심이란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회심이란 어제의 결핍과 부끄러움을 디딤돌 삶아 한 단계 더 도약하고 성장하기 위해 발돋움하는 몸짓입니다. 육에로만 집중된 우리의 시선을 보다 근원적인 것, 보다 영속적인 대상, 더 이상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대상에로 옮겨가려는 시도가 회심입니다. 약점과 상처투성이인 인간세상을 발판 삼아 하느님 나라를 향해 길 떠나는 여행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 역사 안에서 가장 극적인 회심자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 그의 생애를 묵상해보면 정말 흥미진진한 극적인 삶, 드라마틱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오로는 원래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습니다. 직접 예수님을 대면한 적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 섬멸의 선봉장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달려가서 철저하게 색출해내고야 마는 유다인 중의 유다인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으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낙마(落馬)한 바오로를 향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책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이렇게 예수님을 박해하던 그였는데, 그 역시 3일간의 깊은 바닥 체험 끝에 그의 내면에서는 심오한 삶의 이동, 결정적인 회심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박해자에서 바오로 사도로 새로이 태어났습니다.
악질 중의 악질 고발자였던 사울이었는데 이제 베드로 사도 못지않은 사도가 되어 우리 교회를 든든히 뒷받침하고 계십니다. 그토록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못살게 굴며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는 이렇게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이 모든 것들을 다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태생적 한계, 근원적 결핍으로 인해 수시로 죄와 악습, 하느님으로부터의 멀어짐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우리이기에 수시로 되풀이해야 할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회심입니다. 한번 두 번, 열 번의 회심이 아니라 천번 만번의 회심, 매일 매순간 우리 삶의 심오한 이동이 필요합니다.

남이 아닌 나의 변화를 위해
-조명연-
우리들은 ‘변화’에 대해 자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변화의 기준을
‘나’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둘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즉, 저 사람이 변해야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나의 변화입니다. 내가 변화하지 않고서는 바뀌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회심 축일을 맞이하면서
바오로 사도가 회심하기 직전의 심정을 떠올려봅니다. 아마 바오로 사도는
회심 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면서 그들이 변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즉, 그들이 배교해서 올바른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박해하고 아프게 했습니까? 하지만 정작 변해야 할
사람은 바로 자신임을 주님께서 깨우쳐주셨고, 그래서 그는 회심하여 스스로
변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주님을 증거하는 주님 제자의 길에 들어섭니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떠합니까? 혹시 남의 변화만을 힘주어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변화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제자로의 변화. 그 변화를 위해 오늘도 힘차게 살아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