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들과 돼지 떼 (마르 5장 1-20)

2013. 2. 4. 오전 7:52:11

글자

2013년 2 4연중 제4주간 월요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르5,1-20)

말씀의 초대

구약의 판관, 임금, 예언자 등 많은 인물이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충실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충만한 은총이 주어지지 않았던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백성이 된 우리에게는 그것이 주어졌다(제1독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는 더러운 영이 마을 전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어 왔다. 예수님께서는 그 영을 내쫓으시어 돼지 떼로 보내셨고, 그 돼지 떼는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도리어 예수님을 마을에서 내쫓는다(복음).  

오늘의 묵상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옵니다. 왜 하필 무덤일까요? 사람이 사는 마을이 아니라 무덤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가 죽음의 세력 안에 갇힌 사람이며, 다른 이들과 친교를 나눌 수 없는 단절된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사람이기에 다른 이들에게 공격성을 지니게 되고, 사람들은 그에게 꼼짝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더러운 영 하나의 영향력으로 죽음과 단절의 악취가 퍼지고 있는 곳이 바로 게라사인들의 지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과 단절의 세력’인 더러운 영이 ‘생명과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영은 예수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돼지는 성경에서 불결한 짐승이며, 더러운 영이 갈 수 있는 곳이란 결국 더러운 곳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본디 더러운 영이 들어와야 할 곳이 아니라, ‘성령의 궁전’이어야 하는 법입니다.
이로써 마을에는 죽음의 세력이, 단절과 폐쇄의 세력이 사라지게 되었고, 더러움의 상징인 돼지 떼가 물에 빠짐으로써 마을 전체가 정화되었습니다. 죽음과 단절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놀라운 은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돼지 떼의 손실만 보게 되었다는 경제적인 논리에 갇혀 구원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마을에서 쫓아냈습니다. 당장의 이익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세상의 논리에 사로잡혀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무심히 여기지는 않습니까?

☆☆☆

유다인들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물론, 돼지를 키우는 것조차도 구약의 율법에 따라 엄격히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데카폴리스 지방 이교인들은 양돈 사업이 이익이 크기 때문에 양돈업에 열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에게 이 지역은 불결하고 부정한 곳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셔서 ‘군대’라고 불리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야말로 사람을 ‘집단’으로 괴롭히던 마귀들을 예수님께서 돼지 떼 속으로 쫓아내시자,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호수로 뛰어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게라사 지방에서 들려온 이 소식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사람이 마귀로부터 해방된 ‘기쁜 소식’으로 들리겠지만, 사람보다 재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재산을 잃은 ‘슬픈 소식’이 됩니다. 그러자 재산만 보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제발 그곳을 떠나 주십사고 간청합니다.
오늘날 재산 때문에 형제와 불화가 생기고, 이웃과 원수지간이 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복음적 이해로 보면, 사실 ‘부정한 짐승’은 ‘돼지’가 아닙니다. 사람보다 재물을 더 소중히 여기는 인간의 뿌리 깊은 탐욕이 ‘부정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시는 것도 모두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재물이 사람을 미움과 갈등으로 몰아넣는다면 없는 것만도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 모든 재물을 잃더라도 한 사람의 영혼이 예수님께는 더없이 소중합니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어떤 이를 구해 주십니다. 그에겐 많은 귀신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군대’입니다. 그는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사슬로 묶어 두었지만 그는 괴성을 지르며 자기 몸을 돌로 치곤 하였습니다. 생각하면 가련한 사람입니다. 뭔지 모를 영에 사로잡혀 정신 이상자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동네를 내려오는 것을 막으려고 쇠사슬로 묶어 두었을 겁니다. 그는 한 마리 짐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낫게 하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자유롭게 하십니다. 어두운 영에 사로잡혔던 그를 광명의 세계로 끌어내신 겁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주제입니다. 예수님께 그러한 능력과 힘이 있음을 알리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그 사람 못지않게 어두운 세계에 갇혀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본능이든 습관이든, 아니면 고통스러운 체험이든, 사슬이 되어 그를 묶고 있습니다. 자유를 위해서는 주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령이 돼지에게 가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유다인들은 이해합니다. 돼지는 율법에 금지된 동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순교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부정한 동물로 여겼기에 악령이 돼지에게 가는 것을 허락하신 겁니다. 이방인들은 이를 보고 놀랍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더러 떠나가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들에게는 두려운 분이었습니다. 모르면 두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

