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소문이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마르6,14-29)

2013. 2. 8. 오전 6:20:53

글자


2013 2 8일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하고 말하였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6,14-29)

 

 

말씀의 초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형제애를 실천해야 한다. 소외받고 어려운 이들의 형편을 자신의 처지처럼 대하며, 욕심을 버리고 현재에 감사해야 한다(제1독서). 헤로데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자신이 죽인 요한 세례자가 되살아났다고 생각한다. 헤로데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되어 자신에게 간언했던 요한 세례자의 목을 베었던 임금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헤로데는 최고의 권력을 지닌 임금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그는 한평생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두려움에 떨면서 살았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정치적인 입지를 위한 정략결혼으로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가로챕니다.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서 한 행동이었습니다. 요한이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간언할 때에도 그는 요한이라는 사람의 말을 두려워합니다. 그를 죽이고 싶기는 하지만, 요한에 대한 민중의 인기가 하도 높아 그것을 두려워하여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잔치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하자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그 소녀가 요한 세례자의 머리를 요구하자, 헤로데는 민중의 시선이 두려워 몹시 괴로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잔치에 참석한 고관들의 시선이 더 두려워 그를 처형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시선을 두려워합니다.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절대 권력자였지만, 늘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합니다.
그 반면, 요한 세례자는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헤로데 임금에게 간언하고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진정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합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을 더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

오늘 복음에서 한 나라를 통치하는 헤로데 임금의 생활 모습을 보십시오. 권력 주변에서 얽히고설킨 여인들의 질투와 간교한 계략들이 난무하는 모습이 마치 한 편의 역사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허세와 체면 때문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고 십자가형을 선고한 빌라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라도는 직접 예수님을 신문했기 때문에 그분께 죄가 없으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결국은 죄수였던 바라빠를 놓아주고, 무고하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 줍니다(마르 15,15 참조).
그들의 공통점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권력 유지와 명성, 대중적 인기와 자존심, 체면 이런 것이 기준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거나 현재 비판받고 있는 정치 권력가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회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이런 모습들은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힘을 추구하고 체면이나 자존심, 인기에 휘둘려 살다 보면,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됩니다. 본디의 자기 자신은 없어지고 껍데기 인생이 됩니다. 자기 자신의 이런 모습 속에서 사회에 생명이 되는 정의와 평화는 하나둘 그 빛을 잃어 갑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의 얼굴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게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얼굴입니까?






 

 세례자 요한의 죽음(6, 14-29)
-유 광수신부-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저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하고 말하였다.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말하였다.
 
