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9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코 3, 33-35)
말씀의 초대
율법에 따라 바친 제물을 통해 얻게 되는 죄의 용서는 1년간의 효력밖에 지니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번제물과 속죄 제물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고자 자신을 제물로 삼아 봉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는 영원한 효력을 지니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定義)를 내리신다. 혈육으로 말미암은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믿고 실행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백성인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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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율법에 따라 많은 제사를 지냈다. 속죄제는 수시로 지냈다. 율법 자체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증거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돌아가심으로써 인류 전체를 구원하셨다. 예수님의 위대하심이다(제1독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들이 찾아와 만나기를 청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뜻밖이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인간적인 혈연관계보다 하느님 안에서의 관계를 더 소중히 여기시겠다는 말씀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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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성모님과 인연을 끊으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성모님을 뒤로하신 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의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라고 하시는 모습이 예수님마저도 성모님에 대한 공경이 무의미한 것임을 밝히셨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형제’, ‘누이’, ‘어머니’라고 선포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복음 전체에서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실행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또한 이집트로 떠나라는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였으며,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아들 예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실행하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 말씀을 성모님께 적용하면 그분이야말로 제대로 된 예수님의 형제, 예수님의 누이,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모님께서는 단지 혈연적인 관계로만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신앙의 이유로도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낳으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신앙으로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모범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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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찾아온 친척들이 달갑지 않는 듯 말씀이 냉정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얼핏 들으면 매몰차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귀찮아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암시였을 뿐입니다. 인간적 혈연보다 하느님 안에서의 관계를 더 소중히 여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친척들은 섭섭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에게서 ‘인간적인 모습만’ 찾고 매달리면 언제나 섭섭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학연과 지연과 인연은 큰 몫을 차지합니다. 서로 편하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를 승화시켜 ‘주님 안에서의 만남’으로 맺어지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만남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서로 베푸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친숙해지면 ‘주는 것은 멈추고’ 받으려고만 합니다. 받았던 것은 잊어버린 채 주지 않는다고만 생각합니다. 갈등은 이렇게 해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봉헌을 통해 성장합니다. 어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스러운 관계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여기면 아름다운 봉헌이 됩니다. 바치면 깨달음을 주십니다. 바칠수록 ‘그분께 사로잡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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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년이 집을 잃었다며 길에서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노인이 묻습니다. “젊은 그대가 어찌 집을 잃었다 하는가? 그리고 설사 그렇더라도 어찌 이리 철없이 우는가?” 청년이 답합니다.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 지금까지 스무 해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해 뜰 무렵 집을 나섰는데 갑자기 만물이 밝게 보였습니다. 놀라 사방을 둘러보니 길이 보이고 낯선 집들이 보였습니다.” 노인은 놀랍니다. 눈뜬 소경을 만난 겁니다.
“좋아서 한낮을 걸어 다녔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사방으로 뻗은 길이 여러 갈래요, 대문도 비슷해서 도저히 저의 집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노인이 답합니다. “이제 내가 네 집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 주마. 네가 눈을 도로 감는다면 집으로 가는 길이 보이고, 너는 그 길에 익숙해질 것이다.” 청년은 노인이 시키는 대로 눈을 도로 감습니다. 그러고는 예전처럼 지팡이를 두드리며 발길 가는 대로 걷습니다. 얼마 뒤 그는 집에 도착했고, 눈을 뜨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의 글에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를 그분께서는 가족으로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우리는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야겠습니다.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오상선신부-
사제서품식이나 종신서원식을 마치고 나면 주교님이나 관구장님이 부모님들을 인사시키고 축하를 드리는 것이 관례이다.
왜냐하면 부모님들은 그 후보자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어 가장 큰 은인이기 때문이다.
부모님들은 그 후보자를 낳고 길러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자식을 기꺼운 마음으로 봉헌해 주셨기에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실행에 옮긴 분들이기에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어머니시다.
1-2월에 많은 서품식, 서원식이 있다.
이런 서품식,서원식 때마다 수품, 서원자들의 장한 모습 뒤에 감추어져 있는 어머니, 아버지들을 본다.
그들의 장한 봉헌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그 어머니, 아버지들의 장한 봉헌 때문에 더욱더 감사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실제로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서약자들보다 이미 하느님께 자식을 온전히 봉헌한 부모님들이 더 위대해 보인다.
과연 그러기에 그분들은 후보자의 어머니, 아버지 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어머니, 아버지이다.
일찍이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형제의 어머니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했다.
나의 어머니만이 어머니가 아니라 우리 형제들의 어머니들 모두가 바로 나의 어머니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들이 무수히 많다.
그분은 우리 형제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나의 어머니들이고 무엇보다도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시기에 나의 어머니들이다.
소위 서품,서원 시즌에 내가 만나는 모든 자매들이 이러한 의미에서 나의 어머니들이요 자매들이며,
내가 만나는 모든 형제들이 이러한 의미에서 나의 아버지요 형제들인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의 아들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요,
성령의 정배가 되는 것이 아닐까?
오늘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형제들과 그 어머니, 그 아버지들을 기억해 본다.