동네 사람들은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기피했습니다. 괴성을 지르고 이상한 행동을 하기에 무덤가에 묶어 두었습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리는’ 괴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입니다. 그런데 그가 무릎을 꿇고 외친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괴력의 남자는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성경은 그를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라 했습니다. 쇠사슬을 끊고 족쇄를 부수어 버리는 힘은 그의 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를 사로잡았던 ‘더러운 영’의 힘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서 물러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
복음의 교훈은 간단합니다. 어떤 ‘영’도 예수님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그를 ‘말씀 한마디’로 제압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악한 기운’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술만 먹으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맨 정신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이 술만 먹으면 남을 괴롭힙니다. 괴력을 발휘합니다. ‘어떤 힘’이 그렇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어찌 술뿐일는지요? 일중독, 게임 중독, 놀이 중독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악한 기운’에 사로잡힌 자를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 한 말씀에 그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선한 기운’을 되찾은 것이지요. 주님의 말씀이 그립습니다.

사랑의 향기마을

내 이름은 군대입니다!

-오상선신부-

 

그대 이름은 무엇이뇨? <악령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름은 무엇이뇨? <군대라고도 하지요.>

군대라니, 별 이름도 다 있구먼... <수효가 많아서 붙여진 별명이지요.>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완전한 공동체가 아닌 이유는 그 구성원 대다수가 선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의 악한 사람 때문에도 사랑과 평화가 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의 힘, 죄의 힘은 그야말로 막강하게 느껴진다.

어느 공동체이든지 꼭 한 두 사람의 악한 마음과 시기, 질투심, 욕심이 공동체의 평화를 깨트리니 참으로 한 사람의 악한 생각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악령이 자신의 정체를 <군대>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악한 생각을 가진 한 사람이 전 세계의 평화를 좌지우지 할 수 있음을 우리는 보아왔고

 

또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가정 공동체, 수도 공동체, 직장 공동체, 본당 공동체, 사회 공동체, 국가 공동체 곳곳에서도 작은 악의 씨 하나가 그 공동체를 온통 풍지박산으로 몰고감을 우리는 매번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때론 나의 악한 말 한마디가 공동체 구성원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기면서 공동체의 평화가 와해되고....

 

따라서 우리는 악의 '군대성', '집합성'에 늘 유의해야 한다. 선의 결속성은 자유를 지향하기에 느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악의 결속성은 구속을 지향하기에 군대성을 띨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소위 조폭이라고 하는 집단도 군대성을 띨 수 밖에 없고 악의 세력은 항상 결집을 하는 속성을 지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결집된 군대성을 깨트려나가는 것이 악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예수님께서 군대라는 악령을 쫓아내는 것은 바로 그 결집력을 와해시킴으로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워낙 단단하게 뭉쳐져 있기에 잘못 접근하다가는 더 큰 상처를 입게 된다.

단단한 것일수록 정곡을 찔러야 한다. 정수리를 꿰뚫어야 한다.

단칼에 내리쳐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도 이러한 악의 씨앗이 자라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악의 씨앗을 잘못 내버려두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은 악이 지닌 속성, 즉 군대성, 결집성 때문이다.

암을 조기에 진단해서 치료하지 않으면 급속도로 전신에 퍼져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듯이  우리 안에 자리를 트는 악한 생각, 악한 마음, 미움의 감정, 이기심, 욕심, 교만과 시기, 질투 등을 조기에 제거해야 한다.

 

어설프게 접근하지 말고 정곡을 찌르고 정수리를 꿰뚫고, 단칼에 내리쳐야 한다.

수많은 돼지떼를 잃는 아픔이 있어도 말이다.

수많은 아픔과 손실로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손 치더라도 악의 뿌리, 악의 씨앗을 제거하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선행에 열중한다 하더라도 선이 악을 이기기는 불가능하다.

선의 자유에로의 느슨함이 악의 구속적인 결집력을 이겨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오늘 내 안에 악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지는 않은지 찾아보자.

그리고 과감히 그 악의 세력을 물리치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조기에 진단하고 제거해 나가자. 비록 아픔이 있더라도...

그 길만이 제대로 살길이다.

악령에 들렸던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악령에서 해방된 그는 진정 자유인이었으리라. 자, 나도 그런 자유인이 되자!

 



삶 안의 악령들...그리고 그들과의 전쟁

-상지종신부-

예수님과 수효가 많아서 군단이라고 불리우는 악령들 사이에 한판 전쟁이 벌어집니다.

악령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다른 살아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죽음의 세력입니다. 또한 악령들은 사람의 힘과 의지만으로는 도저히 휘어잡을 수 없는 엄청난 힘을 지닌 세력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세력들은 예수님 앞에서는 무기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령들의 본 모습을 드러내고 이들을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쫓아내십니다.

