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코 6,30-34)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양들이다. 착한 지도자는 하느님의 좋으심을 전한다. 하지만 악한 지도자는 양 떼를 흩어 버리고 파멸로 이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정의롭고 공정한 지도자를 더 많이 보내 주신다(제1독서). 신앙인은 예수님의 피를 통해 하느님과 가까워진다. 그리스도야말로 인류의 평화이시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다(제2독서). 군중은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르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느끼신다. 그러기에 기적과 가르침을 통해 당신의 영적 에너지를 주고 계신다. 제자들 역시 스승님을 본받아 하늘 나라의 가르침을 열정적으로 전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외딴곳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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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전교지에서 돌아온 제자들은 스승님께 보고를 드립니다. 저마다 기적을 체험한 이야기였습니다. 병자들이 낫고, 마귀 들린 이가 멀쩡해지며, 절망에 잠긴 이들이 희망을 갖게 된 이야기였습니다. 보고를 듣고 나신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에서 쉬자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의아했을 것입니다.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기적의 능력’을 드러내고 싶은데 쉬자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피곤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외딴곳으로 떠나십니다. 휴식은 낭비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쉰다고 하면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합니다. ‘남들은 일하는데 쉬어서 되겠는가.’ 쉽게 이런 생각에 젖습니다. 그러니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돌아온 제자들에게 휴식을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평상시 여유를 되찾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삶의 여유는 은총입니다. 주님께서 주셔야 진정한 여유가 생깁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 설정도 못 한 채 바쁘게만 살고 있다면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느끼셨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방향 감각’을 상실한 인생입니다. 사는 것에 매달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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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은 인(仁)을, 부처님은 자비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인과 자비와 사랑은 서로 통하는 용어입니다. 불쌍한 것을 보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사랑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마음까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까지 함께하려면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한편 더 긴 여행은 마음에서 손과 발까지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마음으로는 가엾게 여기나 우리의 손과 발이 도움을 베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쌍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으려면 아직도 더 많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함께 이 긴 여행을 떠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으시는 예수님
-안병철신부-
예 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던 제자들에게는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진정 그들에게서 관심의 시선을 떼지 않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분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마치 목자 없는 양들 같이 여겨져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서도 관심의 시선을 떼지 않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서 관심의 눈길을 떼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주님이라 고백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의 피로를 어루만져 주시며 동시에 군중의 갈증을 풀어주시는 예수님은 정녕 인간이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과 아픔에 함께하는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면 되는 거 아닌가!
도움받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구차하게 손 벌리지 않고 또 굳이 도움을 주려고 애쓸 필요 없이 살면 그만이지 뭐, 안그래? 나 하나 잘살면 그만이지.’
주변에서 가끔은 그런 식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혹시우리가그런생각으로살아가는것은아닐까?’라고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것이기를 바라면서도 이기적인 사고에 푹 빠져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 안에 은연 중 그런 식의 사고가 자리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네가 걱정한다고 되는 거 아니네. 그러니 자네 걱정이나 하며 살게.’그런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도 더러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서 아니 세계 도처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의 순간들을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 한두 군데이겠습니까?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어. 나 혼자 발버둥친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아니 지구촌 안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인데 내가 나서서 될 일이 뭐 있을까? 그럴 바에야 나만이라도 시간의 여유를 갖고 살아야지. 쉴 줄도 알고 즐길 줄도 알아야지! ’
오래 전 부터 이미 길들여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을 합리화 내지 정당화시켜보려는 그런 식의 얄팍한 논리야말로 더불어 살아야 할 세상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나만 잘살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것이 아니라면 우리 신앙인들은 예외 없이 어느 누구에게서도 눈길을 떼지 않으신 주님을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음으로써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해결해 주신 예수님의 자리를 이제 우리가 대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릇 믿는 사람이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향해 변화해가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원동력은 외딴곳에
사람은 때때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니 때로는 지금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하고 있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 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창세2,2-3)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들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만큼 예수님께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 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 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습니다.(루가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주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