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은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는다,(마르 4,21-25)

2013. 1. 31. 오전 7:32:20

글자

2013년1 31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의 말이다. 그는 1815년 이탈리아의 토리노 근교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양을 치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요한 보스코는 어머니의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라 사제가 되었다. 특히 청소년을 사랑했던 그는 젊은이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오다가 1859년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그리스도교 생활을 익히게 하려고 살레시오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872년에는 살레시오 수녀회도 세웠다.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19세기의 탁월한 교육자로 꼽히는 그는 1888년에 선종하였고, 1934년에 시성되었다.  


등불은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는다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
(마르 4,21-25)

 

말씀의 초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제물이 되시어 참된 성소인 하늘에 오르셨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이러한 업적에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으로 희망해야 한다(제1독서). 등불의 존재 이유는 빛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니 등불을 숨기거나 감출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 법입니다. 등경 위에 놓아 방 안을 환히 밝혀야 그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등불은 주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시편 119[118],105 참조). 그러니 등불인 말씀을 받아 간직한 우리가 실제로 그 말씀이 드러나게 살지 않고 우리 자신만을 드러내려 한다면 세상의 어둠을 밝힐 수도 없고, 우리가 가야 할 여정에서 방황만 하게 될 따름입니다. 이에 대해 태양과 달의 관계를 통해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습니다. 태양에 반사되어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때로는 초승달이나 그믐달이 되어 적게 비추고, 때로는 반달이나 보름달이 되어 환히 비추기도 합니다. 적게 비추든 많이 비추든 그렇게 달은 밤마다 자신이 어둠을 밝히는 존재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말씀의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인공이 되시어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초승달처럼 부족하게 비출 때도 있고 보름달처럼 환하게 비출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게 비춘다고 좌절할 것도 아니고, 많이 비춘다고 자만할 것도 아닙니다. 얼마나 비추는지가 아니라 달처럼 나날이 꾸준히 비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입니다.

양극화의 해법

-오상선신부-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심화,
즉 양극화 문제이다.


부자는 더욱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는 더욱더 가난한 이가 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인류가 안고 있는 최대의 과제 중의 하나 일지도 모른다.
제도상의 보완을 통하여 각 나라마다 나름대로 노력은 하고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 문제에 대한 해결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지만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새정부에게 경제활성화를 기대하고는 있지만 경제활성화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더욱더 가속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나는 문득 양극화 문제는 바로 부익부 빈익빈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란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오늘 말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로  부익부 빈익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이 아니라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을 말하는 것이다.
경제적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해결책은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숙고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나누면 나눌수록, 주면 줄수록 더욱더 풍요로워지는  영적인 부자됨의 신비는 경제적, 물질적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는  정반대 현상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측면의 부익부 빈익빈은  서로 자기 것을 챙기려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은  서로 자기 것을 버리고 주려는 열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나누면 나눌수록  영적으로는 더욱더 가진자가 되고
자기 것으로 챙기면 챙길수록  영적으로는 매마른 영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스승 예수님의 해법은 인류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절묘한 해법인가!
 
우리 모든 크리스천들이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문제시하고 아파하고 있다면
우리 스스로가 스승 예수의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에 대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실제로 영적인 풍요를 위한  나눔의 삶에 매진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이것을 하지 않고 정부가 무슨 답을 제시해 주길 바라고 부자가 회개하여 빈자에게 도움을 주길 바란다고 결코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은 <너희가 해 주어라!>고 하신다.
우리의 영적인 풍요의 삶은 인류가 안고 있는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답이리라.
 
오늘 나는 무엇을 주고, 나눔으로써 영적인 부자가 될 것인가?
받으려 하지말고, 나의 것으로 챙기려 하지 말고 오히려 주고, 나누고, 베품으로써 나의 영적인 풍요를 체험해 보자.
이를 체험하는 크리스천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희망이 있고, 기쁨이 있는  그런 세상으로 한발자욱 더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 요한 보스코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영적인 부자가 아니었겠는가



분별의 지혜가 더 절실한 현대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 4장에 실려있는 4가지 비유 중 두 번째 비유인 ’등불의 비유’를 들려준다. 그런데 사실상 등불의 비유는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만 해당되고, 후반부는 종말보상률(24-25절)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러니까 두 대목은 서로 떨어져 전해 오던 것을 마르코가 한데 묶어 비유설교의 틀 안에 집성한 것으로 보인다. 복음사가들은 종종 이런 의도적인 편집을 통하여 그 의미를 서로 연결시키기도 하고 부각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 복음대목은 4가지 비유들의 핵심적인 주제인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밝히는 방향으로 풀이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앞서간 복음에서 ’알아들을 귀’가 있다고 생각되는 12제자들과 다른 제자들에 국한시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와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따라서 오늘 복음대목도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만 훈시(訓示)된 것이다.

