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2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너희는 하느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마르코 7,1-13)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사람을 가장 마지막으로 만드셨다. 이는 마치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아기한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는 부모의 마음처럼,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기에 앞서 세상의 모든 것을 먼저 창조하셨음을 보여 준다(제1독서). 예수님의 제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비난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형식적인 위선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이 폐기되고 있다고 이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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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보여 준 형식주의는 우리 삶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여교사가 어느 빈민가의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담은 ‘위험한 아이들’이라는 영화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깡패 조직과 연관되어 한 친구에게 죽음의 위협을 받은 ‘에밀리오’라는 학생은 차라리 죽임을 당하기 전에 먼저 그 친구를 죽여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를 눈치 챈 여교사는 에밀리오를 찾아가 교장에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보호를 요청하라고 밤새 설득합니다. 좀체 고집을 꺾지 않던 에밀리오는 여교사의 끈질긴 노력으로 교장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교장은 에밀리오가 교장실에 들어왔을 때 그를 곧바로 내쫓아 버립니다. 그 이유는 학생이 노크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장은 노크할 줄도 모르는 학생과는 면담할 수 없고, 그게 교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변 보호를 요청할 기회마저 잃은 에밀리오는 처음의 결심대로 친구와 사투를 벌이러 갑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거기에서 죽고 맙니다.
교장이 잘못한 것은 사실상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규칙보다도 아이의 내면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에밀리오를 보호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한층 깊게 바라보려 하지 않고, 규칙에 얽매인 나머지 어린 학생이 왜 교장실까지 찾아오게 되었는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자녀에게서, 이웃에게서 어떤 말과 행동을 듣고 볼 때 형식적인 규칙에 얽매인 나머지 그의 내면을 놓쳐 버리지는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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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의 처음 세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고 나머지 일곱 계명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의 첫 계명은 “너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첫걸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부모 공경에 관하여 구약 성경을 보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라고 할 정도로 엄격합니다.
코르반은 히브리 말로 ‘예물’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물건을 두고 코르반이라고 하면 그 물건은 일반인이 사용할 수 없고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바쳐야 합니다. 신앙심이 깊어 코르반 서약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때로는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고 코르반 서약을 남발하는 자식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코르반 서약을 한 물품을 결코 성전에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를 내세워 인륜을 저버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율법을 구실로 삼아 십계명 가운데 하나인 부모 공경의 도리를 교묘히 회피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입니다.
우리 사회도 이제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미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육칠십 대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가정도 많이 있습니다. 많은 이가 온갖 핑계와 구실로 나이 드신 부모님을 모시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식에게는 꼼짝 못하고 매여 살아갑니다. 몸이 아픈 어느 황혼의 자매님이 늙으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하는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아프지만 눈감을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부모님 공경은 세월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자식의 도리입니다. 황혼의 나이에도 많은 어려움을 이겨 내고 어르신들을 공경하며 사는 분들의 모습은 석양보다도 더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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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소명
반영억신부
오늘 우리는 교황님의 사임(오는 2월28일 오후 8시: 한국시간 3월 1일 오전 4시에)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교황님의 임기는 종신직입니다만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2010년 가톨릭 전문 독일 언론인인 페테르 제발트가 자신과의 인터뷰를 책으로 펴낸 '세상의 빛'에서 육체적으로, 심적으로, 또 영적으로 교황 업무 수행이 어려운 경우에는 스스로 사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교황 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황은 사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의무라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2005년 4월 19일 78세의 나이로 265대 교황에 선출돼 착좌한 지 7년 10개월 만입니다.
교황님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거듭 양심을 돌이켜본 바, 본인의 체력이 더 이상 성 베드로 후계자직과 로마의 주교직을 충분히 수행하기에 맞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빠르고 복잡하게 변화하는 오늘 날 성 베드로의 외침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선 건강한 체력과 정신이 필요하다”며, “그러나 지난 몇 달 사이 본인의 체력은 급속히 악화돼 주어진 책무를 적절히 수행하기에 부적당하다고 느낄 정도까지 이르게 됐다"고 건강상의 이유를 사임 배경으로 들며 "이 일(교황 퇴위)의 심각성을 잘 인식하고 있다"면서 "교황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완전한 자유의지로 선언한다"고 밝혔습니다.
베네딕토 16세가 퇴위하면 1415년 그레고리 12세가 당시 분열된 교회를 수습하기 위해 스스로 사퇴한 이래 598년 만에 선종에 앞서 퇴임한 교황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며 새 교황선출도 주님께서 몸소 성령의 역사를 이루시길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왜 손을 씻게 되었는가는 관심이 없고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사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육적인 생명양식으로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합당한 마음으로 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위생적인 의미도 있지만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미사전례 때에 참회예절이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의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사 때 사제는 예물기도에 앞서서 손을 씻으며 기도합니다.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손을 씻는 예식의 핵심은 마음의 정화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내용, 알맹이를 잊은 채 겉모양의 전통을 고집하면서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사제들의 정체성에 있어서도 성직자는 곧 선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목자의 관점에 더 큰 비중을 두기를 고집하여 본당신부 되기만을 고집한다면 본래 복음 선포자로서의 소명을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할 것입니다. 우리는 본당신부가 되기 위해서 성직자가 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서품을 받은 것입니다. 각기 하느님께서 주신 탈란트를 가지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소명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이 있지만 그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하고 쇄신할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7,6-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맹이보다도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여전히 같은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며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의 예배는 헛되고 헛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 하되 그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알고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부득이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여 주님의 기도 33번을 하였는데 고해성사를 봐야 되느냐?” “몸이 불편한데 미사전례 때 앉고 일어서고 꿇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느냐?” “몇 일 전에 고해 성사를 봤는데 판공성사를 또 봐야 하느냐?” 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을 일일이 해 드려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 입니다. 법은 함부로 무시하여서도 안 되고 내 입맛에 맞게 합리화시켜서도 안 되느니 만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전통과 관습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교황님의 결단도 새로운 전통을 세우는 하느님의 뜻이라 확신합니다. 사랑합니다.