선구자로서의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역사는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라는 이 말씀으로 모두 끝난다.  마르코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요르단 강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푸는 선구자로 등장하고, 두 번째가 이곳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라는 이야기로 요한의 일생이 끝난다. 첫 번째 물로 세례를 베풀던 요한 세례자의 활동이 끝난 다음 시작된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은 세례성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과정이었다면 두 번째 요한 세례자의 죽음은 성체성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또 파견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권력의 핵심부까지 알려졌고, 마침내 최고권자인 헤로데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뿌려진 겨자씨와 같이 작은 존재이지만 당신의 활동을 통해서 점점 자라고 있고, 마침내 권력의 핵심부에까지 알려질 만큼 크게 자란 것이다. 나의 믿음도 나에게서 머물지 말고 주위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되는 믿음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은 나를 위한 이름만이 아니라 내 주위의 모든 이들을 구원해주는 이름으로 널리 소문이 나야 할 이름이다. 나를 통해서 알려지는 예수님의 이름은 어떤 소문으로 알려지는가? 내 주위 사람들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요한 세례자가 나타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만큼 그 당시 사람들에게 요한 세례자의 존재는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었고, 또 요한 세례자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고 그것을 올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요한 세례자로 착각하고 있다면 그 동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던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예수님이 아닌 요한 세례자의 활동으로 착각할 수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것을 요한 세례자가 한 것처럼 착각하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다른 사람이 한 것으로 잘못 생각할 수 있다. 그러기에 마르코는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도록 예수님의 정체를 올바로 알려 주고자 한 것이다.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저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라고 말하는 그 말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요한 세례자, 엘리야, 예언자"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다. 그럼에도 "요한 세례자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난 것이다."라는 말은 엄청난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는 인생관에서 죽지만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는 새로운 인생관을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아직까지 부활에 대한 확실한 의식은 없지만 마르코는 이 말을 통해서 서서히 부활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님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의 생각은 "요한 세례자, 엘리야, 예언자"라고 서로 엇갈리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 반면 헤로데 임금의 생각은 주저함이 없이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헤로데 임금은 어떻게 단정적으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인간 내면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겉으로는 표시가 잘 나타나지 않더라도 누구나 내면 깊숙이 잠재하고 있는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이 평상시에는 잘 안 나타났다가도 어떤 상황에 가서는 자기도 모르게 표출되는 법이다. 속담에 "도둑이 제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에게는 하느님이 심어 주신 양심을 갖고 있다. 양심은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해 준다. 양심에 따라 옳게 행동했을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기쁘고, 보람을 느끼고, 마음의 평화스러움을 느끼지만 반대로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했을 때에는 늘 불안하고 불편하고 그와 유사한 일이 일어나도 자기가 한 잘못이 드러날까 봐 가슴이 철렁거림을 느낀다. 사람을 죽였거나 강도짓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서 돈을 빼앗아 깊은 산중에 숨어 있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자기를 붙잡으려고 쫓아오는 것 같고, 바람소리가 조금만 세차게 불거나 짐승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하면서 불안해한다. 혹시나 혹시나 하는 생각이 늘 떠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짓고는 못사는 법이다.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결국 견디다 못해 자수하는 사람이 있고, 비록 자수는 못했어도 잡혀서 감옥에 들어갔을 때가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다."라는 말은 헤로데 임금이 스스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임금이었지만 자기 말대로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을 딸의 요구로 목을 베게 한 그 죄가 늘 그를 쫓아다녔던 것이다. 그는 비록 임금으로서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감히 무엇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 겉으로는 평온한 척하고 지냈다 하더라도, 자기 양심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늘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괴로워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 결과 헤로데 임금은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지자 주저함이 없이 곧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라고 무의식 속에 잠복했던 생각이 순간적으로 밖으로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은 헤로데 임금처럼 자기 마음에 남아 있는 큰 상처를 한번도 털어놓지 못했기에 늘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그것에 꽁꽁 얽매여 사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어렸을 때의 상처이든, 또는 몇 년 전의 것이든 그것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법이다. 매듭은 풀어야 풀리는 것이지, 풀지 않은 채 그냥 놔두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법이다.
 예수님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라고 말씀하셨다. 

 