악령은 ’전설의 고향’에나 나오는 귀신의 모습을 한 무엇이 아닙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귀신의 모습이라면, 악령을 쫓아내달라고 예수님께 매달릴텐데, 이 악령들은 우리의 마음 안에,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안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자기 안에 악령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못하도록 무덤과 같은 죽음의 울타리에 우리를 가두어버리는 악령들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게 하는 악령, 남의 떡이 커보이게 하여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깔보게 하는 악령, 남이야 죽든 말든 나 혼자 배부르면 된다고 부축이는 악령, 남들은 무조건 잘못했고 자신만이 옳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악령, 무조건 이겨야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악령, 돈이 최고라고 믿게하는 악령, 크고 작은 성취를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게 하는 악령,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악령, 정치는 정치인만의 몫이니 시민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고 떠들어대는 악령, 생태계를 파괴하고서도 일부 사람들만이라도 편안하게 살면 된다고 조장하는 악령들 입니다. 조금만 살펴보면 참으로 수많은 악령들이 우리 안에,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악령들과 함께 희희덕거리며 살아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마냥 기쁜 일만은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쓰라린 아픔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복음은 우리 안에 있는 이 악령들을 들추어내고 이들을 우리에게서 쫓아내시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악령들에게서 벗어나야만 우리는 참으로 기쁜 마음으로 이웃과 하나되어 주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악령과 싸우실 수 있도록 예수님께 다가서야 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악령들을 쫓아내어 혼자 사는 이기적인 삶의 상황, 즉 죽음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 즉 생명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물론 악령들이 쫓겨나면서 우리 안에 수많은 상처를 내겠지만, 그럴수록 예수님께 다가섬으로서 완전하 새사람으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귀신들린` 오늘의 현실

 

-최연석 목사-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실제로 본 사람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누구나 한두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마귀’ 또는 동양식 버전인 ‘귀신’이다. 우선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는 대부분 ‘귀신’보다는 ‘귀신들린 상태’ 또는 ‘더러운 영’ 등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곧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악한 세력의 총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귀신을 우리는 가끔 세상에서 본다. 지난번 탄핵사태가 났을 때 나는 사람들이 ‘귀신에 홀리지 않고서야’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총선을 치르고 보니까 그런 생각은 나 혼자 한 것이 아니라 국민 대부분이 한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그 똑똑한 국회의원들이, 학자들이, 언론들이 입에 거품을 품고 달려들어 요절을 낼 것처럼 법석을 떨었다. 그리고 그 사태가 끝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미쳤다’는 말까지는 쓰지 못하겠지만 분명 제정신은 아니었다. 무엇에 홀렸을까? 지역주의·당리당략·개인의 이해관계? 하여간 무엇에 홀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 핵문제나 작전권 문제도 그렇고, 부동산 투기 문제도 그렇다. 지금도 방방곡곡에 나붙는 아무개 아들 고시합격이라는 현수막도 그렇다. 같은 물건이라도 백화점에 높은 가격을 매겨놓은 상품이 더 잘 팔린다는 세태도 그렇다. 우리는 혹시 있지도 않은 귀신에 홀려, 누군가 만들어 낸 귀신에 홀려 이렇게 광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몇백만 원 한다는 핸드백을 그대로 위조하여 만들어 낸 사람이 붙잡혔다. 그 사람은 한 개에 삼천 원씩 받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품을 만든 회사도 그 모조품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조금 유쾌했다. 때로는 귀신에 홀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귀신이 곡할 노릇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있는 모양이다.


주님을 만나서 행복하십시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주님을 만나서 행복하십시오.  그 날의 기분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을 만나면 기쁨이 크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아픕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못된 사람 만나서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만나면 운명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변합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나왔습니다. 그것은 큰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사랑이 없는 미움과 시기, 질투, 분노, 적개심, 무관심 등으로 지옥같이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치곤하였다는 것은 분노와 자학으로 괴로워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 어둠에서 나왔으니 복이 있습니다.
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마르5,15)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로마12,2)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예수님 곁에 같이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 떠나주기를 바랬습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루카4,28)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도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마르5,6)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악령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였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5,18) 하고 청하였습니다. 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청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정신이 들어 청원한 기도이니 만큼 우리도 기도를 할 때 제 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턱대고 청하지 않고 효과적인 기도, 꼭 이루어지는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뜻에 의합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거절하신 것으로 믿고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 새 생활을 시작하였듯이 우리도 주님을 만나 ‘새로 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상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누군가 나를 만나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날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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