 

  우선 복음의 전반부인 등불의 비유를 살펴보자. 등불을 등경 위에 얹어 놓아야 함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불을 끌 때 됫박을 사용하는 것은 당대의 습관이다. 그런데 등불을 됫박 아래 두거나 침상 밑에 둔다는 것은, 물론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좀 과장되고 지나친 표현이다. 이 표현 때문에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힘을 얻는다. 즉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비밀을 밝혀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22절) 아무리 감추어 두고 비밀로 해도 그것은 밝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등불이기 때문이다. 등불을 끄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씨가 복음의 말씀이라면 등불의 비유에서 빛을 내는 등불은 복음의 선포를 뜻한다. 등불의 본질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다. 따라서 등불은 복음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복음선포라는 말이 된다. 사실 등불은 성서에서 예수님이 아닌 엘리야와 모세(묵시 11,4), 또는 세례자 요한(요한 5,35)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등불보다 훨씬 더 높고 강한 상징인 빛이시며, 세례자 요한은 이 빛을 증언하러 왔을 뿐이었다.(요한 1,4-9) 따라서 복음자체이며 동시에 선포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빛으로서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머무름 없이 온 세상에 드러나 밝게 비추이실 것이다.

 

  복음의 후반부는 종말보상률에 관한 훈시이다. 굳이 종말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무방하다. 무엇을 주고 난 후 되돌려 받을 때까지의 시간을 감안한다면 그 때가 종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상률은 두 단계로 구별된다. 하나는 인과(因果), 또는 동태(同態) 보상률이고, 다른 하나는 은총(恩寵), 또는 가감(加減) 보상률이다. 앞의 것은 달아 주면 달아 주는 만큼 받는다(24절)는 것이고, 뒤의 것은 가진 사람은 더 받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25절)는 것이다. ’되로 주면 되로 받고 말로 주면 말로 받는다’는 속담이나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 대목을 독자적으로 본다면 인간의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에 대한 하느님의 종말적 동태보상, 또는 하늘에 영적(靈的) 재물을 쌓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종말적 은총보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른데 있다.

 

  문제의 해결점은 전반부의 등불비유와 후반부의 보상률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관절어(關節語)에 있다. 바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23절), 또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24a절)는 말씀이다. 말씀인즉,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등불의 비유를 잘 알아듣고 그 뜻을 마음에 새겨 간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등불의 비유에서 등불보다 훨씬 강한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다. 그러므로 빛이신 예수와 그 말씀을 알아듣는다 함은 다시금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이 땅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만큼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깨우치게 될 것이고, 종말에 가서는 깨우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신비를 통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의 시대보다 들어야 할 것, 알아야 할 것, 보아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은 우리들 세상에서는 무엇이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밝히는 것인지를 정확히 분별하는 지혜가 더 절실히 요구된다.◆


 

 등불이 되어라 

반영억라파엘신부

이명박 대통령의 ‘몰염치한 특별사면’을 놓고 말이 많습니다. 법의 공평한 집행과는 거리가 먼 ‘측근, 사돈집안, 우익인사’를 무더기 사면하였기 때문입니다. 부정, 부패측근 특별사면은 사회통합을 해치고 사익을 추구한 것으로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거기다가 비리측근 사면한 날, 다른 측근들엔 훈장을 남발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숨겨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마르4,22). 는 말씀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허물이 컸지만 경제적으로 잘 살게 해주리라는 눈앞의 기대 때문에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결과가 얼마나 큰 아픔을 겪게 되었는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마르9,26) 악의 세력은 떠나면서도 해코지를 하고 떠납니다. 끝이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등불은 등경위에 놓아야 제대로 비출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빛나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이 깊을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 커집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등불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으로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그 기운이 이웃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기운이 감싸면 악한 기운은 서서히 떠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히브10,22). 그리고 우리가 ‘빛’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정령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간수하지 않는 것은 곧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우울해 하며 남을 비판하고 불평불만하면서 아무런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움켜쥐면 빼앗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먼저 주면 빼앗길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먼저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고, 주지 않는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금고에 쌓아 놓았다할지라도 이웃과 나누지 못하면 그것은 있으면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부자가 되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차고 넘치도록 받으시고 이웃과도 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것 하나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히브10,24). 마무리 하겠습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4,24).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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