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며 (마르코 6,7-13)

2013. 2. 7. 오전 5:31:07

글자
 

2013년 2월 7일 연중 제 4주 목요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마르코 6,7-13)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을 때 하느님께서는 우렛소리, 번개, 짙은 구름과 함께 나타나셨고, 이에 백성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탈출 19,16 참조). 그러나 새 이스라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의 축제가 벌어지는 천상 예루살렘으로 초대받았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며 그들에게 당부하신다. 파견 여정 중에 필요한 물품들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복음).

☆☆☆

 종말의 때에 우리가 나아갈 곳은 천상의 예루살렘이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계신다. 우리와 함께 사셨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바치셨던 분께서 심판자로 계신다. 종말의 장소를 불이 타오르고 짙은 어둠만이 있는 곳으로 상상해선 안 된다. 종말은 완성이기 때문이다(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떠날 것을 명하신다. 제자들에겐 기적의 힘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은 가난하고 부족하게 살아야 주님의 힘을 보존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예수님의 지시대로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길을 떠난 제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두 가지 마음가짐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무것도 없다는 두려움이고, 또 다른 선택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철저히 하느님께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두려움으로 미래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두려움을 이기고 하느님께 의지하려는 자세를 갖춥니다. 아무리 악조건의 현실에서도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고 하느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곳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일을 하다가 잘못하여 냉동 창고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뒤였습니다. 다음 날 냉동 창고를 연 직원은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꽁꽁 얼어 죽어 있는 모습의 동료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 냉동 창고는 고장 나서 그동안 작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의 몸은 얼어 있었습니다. 두려움은 그 자체로 죽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챙기지 말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임무를 다하였습니다. 하느님께 오롯이 의지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앞에 놓인 어려움에 대해 그저 두려워하고만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맨몸으로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제자들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기도했고 스승님의 능력에 기대를 걸었을 것입니다. 없으면 매달리지만, 많으면 쉽게 방심합니다. 계속 있을 것이라 착각하게 됩니다.
재물만이 아닙니다. 지식도 능력도 주변의 사람도 풍족하면 마음을 풀어 버립니다. 영원히 곁에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만에 빠지는 것이지요. 애절한 마음이 사라지면 영적 에너지 역시 빠져나갑니다. 하느님의 기운이 떠나면 어둠의 기운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삶이 밝지 않습니다. 마음도 얼굴도, 생각마저 어두워집니다. 쉬운 것만 원하고 재미있는 것만 찾게 됩니다. 일에서 짜증을 느끼고 좋은 소리만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기에 스승님께서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가난을 주문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미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난은 무소유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글자 그대로 자유로운 삶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지요? 아니, 무엇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은 우리의 현실적인 삶을 돌아보게 하고 있습니다.


 

 

성직자는 진실하고 가난해야   

강길웅 신부
 

타락한 종교인, 현실에 편하게 안주하고 있는 종교인은 개혁이나 변화를 싫어하며 또한 시대의 예언자들을 강하게 거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편안함에 불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정권에서나 그에 아부하고 있는 종교인들이 생기게 마련이며 또한 썩은 정치가들은 그러한 종교인들의 아첨에 함께 편안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1독서에서 북쪽의 사제인 아마지야와 남쪽의 예언자인 아모스와의 대결이 나옵니다. 종교인이 종교인과 강하게 부딪치는 것입니다. 아마지야는 북쪽 이스라엘의 사제로서 아마도 베델의 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타락된 왕의 체제하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나라도 아닌 남쪽 유다의 이름 없는 촌놈이 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자신의 위치에 위협을 느꼈던 것입니다. 아모스가 전한 내용은 그렇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망한다. 왕은 칼에 맞아 죽고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서 고생한다.' 그러니 아마지야가 가만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쪽 지역은 아마지야 몫인데 남쪽 나라 놈이 자기 국경을 넘어 월권 행위를 하고 있으니 비위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모스가 전하는 내용이 또한 듣기 거북했기 때문에 아마지야가 아모스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종교인은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지야가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현세적인 이익과 편리를 더 소중하게 여겼다면 아모스는 자신의 인간적인 욕구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사소한 차이 같지만 그러나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차이가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모스의 용기를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뜻의 성취를 위해 하느님의 모든 것을 이용하려는 속셈이 있습니다. 권력에 굽신거리고 재물에 타협하며 그리고 물질적인 이익만 가능하다면 가차없이 하느님을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 세상에서 기세를 올리고 큰소리치며 떵떵거리게 됩니다. 마치 아마지야처럼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의 길은 결코 쉬운 직책이 아닙니다. 아모스도 본래는 자기가 원해서 예언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그 직책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아모스뿐만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이 그랬습니다. 아무도 그 고달픈 박해의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붙들리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가도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용기있게 전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당부하시는 말씀은 사제와 신자들 모두가 새겨들어야 합니다. "여행하는 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 돈도 지니지 말고 신발도 있는 것을 그대로 신고 속옷은 두 벌씩 껴입지 말라." 다시 말해 물건과 재물에 탐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가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세속에 너무 관심이 많습니다.
사목자가 가진 것이 많으면 사목직 자체가 무겁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굉장한 분심거리요 방해가 됩니다. 신부가 결혼을 안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며, 청빈을 강조하는 것도 그 뜻에서입니다. 그리고 사실 재물은 바닷물과 같아서 가지면 가질수록 더 목마르고 부족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인생은 스스로의 감옥에 갇혀 불행하게 됩니다.
언젠가 카메라를 하나 구한 적이 있었는데 그 물건 하나 때문에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밤에 잠을 잘 때에도 누가 그 카메라를 훔치러 오는 것 같아 불안했으며 미사를 드릴 때도 누가 사제관에 들어가지 않나 해서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도무지 자나깨나 그 카메라 때문에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나중에 그 카메라를 누군가에게 주고 나자 인생이 개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참으로 무소유의 자유를 실감나게 체험했습니다.
 