 내 무의식 속에 감추어 둔 비밀은 없는가?  양심에 꺼리는 어떤 것들을 고백하지 못하고 늘 불안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 죄가 있다면 그것을 진실되이 고백하지 않고서는 우리 마음이 안식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본인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을 고해성사를 통해서 깨끗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른다. 마음에 깊이 간직했던 죄를 고백한다는 것이 얼마나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치료가 되는지 모른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나를 줄기차게 쫓아다니며 괴롭혀 왔던 죄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자기가 잘못한 사람을 찾아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함으로써 거기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이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해보고 그것을 일일이 종이에 기록하여 주님께 기도한 후 태워버리는 작업을 통해서 해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연중 제4주간 금요일(마르6,14-29)
조재형(가브리엘)신부
오늘 날씨가 무척 춥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생각나는 추억이 있습니다. 예전에 적성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 공소에서 미사를 드릴 때입니다. 공소 안에도 영하 16도 였습니다. 난로를 피우고 제의방에 있는데 복사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6학년 아이가 말합니다. ‘너도 춥냐!’ 4학년 아이가 말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자 6학년 아이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젊음이 좋기는 좋구나!’ 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었습니다. 제가 볼 때 6학년이나 4학년이나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문득 하느님 앞에 우리 모두는 다 그렇고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나의 능력과 재능 그리고 나의 지식과 경험도 하느님 앞에서는 사실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겨울이 추워진 것은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지구 온난화’면 겨울이 더 따뜻해져야 하는데 이상하죠! 그것은 따뜻한 공기가 북쪽의 차가운 공기에 구멍을 냈기 때문에 그 구멍으로 차가운 공기들이 한반도로 내려왔기 때문이랍니다. 또한 지구 온난화는 해류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따뜻한 난류가 차가운 한류에 영향을 주면 바다가 더 차가워 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실제의 상황은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법은 가진 자의 편이었고,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우리는 공정하고 정의로우신 예수님의 판결을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간음을 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견을 묻습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할까요? 당시의 법은 간음을 하다 잡힌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상황을 봅니다. 떨고 있는 여인, 돌을 들고 여인을 죽일 자세인 흥분한 군중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판결을 내리지 않으시고 땅에다 무엇을 쓰고 계셨습니다. 군중들은 흥분을 가라 앉혔고 다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목소리도 조금은 누그러졌습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분들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땅에 무언가를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을 해 봅니다. 자신들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하나 둘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떠나는지 보시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떠난 후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나도 당신의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도 때로 너무나 쉽게 남을 판단하고 상처를 줍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욕하고, 평가할 때는 정말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처벌하고 심판하기 전에 먼저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2013/02/08): 예수님께서는 바로 판결을 내리지 않으시고 땅에다 무엇을 쓰고 계셨습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아라. (시편 1,4)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주님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에레17,13)
‘나도 당신의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십시오. /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이사43,18)~ 신부님 건강 완쾌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을 많이 전해주세요. 하루빨리 좋은 집(성전)으로 이사하세요. 살롬.
김종업 (rlawhddjq)

능력을 주시는 분을   
 반영억신부 
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살고, 남자는 체면을 먹고 산답니다. 여자는 쉽게 감동하기에 그렇고 남자는 자존심을 세워주면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건 맹세를 함부로 할 것이 아닙니다. 

 헤로데 왕은 요한이라는 인물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습니다(마르6,20). 그런데 그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게 되었습니다. 왕은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었기에 그에게 원하는 선물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의 바람대로“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6,25)하고 요구하였습니다. 너무도 당혹스런 일입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이 자기의 결혼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앙심을 품는 사람은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심의 노예가 되어 그 앙갚음의 기회를 딸을 통해서 하게 된 것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더니……,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약속한 것이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습니다(마르6,26). 그래서 결국은 요한의 목을 베게 되었습니다.  

의인의 목숨과 자존심을 건 헛된 맹세에서 하나를 선택했거늘 그 놈의 자존심이 뭔지? 체면이 뭔지? 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 ‘다만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만(야고5,12)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의로운 일에 자존심이 좀 상하면 어떻고 체면이 좀 손상되면 어떻습니까?  

요한과 헤로데,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죽어가는 한 예언자의 모습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의롭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아가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헤로데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불안감을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내가 목을 벤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말하였습니다. 혹 내 무의식 속에 감추어둔 무엇인가가 있어 불안하다면 고해성사를 통해 그 불안을 해소하기 바랍니다. 매듭은 풀어야 합니다. 풀지 않고 놔두면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법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그리고 어떤 공동체 안에서든 더 큰 것을 위해서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에 손상을 입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필리4,12-13).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어떤 처지나 여건 안에서도 꿋꿋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요,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위신, 체면을 지켜야 할 때 지키십시오! 자존심을 내세워야 할 때 내세우십시오! 그리고 헛것인줄 알았으면 곧 버리십시오! 서둘러 버리십시오! 정말로 승리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고 패배한 사람은 헤로데임을 잊지 마십시오.

헤로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권한을 남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신의 안일과 욕망을 위해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 왔고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항상 예수님의 삶을 미리 닦는 선구자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예수님을 닮기를 갈망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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