<열린 가슴으로 광야로 나가는 일>
양승국 신부
한 무리 관광객들이 봄 소풍을 떠났습니다. 버스는 호수와 산, 전원과 강이 어우러진 매우 아름다운 지방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차창 밖으로 무엇이 지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버스의 상석에, 좀 더 편안한 자리에 앉힐 것인가? 누구를 더 중요한 사람으로 여길 것인가?
바깥에는 황홀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엉뚱한 주제를 두고 말다툼하느라 여행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런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만 계속할 것입니다. 앤소니 드 멜로의 ‘행복한 삶에로의 초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부차적인 것, 지극히 지엽적인 것에 몰두하느라 정작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쉽게 놓치고 마는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 우리 신앙생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우선적인 것,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분하게도 죄인인 우리를 찾아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스런 하느님 얼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시고 인간세상까지 내려오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일이 아닐까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지속적으로 만나 뵙기 위해 열린 가슴으로 광야로 나가는 일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핵심이나 본질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바리사이들, 교만할 대로 교만해져서 진지한 자기반성이나 쇄신작업과는 담을 쌓은 바리사이들, 그래서 결국 빈껍데기뿐인 신앙인으로 전락한 바리사이들을 엄중하게 질책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결례와 관련된 세칙의 부당함과 비인간성을 경고하십니다. 정결례는 한마디로 몸을 씻는 것과 관련된 규칙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정결례에 관한 규칙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규칙이 또 규칙을 낳고, 또 규칙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규정들이 늘어났는지 탈무드 제1부의 6권 전체가 '씻는 규정'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장에 갔다가 귀가했을 때, 아주 엄한 정결례 규정이 적용되곤 했습니다. 시장에서는 죄인들이나 이방인들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기에, 그래서 몸이 많이 더러워지기에 50리터 이상 들어갈 수 있는 물통에 팔꿈치까지를 넣어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흐르는 물에 팔을 씻어야 했습니다. 랍비들은 이런 규정을 실천하기 위해 4마일(약 6.4Km)을 걸을지라도 고생으로 여기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외출 다녀왔다가 손 씻는 일, 위생적인 견지에서 볼 때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권장사항일 뿐이지, 의무조항이 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여건이 마련되어 있어서 큰 준비 없이 손을 씻을 수 있다면 씻으면 되지요. 그러나 상황이 안 된다고 단순히 손을 씻기 위해서 2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걸어가서 손을 씻는다는 것을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 별것도 아닌 손 씻는 예식은 목숨 걸고 지켰지만, 정작 중요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가르침은 소홀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나 몰라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통 유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죄 없다고, 깨끗하다며 어깨에 힘을 주며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완벽하다고, 흠 없다고, 죄 없다고,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절대로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전통과 하느님의 가르침 사이의 경계 - 코르반
지금도 그런 하숙집이 있는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학교다닐 때 학교 앞에서 하숙할 때는 하숙집 식구들이 모두 함께 모여 식사를 했고,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게는 항상 인기 만점이었다.
그런데 가끔씩은 장난삼아 그런 치사한(?) 짓을 하곤 했는데, 그걸 혼자 먹기 위해 먼저 거기다 침을 뱉는 사람이 다 먹곤 하던 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그 당시 말로 '야도' 한다고 했는데, '그건 내거다' 하고 자신의 도장을 찍어 놓는 셈이다. 좀 치사하고 지저분한 방법이긴했지만, 하숙생들끼린 재미삼아 그런 식으로 함께 먹으면 기껏 한두숟갈밖엔 떠먹지 못할 만큼 작은 양이니 그런 식으로 혼자라도 실컷 먹으라고 가끔씩 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원래 이 말의 본뜻은 유다사회의 전통에서 나온 것인데, 자신의 돈이나 재산과 같은 자신의 소유물을 하느님을 위해서 내놓는다는 뜻으로 쓰였으니 그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결국 그렇게해서 하느님을 위해 내놓은 신성한 봉헌물이니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즉, 겉으로는 '코르반' 이라고 선언해놓아 아무도 그걸 못 쓰게 만들어놓곤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 그걸 쓰거나, 혹은 그걸 빌미삼아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구실로 삼는 경우를 이름이다.
마치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 식으로 '코르반' 하고 외치기만하면 거기서 모든 것이 멈춰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미 성직자들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개신교회에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으니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가톨릭 교회 성직자들이라고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직책이 주는 명예와 치적 등을 위해 유혹을 받을 수 있으며, 한계가 있는 인간인 이상 가끔씩은 그런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쳐질 때 평신도로선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이 그렇다면 우리 평신도들 입장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이 이 '코르반' 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주님을 위해서 거대한 성전을 지어놓곤 명품 옷을 걸친 사람들만 끼리끼리 노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발붙일 곳 없이 단지 성전밖에서 시혜와 봉사의 대상으로만 전락해버리는 교회의 모습으로 만들어버린다면, 그건 결국 우리 평신도들의 '코르반' 이다.
어쩔 수 없이 나 스스로도 예수님께서 질타하신 그런 부정적 의미의 코르반을 만들어놓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