사제는 가난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또 그래야 삶이 깨끗하고 순수하게 되며 또한 삶이 깨끗할 때 진정한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진실한 예언자는 자기 이익이나 편리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만일에 그렇게 묶인다면 그는 예언자로서의 가치를 이미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이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세상은 지금 진실한 예언자요 사제인 성직자를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자들은 바로 그들의 올바른 목소리와 가난한 삶입니다. 세상은 지금 물질적으로 너무 풍요로워졌으나 정신적인 가난에 허덕이고 있으며 사회의 혼탁한 현실에 대한 진실한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바로 그 중요한 임무가 성직자들의 몫입니다. 성서의 가르침대로 올바르고 가난하게 사는 성직자들이 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해야지

반영억신부

여행을 하기위해 짐을 챙길 때에 이것, 저것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행의 목적에 따라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꾸려야 합니다. 잘 챙긴다고 해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빠뜨리고 쓸모없는 것을 잔뜩 싸 들고 돌아다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음부터 짐을 줄여야지 하고는 똑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무엇인가 많이 소유를 해야만 안심이 되는가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교활동을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마르6,8-9)

이 말씀은 한마디로 한 눈 팔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부수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해야지 인간적인 그럴 듯한 수단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잔머리를 굴리지만 하느님의 일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도구삼아 일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느님을 이용하여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7,31) 고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근본에 충실하면 일의 결과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17) 하고 적고 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면서 물질의 소유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에 의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훼손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힘을 비워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 그 자리를 채워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힘에서 보이는 힘이 나오는 법입니다.

일반적으로 처음여행을 떠날 때에는 보따리가 큽니다. 그런데 자주 여행을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보따리가 작아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뭔가 손해 볼 것 같은 마음,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실천하면 할수록 행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접고 주님께서 명하시는 방법을 선택하고 결정함으로써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서, 물질에게서, 나 자신에게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천상을 향하는 인생여정에서 보따리 정리를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외딴곳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라 (마르코 6,30-34)13.02.09조회 44예수의 소문이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마르6,14-29)13.02.08조회 44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며 (마르코 6,7-13)13.02.07조회 45예언자는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코 6,1-6)13.02.06조회 44달리다쿰..소녀야 일어나라! (마르 5,21-43)13.02.05조회 773마귀들과 돼지 떼 (마르 5장 1-20)13.02.04조회 6892월 2일 봉헌 축일 / 봉헌 생활의 날13.02.02조회 50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26-34.)13.02.01조회 212등불은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는다,(마르 4,21-25)13.01.31조회 44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르코. 4,1-20)[3]13.01.30조회 1,538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마르코 3, 33-35)13.01.29조회 62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마르코 3,22-30)13.01.28조회 441월 26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루카 10,1-9)13.01.26조회 451월 25일 금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마르코 16,15-18)13.01.25조회 44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마르코 3,7-12 )13.01.24조회 876“손을 펴라.” (마르3,1-6)13.01.23조회 1,204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코 2,23-28)13.01.22조회 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