그리고 나즈막이 한분 한분을 불러본다.
형제~~~~
어머니~~~~
아버지~~~~
아, 이 복됨이여!
아, 이 가슴벅참이여!
-유 광수신부-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게십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나서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우리는 어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일치할 수 있는 길은 각자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서로 공통된 점을 찾아야한다고 말했다. 그 기준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에 대한 해답이 오늘 복음에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신 다음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당신 주위에" 앉아서 말씀을 들을 때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은 애매 모호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느님의 뜻을 알려 주셨고 그것이 복음에 기록되어 오늘 우리들이 언제든지 들을 수 있게 해주셨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행하려며 다른 데에 가지 말고 복음을 들으면 된다. 결국 우리들이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일을 하더라도 먼저 복음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를 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할 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된다.
사람은 듣는대로 양성되어진다. 매일 나쁜 소리를 들으면 나쁜 생각을 하게되고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나쁜 소리로 양성되어졌기 때문이다. 반대로 좋은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면 항상 좋은 것을 생각하게 되고 좋게 말하고 좋게 행동하게 된다. 왜냐하면 매일 좋은 소식를 들으면서 양성되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말만 듣고 자라면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인간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편 하느님의 말씀 즉 매일 복음을 듣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이 된다. 하느님이 생각하신 것을 생각하고 하느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하게 된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된다.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루 하루 겨자씨가 자라서 큰 열매를 맺듯이 매일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곧 예수님의 어머니 형제 누이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르타의 집에 가셨을 때에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고",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 때에 마르타가 예수님에게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일러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가 10,41-42)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무조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선의의 지향을 가지고 한다고 하더라도 일의 우선 순위가 있고 때와 장소에 따라서 맞는 것이 있고 안 맞는 것이 있다. 무엇이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인가를 알고 가장 중요한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를,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고 또 어떻게 봉사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어디로 가야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인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 상황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능력 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마르타가 한 일도 중요하다. 자기 집에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그분을 시중드는 일이 얼마나 아름답고 중요한 일인가? 마르타는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을 위해서 해야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고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모든 가치 판단은 예수님께 시중 드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동생 마리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고 그녀를 보고서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마저 미웠고 참다 참다 못해 드디어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 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불평을 터뜨렸던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르타의 생각이었지 예수님이나 마리아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모두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행동하였다. 마르타는 자기가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리아를 칭찬하셨다. 마르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일을 했던 것인데 예수님은 "염려하고 걱정"이라고 말씀하셨고 오히려 마리아에게 "가장 좋은 몫"이라고 하셨다. 마르타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마르타는 듣는 것보다는 활동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활동도 중요하다. 그러나 활동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이다. 듣고 나서 활동하는 것이다. 듣지 않으면 무슨 활동을 해야하는지 모른다. 따라서 먼저 듣고 활동하는 것이 일의 순서요 그래야 올바른 활동을 할 수 있다. 우리도 바쁘게 활동을 한다. 활동은 열심히 하는데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소홀히 하기가 쉽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무엇보다 "당신 주위에 둘러 앉아야 한다." "둘러 앉다"라는 말은 서로 하나된다는 것이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가족으로서 형제, 자매, 누이, 어머니이지 높고 낮은 계급적인 관계로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둘러 앉은 사람과 둘러 않지 않은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복음에서 둘러 앉은 사람을 "안의 사람" 즉 예수님의 가족이라고 하고 둘러 앉지 않은 사람을 "바깥 사람" 즉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또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도록 노력하는 것이 영성생활이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늘 밖에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 된다. 또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늘 같은 수준에 머무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영성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 주위에 둘러 앉아 잇는 자리는 모든 이에게 개방된 자리이며 모두가 안으로 들어와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둘러 앉아야 할 자리이다. 그 자리는 내가 얼마큼 안으로 들어와 앉느냐에 따라 내가 앉을 자리가 있을 것이고 또 그 옆에 앉아 있는 형제 자매가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 주위에 둘러 앉지만 모두가 같은 수준에 둘러앉는 것은 아니다. 앞줄에 둘러 앉을 자리가 있을 것이고 뒤에 둘로 앉을 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자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수준에 맞는 사람들끼리 둘러 앉을 것이다. 그러나 옆자리는 항상 개방되어있는 자리이다. 누구의 자리라고 정해진 자리가 아니라 누구나 와서 앉을 수 있는 자리이다. 아무나 앉으면 또 그가 또 나의 형제 자매가 될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자리, 그 무엇으로도 매여있거나 제한을 두지 않는 자리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고 말이 서로 통하는 사람들끼리 둘러 앉은 자리이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 모두가 형제, 자매요,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자리이다. 이 자리는 모든 사람들이 와서 앉아야할 자리이며 그곳에서 서로 친교를 나누며 형제 자매로 맺어져야할 자리이다.
예수님은 모든 이를 당신 가족으로 만들려고 오셨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가족으로 만들기 위해서 당신 주위에 둘러 앉기를 얼마나 원하셨는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다. "너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제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 37)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 주위에 둘러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부터 배우고 그런 자세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하자. 그래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